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 참전용사 테드 윌리엄즈를 기리며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고의 타자, 오늘 7월 5일이 그 기일
테드 윌리엄스는 야구 팬들에게는 익숙한 이름이다. 보스턴 레드삭스의 전설적인 선수다. 메이저 리그 역사상 마지막 4할 타자로 잘 알려져 있는데 보스턴 레드삭스 뿐 아니라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고의 선수, 타자 중 한 명이다. 양키즈 구장에서도 그의 얼굴이 스크린에 나오면 모두 고함을 질러 댄다.
1918년 8월 30일에 태어난 그는 2002년 7월 5일 세상을 떠났다. 오늘이 바로 그의 21번째 기일이다. 이 기일을 우리 한국인들은 각별히 기억 해야 만 한다. 그야 말로 우리 한국과 관련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 한 괄목할 인물이기 때문이다.
먼저 그가 얼마나 대단한 선수였는지 살펴 본다.
그의 타격 인생은 1939년 4월 20일 데뷔전 첫 타석에서 라이벌 팀인 뉴욕 양키스의 투수 루핑으로부터 우익선상을 가르는 2루타를 기록하면서 역사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20살의 약관의 나이에 그는 그해 시즌에서 +3할타율을 가볍게 달성, 31홈런과 ML역대 신인최다인 145타점으로 팀의 공격을 이끌며 보스턴의 차세대 주포로서 그린몬스터로 유명한 펜웨이파크를 찾는 보스턴 팬들에게 화려하게 신고식을 치렀다.
양키스에게 리그우승의 문턱에서 번번이 밀려나며 밤비노의 저주를 풀지 못하고 있던 보스턴은 테드 윌리엄스를 필두로 보비 도어 등의 신예들이 팀의 분위기에 적응하자 새로운 활기를 갖고 전력이 급상승하기 시작했다.
1940년 타율.344로 2년차 징크스없이 리그 3위의 성적을 기록한 그는 이듬해 1941년 자신의 3번째 올스타전 출전경기에서 9회 끝내기 홈런으로 AL 올스타에게 승리를 안기는 활약과 함께 시즌 중반까지 4할의 타율을 계속적으로 유지하여 1930년 뉴욕 자이언츠의 빌 테리 이후 어떤 타자도 달성하지 못한 꿈의 4할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시즌 막바지였던 9월 27일까지 타율.401을 기록하자, 당시 감독이었던 조 크로닌은 4할타율을 유지하도록 경기에 더 이상 출전하지 말 것을 권유했으나, 윌리엄스는 그러한 제의를 거절하고 계속해서 경기에 출전하는 용기를 발휘했다.
9월 27일 필라델피아 어슬레틱스와의 경기에서 4타수 1안타로 타율이 .399로 추락해 한때 4할의 꿈이 사라지는 것처럼 보였지만, 다음날 경기에서 5타수 4안타를 기록, .406까지 상승함으로써 1941년 4할의 타율로 시즌을 마감했다.
MVP까지 점쳐졌지만, 56경기 연속안타의 행진을 벌인 양키즈 조 디마지오에게 수상의 영광을 돌려야 했고, 윌리엄스 자신도 디마지오의 수상이 당연한 것이라는 겸손을 보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각종 상의 결정권을 갖고 있는 기자들과 그다지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못한 것이 MVP수상에 많은 걸림돌로 작용했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외골수인 기자들과의 불편한 관계는 그의 야구인생 전반에 이어졌고, 1942년 타율.356, 홈런36, 137타점으로 리그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했음에도 양키스의 조 고든에게 다시 MVP수상의 영광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해 시즌 중반 해군에 입영신청을 함으로써, 제2차세계대전에 참전. 3년간의 공백을 가지게 된 윌리엄스는 1946년이 되어서야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타율.342와 38홈런, 123타점으로 군복무한 기간 동안 5할이하의 승률을 기록하기도 했던 팀을 월드시리즈에 진출시키켰으며, 정규시즌 팀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애타게 기다려왔던 MVP를 차지하긴 했지만, 시즌 후반기에 당한 팔꿈치 부상으로 자신의 야구인생 중 유일했던 카디널스와의 월드시리즈에서 1타점에 그치며 시즌을 복귀 후 첫 시즌을 아쉽게 마감해야만 했다.
1946년 클리블랜드의 신예감독 루 부드로가 “윌리엄스 쉬프트”를 고안할 정도로 당겨치는 타격을 계속적으로 했음에도 그는슬럼프 없이 매시즌을 완벽히 소화하며 1947년 타율.343, 32홈런, 114타점으로 두 번째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 MVP수상이 유력해 보였지만, 월드시리즈 우승에 기여한 디마지오에게 또다시 MVP를 빼앗기고 말았다.
