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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實錄)소설>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84)

안동일 작

<중간 작가의 말  3. >

이념 대립과 상대방 악마화

   2025년이 밝아 벌써 며칠이 지났다. 밀레니엄이 시작된다고 떠들썩 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4 반세기가 흘렀다는 얘기다. 세월은 살 같이 빠르다는 말이 실감난다. 세월은 나이에 비례해서 빨리 간다는 말이 있다. 20대 때는 20 킬로미터의 속도로 30대는 30 킬로,  60 대에는 60 킬로의 속도로 세월이 간다는 얘기다.  

 필자의 세월 가는 속도가 60 킬로 중반을 넘은 지금,  그 말이 새삼 가슴에 와 닿는다. 이 빠른 세월에 나는 무엇을 했고 무엇을 할 것인가.  필자는  20 킬로 초반의 속도 때 미국에 와서 그때 부터 기자 생활을 하다 인생에 있어 가장  중심 속도라 할 수 있는 40, 50 킬로 미터의 순간을 한국에서 보내야 했다. 한국의 가장 큰 문제점인 이념 갈등과 양극화를 온몸으로 체험 했다는 얘기다. 그것도 현실 정치에 한발을 담그고.

  이 실록 소설은 한국 사회에 난마처럼 얽혀 있는 심각한 갈등의 연원은 어떻게 되고 어찌하면 해소 할 수 있는지에 초점을 두고 있다.  어차피 인간이 모여서 사회를 구성하고 살면서  생각의 차이에서 나오는 의견 대립과  갈등은 어쩔 수 없다고 하지만  우리 한국의  경우는 그것이 너무 심하다. 서로 상대방을 악마화 하고 있다. 

 한국의  이념 갈등, 양극화 현상은 2025년 새해가 밝은 이즈음  심각하다 못해 전대미문의 처절한 양상으로 노정 되고 있다. 헌정사상 최초로 현직 대통령에 대한  체포 영장이 발부된 지금, 대통령 관저가 있는 한남동 일대가 ‘레알’ 무대다. 

 체포영장이 발부된 지 나흘째인 3일, 수사당국은 체포에 나섰지만 5시간 대치 끝에 철수 해야했다.  당국의 법 집행을 막은 경호처 직원 들의 직업정신은 의리와 지조를 높이 사는 우리 풍토에서 일응 이해 되는 측면이 있기도 하다지만 이건 아닌데 싶다. 저들은 그가 직무는 정직 됐지만 아직 현직이라는, 그리고 특정 개인 보다는 경호원이라는 직업에 충성한다는  비장한 ‘정신 승리’ 를 하는 모양인데… 

 대통령 관저 주변은 윤 대통령 비판, 지지 집회가 열리며 혼란이 계속되고 있다.  특히 윤이  지지자들에게 “여러분과 함께 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끝까지 싸울 것”이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고, 이에 호응한 지지자들은 ‘계속해서 체포를 막자’며 관저 앞에서 시위를 이어가고 있어 경찰과의 충돌이 벌어지고 있다. 한 남성은 영장 집행을 막겠다며 강추위에 웃통을 벗고 성조기를 입에 문 채 경찰 앞을 가로막는 시위를 벌였고, 죽창과 새총, 쇠파이프를 확보하고 LPG 가스통으로 방어진을 쌓자는  주장까지 나왔단다.  한  유튜브 진행자는  “지금은 전쟁입니다. 일반 상황이 아니에요. 어떻게 권한도 없는 놈들이 대통령을 체포를 한다고 합니까. 막아야 합니다. 들 수 있는 무기는 다 들어야 합니다.”  했단다.

 다행히 이 말대로 되지는 않고 있지만 일촉 즉발의 대치 상황은 계속 되고 있다. 그 한 사람 때문에… 또 다행인 것은 이번 내란사태에서 사상자가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지만 이 와중에 항공기 참사로 2백명 가까운 우리 국민이 생명을 잃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그들이 우리의 이 참담한 현실의 책임을 대신해 희생 된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에 충심으로  명복을 빌게 된다.     

 탄핵 반대 시위에 참가한 한 우익 성향 유명 가수의 말은 역지사지 격으로 현실을 그대로 묘사 하고 있다. “그 사람들과는 대화가 안 돼,  어떻게 자기네 말은 다 맞고, 자기네 하는 행동은 다 맞고, 우리가 하는 건 하나도 안 맞고 이런 나라가 세상에 어딨냐?” 라고 바럭 성 까지 냈단다. 그 사람들이란 탄핵을 찬성하는 시민들이다.  

 어쩌다 이지경 까지 왔을까,  

한국의 좌우 대립, 이념 갈등은 공산주의가 대두되고 러시아가 공산 혁명을 성공한 1917년 이후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내재 되어 있다가 1945년 해방과 더불어 표면화 되었고  6.25 동란으로 폭발 됐다고 할 수 있다.

 우리 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공산주의는 태동 단계 부터 위험 사상으로 간주돼 기득권 세력으로 부터 불온시 됐고 탄압을 받았던 것은 사실이다. 미국도 그랬다는 것은 살펴 보았고  일제 역시 국민들에 대한  반공 교육에 적극 나섰다. 

 우리 근 현대사에서 좌우 대립이 극명하게 표출 돼  국민을 반분하고 물리적 충돌까지 있었던 첫번째 사례가 해방 정국에서 신탁통치를 놓고 벌인 반탁 찬탁 운동이다. 

