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초의 신문 조선의 조보 민간 필사본
1904년 7월 18일에 창간한 대한매일신보의 발행인은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인이 아닌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이라는 영국인이었다. 그때 통감부 시절 일본의 압제에 시달리는 조선의 비참한 현실을 알리고 싶어도 조선인이 발행한 신문은 죄다 검열받아야 했다. 외국인이 발행하는 신문은 검열받지 않아도 됐기 때문에 그가 앞장서 창간한 것.
그가 발행한 대한매일신보는 외국에 사는 외국인들 입장에서 보자면 연일 파급력 있는 톱뉴스를 보도했다. 을사늑약의 무효를 주장하는 사설을 게재하고, 황무지 개간권의 부당함을 고발했고, 국채보상운동을 보도해 범국민 운동을 이끌었다.
이것이 일제의 눈에는 고까워 보일 리 없었기 때문에 영국과 가까웠던 일본은 지속적으로 베델의 행동을 멈춰달라고 영국 정부에 요청했다. 물론 영국 정부도 일본과 관계를 악화시켜 봐야 좋을 것이 없다는 판단하에 그를 재판에 회부했고 결국 상해까지 추방하는 데는 성공했다.
물론 3주 뒤 더 강한 반일 감정으로 꼭꼭 채워 다시 돌아오기는 했지만, 복귀 1년도 지나지 않아 심장병으로 사망해 서울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안장됐다. 그는 한국의 독립과 언론 자유를 위해 싸운 공적을 인정받아 1968년 대한민국 정부는 그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 했다. 그의 대한매일신보가 독립에 큰 힘이 됐다는 얘기다.
이처럼 신문이 가진 힘은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우리 역사나 세계 역사를 돌아봐도 기사 하나가 역사적 변화를 가져온 사례는 많다.
인류 역사상 최초의 신문은 1609년 독일에서 발행된 라이프치거 자이퉁으로 알려져 있다. 연산군과 더불어 조선시대 폭군으로 기억되는 광해군이 갓 즉위했을 때, 저 멀리 독일에서는 벌써 신문이라는 것을 발행했던 것이다. 그런데 독일의 라이프치거 자이퉁이 세계 최초라고 인정받는 것은 그 실물이 남아있기 때문.
역사란 증거가 없으면 아무것도 증명할 수 없기 때문에 실물이 남아있는 것이 상당히 중요한데 원래 기록상으로 보자면 한국이 독일보다 최소 30년 이상 앞서서 일간지를 발간했다. 그런데 그간 기록으로만 존재할 뿐 실물이 발견되지 않았는데 몇년 전 전 실물이 드디어 등장했다.
경북 영천으로 떠나본다. 조선시대에 군으로 끝나는 왕이 두 명 있는데, 한 명이 광해군, 다른 한 명은 연산군. 그중 광해군은 원래 왕이 될 수 없는 위치였다. 왜냐하면 아버지 선조의 둘째 부인, 즉 첩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릴 적부터 머리가 비상하고 영민했던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임진왜란 덕분에 세자가 됐다. 임금이었던 선조는 전쟁이 발발하자 급히 몸을 피신했고 이를 알게 된 백성들이 경복궁에 불을 지르자, 이를 수습하라며 그를 급히 세자로 책봉했다. 자신 대신 총알받이로 내보낸 것이다.
다행히 광해군은 영민한 덕분에 전쟁을 진두지휘하고 민심을 수습해 임진왜란의 영웅이 됐는데 이를 시기한 선조가 광해군을 시기하면서 그의 세자 자리는 위태로워졌다. 결과적으로 선조가 죽음으로써 광해군이 왕의 자리에 오르기는 했지만 일부 역사학자들은 선조에게 속좁은 임금이라는 평가를 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렇게 속 좁은 선조가 불같이 격노한 적이 있다. 1577년 11월 28일 자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다. 1577년 11월 28일 자 선조실록에는 ‘내가 우연히 조보를 보건대… 이를 인출한 이들을 끝까지 추문하여 죄를 다스려야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조보라는 것을 만들어 팔았던 이들에게 유배까지 내린 것일까?
아주 짧은 기간이지만 조선시대에는 지금처럼 민간에서 신문을 만들어 팔았었다. 원래 조선시대 중앙정부기구로 왕명을 전달하는 역할을 맡았던 승정원이 주요 소식들을 필사해 중앙기관들에 배포했었는데 이를 조보라고 한다.
이 신문에는 전날 있었던 일 중 기록할 만한 일들, 가령 정부의 인사이동, 주요한 정책의 시행, 과거 시행과 관련된 사항 및 합격자 명단, 임금에게 올라온 상소문, 상소문에 대한 답변 등이 실렸고 이상 자연현상 등도 함께 기록했다. 그러니까 조보는 지금으로 보자면 조간신문 또는 관보였던 것.
승정원이 조보를 만들면 관청을 포함해 퇴임한 고위 관직자, 지방 절도사 등에게까지 전달됐는데 한양의 경우는 당일에 받아볼 수 있었지만, 조선시대에 교통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5일 치 조보를 묶어서 받아봐야 했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자신들이 고위간직자나 중앙관청 수장이 아니라면 이 조보를 받아볼 수가 없었는데 문제는 이 조보에 과거시험과 관련된 내용 등이 실렸다는 점이다.