46년 리그 우승이후 조 메카시와 같은 당시 최고의 명장을 영입하고도 리그 우승권에서 멀어지며 팀은 하향세를 그리기 시작했지만, 윌리엄스의 타격은 팀성적과 달리 지칠줄 몰랐고, 49년 생애 최다인 159타점과 43홈런과 그해 타격왕을 거머쥔 조지 켈에 0.002차이로 뒤지는 타율.343의 성적을 올리며 두 번째 MVP를 차지하게 된다.
1950년 중반 다이빙 캐치를 하다가 왼쪽 팔꿈치를 부상, 7월에 뼛조각 제거수술로 많은 경기에 결장하였지만, 10년 가까이 기록한 +3할타율은 한치의 변화도 없이 계속해서 유지했다. 1952년과 53년 한국전 참전으로 시즌의 대부분을 결장하여 또 다시 공백을 가져야 했던 그는 30대중반의 나이로 다시 복귀, 계속해서 +3할의 타율을 기록하였으며 57년과 58년에는 각각 타율.388, .322로 리그 타격왕에 등극하게 된다.
1959년 나이가 들어가면서 잦은 부상과 더딘 회복으로 2할대의 타율을 처음으로 맛본 그는 41살의 나이가 된 1960년 8월 베이브 루스 이후 처음으로 통산 2,000볼넷을 얻어내었으며, 은퇴발표 후 마지막 경기였던 9월 26일 볼티모어와의 홈경기 마지막 타석에서 홈런을 장식, 통산 521홈런을 기록하고 팬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으며 은퇴했다. 그의 등번호 9번 보스턴의 영구결번.
역사상 최고의 타자라고 해도 손색이 없는 6차례의 타격왕과 12차례의 최고 출루율, 올스타 17회, 최다득점 6회, 통산타율 .344, 통산 장타율 .634(역대 2위)등 공격 전 부문에서 당대 최고의 성적을 기록한 후 헌액자격이 주어진 첫해인 1966년 93.38%의 득표율로 명예의 전당 쿠퍼스 타운 헌액되었다.
그런데 우리들은 그의 두 차례의 전쟁 참전이 스포츠맨 쉽과 애국심의 표본이라는 것을 잘 모른다.
특히 두번째 참전이 그렇다.
전술한대로 1946년 빅리그로 돌아와 두 번의 MVP를 받는 등 최전성기를 보내던 그는 1952년 5월, 배트를 또 놓았다. 이미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예비군임에도 바로 6·25전쟁, 한국전에 참여하기 위해 입대를 신청한 것이다. 안 가도 되는 길을 간 것이다. 다른 젊은이들에게 모범을 보이려고…
전장으로 떠나는 그를 위해 보스턴 레드삭스는 송별 행사를 열었다. 6·25전쟁에서 다쳐 휠체어를 탄 병사가 참전 용사들이 마련한 선물을 하나씩 건네자 윌리엄스는 목이 메었다고 한다. 그는 그날 1952시즌 유일한 홈런을 때렸고, 팬들은 그의 마지막 홈런일지도 모른다며 눈물을 훔쳤다.
한국으로 건너간 윌리엄스는 포항에 주둔한 미 해병대 제311해병전투비행대대에 배치됐다. F9F 팬서 전투기를 몰고 39회 출격해 사선을 넘나들었다. 1953년 2월엔 평양을 폭격하던 중 적 대공포에 맞아 온통 구멍이 난 전투기를 수원 공군 기지에 겨우 동체착륙시켰다. 이같은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폐렴을 얻고 달팽이관을 다친 그는 전쟁 말기에 결국 비행 부적합 판정을 받고 전역했다.
그해 8월 그라운드로 돌아온 윌리엄스는 7년을 더 뛰었다. 전문가들은 두 번째의 참전 공백이 없었다면 그가 역대 최다 타점의 주인공이 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그는 “많은 이가 내가 6·25전쟁에 뛰어든 것에 대해 안타깝다고 얘기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깨닫고 있다. 난 죽을 때까지 아시아의 동맹국을 지킨 자랑스러운 미 해병대원”이라고 말했다.
윌리엄스는 1969년부터는 워싱턴 세너터스 감독을 맡으며 선수 시절 이루지 못한 월드시리즈 우승의 한을 풀어보려고 했지만, 5할의 승률을 기록하지도 못한 채 씁쓸히 그라운드를 떠났다.
토니 그윈이 1999년 올스타전에서 윌리엄스와 함께 시구한 것을 자신의 야구인생 중 가장 멋진 장면으로 뽑을 만큼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인정 받아온 그는 2002년 7월 5일 몇 년 전부터 앓아 온 심장질환으로 별세했다.
대한민국 국가보훈부는 올해 7월의 ‘6·25 영웅’으로 그 테드 윌리엄스를 선정했다. 한국에 관심이 많았고 한국의 발전을 누구보다 응원했던 그라운드의 영웅, 그리고 한반도 상공의 영웅 , 그의 이를은 야구팬을 떠나 한국인이라면 기억해야 할 것이다. (7/5 동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