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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저를 한국계 미국인이라고 부르면 그냥 미국인이라고 대답하곤 했습니다.”

‘국무부서  한국 이슈 업무 금지 통보 받고 오히려 깨달아’
 엔디 김 의원이 후원자들에 보낸  최근 이메일 사신

 

” 이메일을 받고 눈물이  나네요”  박동규

– 나이 때문일까요? 정치인의 이메일을 받고 눈물 흘리기는 처음 이네요. 연방 상원에 도전하는 앤디 김 의원 으로부터 미주 한인의 날’을 기념하며 자신이 받은 차별의 경험담과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담은 진솔하고 공감되는 글을 이메일로 받았습니다. 그가 국무성 국가 안보 전략가에서 연방 의회에 도전한 이유도 더 잘 알게 되었습니다.
미국에서 태어난 미국 시민이지만 백인 주류사회가 바라보는 정형화된 시선, 즉 ‘모범적 소수계'(Model Minority)와 ‘영원한 이방인'(Perpetual Foreigner) 사이에서 갈등하며 자라온 이야기가 마음이 아프도록 짠하네요. 바로 우리 자신과 우리 자녀들의 이야기라서요.
11월 선거에서 꼭 이겨서 한국계 최초의 연방 상원의원이 되시길, 그리고 그동안 ‘꺽이지 않는 마음으로’ 해온 소수인종 및 이민자의 권익과 한반도 평화를 위해 더욱 열심히 일해 주시길 바라고, 원하고, 간절히 기도합니다! (혹시 못받으신 분들을 위해 이메일을 번역하여 공유합니다: DeepL 번역 도움) –  박동규 (변호사, 활동가) 카카오 스토리에서

후원자님께: 

이번 주말에는 미주 한인의 날을 기념하며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전통 한복을 입은 아들들을 보면 정말 귀엽다는 사실 외에도 제가 살아오면서 힘들었던 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이 떠오릅니다. 

부모님은 50년 전에 이곳으로 이사를 오셨고, 지구 서반구 전체에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셨습니다. 저와 제 여동생은 이곳에서 태어났고 약 7000마일 이내에 다른 친척이 살지 않았습니다. 부모님은 우리를 어떻게 키워야 할지 고민하셨지요. 부모님은 우리가 악센트 없이 영어로 말하기를 간절히 원하셨습니다. 부모님은 우리가 자신들과 같은 대우를 받는 것을 원치 않으셨고, 이로 인해 항상 외국인으로 평가받는다는 불안감을 느끼셨지요. 

부모님은 우리를 영어와 한국어를 구사할 수 있도록 키우려고 했지만, 제가 어렸을 때 말이 느려지자 겁을 먹고 한국어를 가르치지 않으셨죠. 저의 유산과 지리적 환경이 충돌하면서 조화보다는 갈등과 긴장감이 더 크게 느껴졌었습니다. 

저는 한국계 미국인이나 더 넓게는 아시아계 미국인이 많이 사는 곳에 살지 않았어요. 학교에서 외모가 다르다는 이유로, 점심시간에 다른 음식을 먹는다는 이유로 놀림을 자주 받았기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방어적으로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최소화했습니다. 

우리는 한인 교회에 다녔고, 그 교회는 여러모로 제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처음 접한 곳이 되었습니다. 주일 교회는 하루 종일 예배와 한국어 수업으로 가득했습니다. 일주일에 하루만이라도 제가 한국인인 것처럼 느꼈습니다. 하지만 다시 학교로 돌아가서 부모님께 도시락에 한국 음식을 넣기 싫다고 말했어요. 그 후 한국어 수업을 듣지 않았습니다. 고등학교에 진학할 무렵에는 누가 저를 한국계 미국인이나 아시아계 미국인이라고 부르면 그냥 미국인이라고 대답하곤 했습니다. 

외교정책을 공부하러 갔을 때 선생님들은 제가 아시아를 공부하고 싶다고 생각하셨어요. 아마도 그것이 제가 중동과 아프리카에 집중하기로 한 결정에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다르푸르에 관한 강연에 참석했을 때 누군가 "아프리카에 관심이 있는 줄 몰랐다"고 말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제 유산이 제 정체성과 더 큰 충돌을 일으켰습니다. 외교 업무를 담당하던 국무부에서 어느 날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이유로 한국 관련 이슈에 대한 업무가 금지되었다는 통보를 받았을 때가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깜짝 놀랐어요. 중동 전문가로서 한국 이슈를 다룰 생각도 없었는데 말이죠. 국무부는 왜 저를 금지했을까요? 기본적으로 저를 믿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조국 대한민국을 위해 일한다고 해서 미국에 100% 충성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거죠.한국계 미국인이라는 제 정체성에 대해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100% 미국인으로 보일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저는 굴욕감을 느꼈고, 제가 안보 위험인물로 간주된다면 외교 정책 분야에서 제 경력이 결코 성공할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몇 년 후 저는 의회에 출마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당시에는 의회에 한국계 미국인이 한 명도 없었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것은 제가 처음에 깨뜨리려고 했던 장벽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야당 측에서 "앤디 김, 그는 우리 편이 아니다"라는 광고를 TV에 내보내기 시작했을 때, 저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더 큰 문제가 있다는 것을 마음속으로 느꼈습니다. 전문가들은 백인이 85%, 아시아계 미국인이 3%도 안 되는 이 선거구에서 제가 이길 수 없다고 말했죠. 하지만 저는 해냈습니다. 

저는 최근 아빠가 되었습니다. 두 명의 아름다운 한국계 미국인 아들이 있습니다. 저는 이제 부모님을 대신해 가족 유산과 국적 사이에서 아이들을 어떻게 키워야 할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때 제가 말했던 것은 다른 사람들이 제 인종과 민족 때문에 제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결정하도록 내버려두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도 다른 누구와 마찬가지로 제 커뮤니티를 대표할 권리가 있습니다. 제 이야기는 한국계 미국인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미국인의 이야기입니다. 

저는 하원 의사당 바닥에 서서 취임 선서를 하고 있는데, 아래를 내려다보시는 어머니를 바라보았습니다. 저는 아직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완전히 알지는 못하지만, 제가 누구인지 알고 있고, 한국인이라는 것과 미국인이라는 것이 자랑스럽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후원에 감사드리며 곧 다시 소식 전하겠습니다, 

앤디 김 의원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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