그래서 양반들도 구독료를 지불하더라도 기꺼이 조보를 받아보고 싶어 했는데 이러한 필요에 의해 조보를 필사한 민간 신문이 만들어졌다. 조보를 받아다가 민간에서 활자로 새겨 팔았던 이들을 기인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고작 3개월밖에 존재하지 못했다. 선조가 이를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1577년 11월 28일 선조는 비망기를 내린다. 비망기란 주요 업무지시나 명령을 내릴 때 특별히 국왕의 심기를 그대로 담아 내리는 문서다. 요즘 말로 조금 바꿔보자면 ‘과인이 우연히 조보를 보았다. 경악스럽다. 누가 조보를 인쇄하라고 했느냐. 어째서 임금에게 보고도 하지 않고 멋대로 만들었느냐. 이것은 사사로이 사국을 만든 것과 다름없다. 만약 국가기밀이 다른 나라에 흘러 들어간다면 어찌 되겠는가?’라며 불같이 화를 냈다.
결국 진상 파악이 시작됐고 이듬해 1월 15일 조보를 인쇄하고 구독료를 받고 판매한 기인 30여 명은 유배됐고, 활자는 전부 몰수됐습니다. 그런데 당시 이를 보고 통렬하게 꾸짖은 이가 있었는데 율곡 이이입니다. 그는 민간 조보의 인쇄는 의정부와 사헌부가 허락했는데 왜 책임자들은 책임지지 않고 애꿎은 백성들만 형벌을 받느냐며 의정부와 사헌부 관리들에게 겁도 많고 의리도 지키지 않는 자들이라고 비꼬았다.
어쨌든 이러한 기록으로 볼 때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1577년 8월에, 세계 최대 일간지라는 독일의 라이프치거 자이퉁보다 30년 앞서 먼저 등장했다. 하지만 조보, 정확히는 민간 조보가 세계 최초로 인정받지 못한 것은 그 실물 증거가 없었기 때문이다.
조보를 필사한 필사조보는 여럿 남았지만, 민간에서 약 3개월간 발행된 민간인쇄조보가 없었는데 이 실물이 드디어 등장했다. 경북 영천에서 였다. 지난 2017년 1월 경북 영천 용화사의 주지 ‘지봉 스님’은 평소 고문서에 관심이 많아 이날도 고서적 경매 사이트를 살펴보고 있었다. ( 위 사진)
이날 사이트에는 송나라 때 성리학설을 집대성한 ‘성리대전’이라는 책이 올라왔는데 스님은 정작 책 보다 그 책을 싸고 있는 표지가 눈에 띄었다. 이미 낡을 대로 낡아서 떨어져 나가 다른 종이를 붙여 새 표지를 만들었는데 이 종이에 쓰인 글이 심상치 않았다. 출품자가 붙인 설명을 보니 조보라고 적혀 있었던 것이다.
이 성리대전은 4차례나 유찰된 끝에 지봉 스님이 낙찰받았는데 그 4개월간 지봉 스님은 조보를 연구했다. 그 책 표지로 사용한 조보에는 ‘공의전’이라는 글귀가 있었는데 공의전은 인종의 부인 ‘인성왕후’를 가리킨다. 그리고 인종의 태실이 경북 영천에 있었기 때문에 이 또한 익숙했다.
그리고 즉각 경남대 김영주 교수에게 조보를 보내 연구를 의뢰했는데 그 결과가 충격적 이었다. 남아있던 조보는 총 8장이었는데 그중 발행일자를 수 있는 문건은 총 5장으로 선조 10년 11월 6일, 15일, 19일, 23일, 24일이었다. 그런데 이 날짜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선조가 민간에서 조보를 인쇄했다며 불같이 화를 낸 11월 28일 직전이다.
6일 자에는 인성 왕후의 안부를 묻는 내용과 경연이 열리지 않았다는 소식, 15일 자에는 구제역으로 소 600마리가 전염병에 걸려 죽었다는 내용이 실려 있었고 23일 자에는 날씨와 별자리를 기록한 내용이, 24일 자에는 형조정랑 이정형 등 신하들의 인사이동 내용이 적혀 있었다.
지봉 스님은 조보 발행은 당시 조정에서는 매우 큰 사건이었고, 조보를 발행한 사람들은 하루아침에 사라졌고, 조보를 입수한 사람들도 이를 폐기하거나 숨겨야 했다고 설명하듯 당시 선조의 분노가 얼마나 강했는지 알 수 있다. 이 문서가 발견되면서 1577년 조선에서 구독료를 내고 보는 세계 최초의 신문이 등장했다고는 하지만 기록을 더 살펴보면 더 오래된 조보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1508년 3월 14일 중종실록에 조보가 처음 등장하지만 1515년 중종이 ‘조보는 예로부터 있는 것이다’라고 언급한 것으로 미뤄 볼 때 조보의 기원은 훨씬 이전으로 추정할 수 있다. 조보의 다른 말은 기별인데 ‘간에 기별도 가지 않는다’라는 속담이 아직까지 남아 있기도 하다. 시간이 흐르고 다양한 미디어가 등장하면서 신문에 대한 가치 역시 변화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아마 어쩌면 영원히 신문을 읽는 사람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과거 고위 관직이 아닌 일반 백성들이 국가의 대소사를 알고 싶어 했던 것은 단순히 흥미로운 정보를 즐기고자 한 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한 나라의 백성으로 국가가 어디로 가는지 알고 싶고 또 참여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이런 이들이 있어 지금의 한국이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유튜브 디시멘터리 6월12일자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