 유발 하라리는 ‘사피언스’ 에서 역사를 우연의 연속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역사를 알아야 하는 이유를 우리에게 다른 선택도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우연이라는 말 대신 다른 말을 쓴다. 

   1945년 12월 27일, 당시 최고의 발행부수 신문이었던 동아일보는 1면 머릿기사로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소련이 강력히 주장해 한국에 대한 5 년간의 신탁 통치가 결정 됐다고 보도 했다. 

 전국이 들끓었고 다음날인  28일부터 전국적으로 반탁 시위가 격렬하게 진행됐다. 좌익 계열도 참여한 시위 였다. 일제에 의한 36년간의 식민 지배를 겪은  민족에게 다시 신탁통치를 실시하겠다는 것은   수용되기 어려운 일 이었기 때문이다.

 신문은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의 결정 내용에서 한반도에 대한 신탁통치가 가장 핵심적인 것이라고 보도하면서  미국은 즉시 독립을 주장했지만, 소련이 신탁통치를 주장했다고 제목을 뽑았다. 소련에 대한 원망과 증오가 들끓었다.  그런데 이는 큰 왜곡이었고 명백한 오보였다.  

  3상회의는 12월16일부터 27일까지 열렸는데  이 기사가 나오던 시점에서는 회의 결과가  채 공개되지 않았던 때 였다.  실제 합의 사항이 보도된 것은 사흘 뒤인 12월30일이었는데 그때  신문들은  그 내용을 눈에 잘 띄지 않는 작은 기사로 처리했다. 

  모스크바  미 영 소 3국 외상 회의에서 주요하게 결정된 사항은 첫째, 한국의 민주 임시정부를 수립할 것, 둘째, 이를 돕기 위한 미소공동위원회를 설립할 것, 셋째, 한반도에 대해 최대 5년의 신탁통치를 실시할 것 등 이었다.   그런데   신탁통치는 임시정부 구성보다 방점이 찍히지 않는 추가 사항이었고 유엔에 신탁 통치 이사회를 만드는데 앞장 섰던 미국 측의 구상이었다. 말이 신탁 통치지 한국인이 구성한 임시 정부의  후견이라 할 만한 내용이었다.  오히려 소련은  즉시 독립을 주장했다.  아무튼 세 가지 사항 중 한반도에 대한 신탁통치 결정이 불문곡직 한반도의 좌우익을 극렬하게 대립하게 했다.

  좌익이 며칠 뒤 신탁통치( 3상회의 결정)를 찬성하는 쪽으로 입장을 선회했기 때문이다. 좌익은 자신들이 처음에  반대했던 것은 정보의 부족으로 인한 것이었다고 했다.

 그 사이에 서로 입장이 같지 않았던 우익의 이승만과 김구가 한 목소리로 ‘신탁통치 반대!’  ‘3상회의 결정 거부!’를 천명했고, 일반 국민은  반탁운동을 제2의 독립운동이라 생각하며 열심히 참여했다.

 우익은 신탁통치를  찬성하는 좌익을 강하게 규탄하면서 매국노들이 라고 불렀고 일제에 부역했던 친일파들이 반탁 운동에 편승하면서 일명 ‘애국자 행세’를 할 수 있게 만들면서 이 땅에서 그때까지 다수파로 여겨졌던  좌익의 입지가 급속하게 좁아졌다.   

 이런 좌우익의 극심한 대립은 이후 미국과 소련의 협상 분위기를 여지없이  깨뜨렸으며, 한반도를 둘로 나눈 외세의 영향력 속에서  민족을 분열하게 했다. 물리적 충돌까지 빈번했던    반탁 운동과 찬탁 운동이 반공·반소운동과 반미운동으로 연결되고 이후 미국과 소련 간에 냉전이 격화된 국제정세와 맞물리면서  민족이 분단되는 큰 원인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그때 일반 국민들은 마치 3.1운동을 재현 하듯 46년 한해 동안 줄기차게 거리 시위에 나섰다. 결과적으로 어찌 됐건 민중의 힘은 승전국의 합의 까지도 꺾을 수 있어  결국은 남북한 단독정부 수립이  이뤄지게 된다.   

 이 반탁 찬탁 운동에 대해서는 워낙 중요한 사항이기에 후일 ‘씨알 사상’ 유영모 선생이 등장하는 대목에서 자세히 다루기 한다.

아무튼 이때 일어난 좌우익의 대립은 상대를 대화 하지 못할 사람, 말이  통하지 않는 부류, 나아가  악마화로 이어지는데 그 결정적 연원은 병인 박해에서 비롯 됐다는 것이 필자의 결론이다.

  병인박해(丙寅迫害)는 1866년(고종 3년) 흥선대원군 정권에 의해 벌어진 대규모의 천주교 탄압을 말한다. 병인사옥(丙寅邪獄)이라고도 하는데  1872년까지 6년간 진행된 탄압으로 당시 최소 8천명 이상의 평신도와 9명의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 출신의 사제 선교사 등이 처형됐다.  이일은 부메랑으로 돌아와 조선의 명운을 극도로 단축시킨 일이 된다.  ​기해 박해때 목에 칼로 금을 그었다면 병인 이후의 일은 아예 동맥을 건들인 일이 됐던 것이다. 

워낙 탄압이 악랄하고 심했기에 온 백성이 겁에 질려야 했고 이런 상황을 만든 천주인들을 그때 까지는 대개  동정했었는데 이내 원망하고 질시했으며  끝내는 악마화 하게 됐던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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