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한국에서 태어났으니 한국 사람 입니다. 내 조국에서 전쟁이 났는데 어떻게 마음 편하
게 공부만 하고 있겠습니까? ” ~ 하바드 재학중이던 ‘윌리엄 해밀턴 쇼’
<지난달 한국 국가보훈처와 한미연합군사령부는 한미동맹 70주년을 맞아 6·25전쟁과 한미 동맹 10대 영웅을 선정했고, 한국의 대표기업 삼성과 LG는 뉴욕 타임스퀘어 전광판을 통해 이들의 헌정 영상을 연속적으로 내보내 뉴요커들의 마음을 흔들었다.
10대 영웅은 맥아더 장군, 벤 플리 트 대장 , 김영옥 미 육군대령, 백선엽 육군대장 등 한미 양국의 알만한 사람들이었지만 그 가운데 윌리엄 쇼 부자가 있었다. 우리에게는 생소한 인물이었다. ‘더구나 부자가 함께?’ 그들은 누구인가. 또 어떤 공훈을 세웠는가 . 메모리얼 데이를 맞아 윌리엄 쇼 부자를 기리면서 숭고한 저들의 스토리를 알아본다. (편집자 주) >
평양사투리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키가 크고 잘 생긴 미국 청년
평양 사투리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청년 윌리엄 해밀턴 쇼, 그때 그는 28세, 두 아이의 아버지요 가장이었다. 장래 한국에서 선교사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하버드에서 동아시아학을 공부하고 있던 그는 한국전쟁 소식 을 듣고 부모님에게 편지를 쓴다.
“아버지, 어머니! 지금 한국인들은 전쟁 중에 자유를 지키려고 분투하고 있는데 만약 제가 이 를 도우러 흔쾌히 가지 않고 전쟁 후 평화시에 선교사로 돌아가려 한다면, 그것은 제 양심상 도 저히 허락되지 않는 일입니다”
그는 1922년 6월 5일 평양에서 태어났다. 아 버지 윌리엄 얼 쇼가 선교 목적으로 평양에 부임 한 그 다음해가 된다. 평양 외국인 학교를 마친 윌리엄은 평양사투리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키가 크고 잘 생긴 청년으로 주위의 이웃들과 스스럼없이 지냈다.
태어난 한국을 입버릇처럼 조국이라 고 불렀고 고향의 친구들과 조선, 대한민국의 앞 날을 늘 걱정했다. 한국의 화랑전신에 매료 됐던 그는 세계 제 2차 대전과 한국전쟁을 겪으며 두 영웅을 만나게 된다. 아이젠하워와 멕아더 장군이다.
청소년 시절을 평양에서 보낸 뒤 대학 진학은 본국 미국으로 했는데 아버지와 동창이 되어 오하이오주 훼슬리언 대학을 졸업한 후 1943년 미 해군 장교로 유럽전선에 참여했는데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는 PT-518 함정의 부 정장으로 또 아이젠하워 총 사령관의 참모로 성공리에 임무를 완수 했다.
1947년 전역과 동시 한국으로 돌아와 미 군정청(美軍政廳) 소속으 로 진해 조선 해양경비대 사관학교(해군사관학교 전신) 교관을 하면서 생도들에게 함정운용술을 가 르치고 한국 해군(해병대) 창설에 기여했고 다시 하바드로 진학해 공부를 하고 있었다. 50년 6월 전쟁발발 소식은 그를 학교에 남아있지 않게 했고 다시 입대해 전장으로 돌아왔다.
그의 능통한 한국말과 해박한 지역정보는 첩보전을 방불케 한 인천상륙작전에 크게 기여했다. 김동석 대령, 홍시욱 해군하사(2020년 1월16일 국가보훈처에 의해 인턴상륙작전 영웅으로추대 됨)등 한국군 정보부대 요원과 북한군의 위치 동향을 면밀히 파악했고 이를 기반으로 맥아더 사령부는 1950년 9월 15일 0시 역사적 인천상륙작전을 개시 할 수 있었다.
쇼 대위는 다시 상륙작전 시 선두 공격조였던미 해병 1사단 제 5연대로 소속을 바꿔 수색조로 서울 탈환작전의 선봉에 나서게 된다. 수도 서울을 재탈환하기 전까지는 상륙작전의 성공을 말할 수 없었다.
북한군은 허리가 잘린 상태에서 민족보위상인 최용건을 서울 방위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약 2만의 병력을 투입하여 필사적인 저항을 시도했다.
9월22일 녹번리 전투와 쇼 대위의 산화
서울 수복의 결정적 계기가 된 전투가 연희동 104고지 전투와 녹번리 전투다. 인천 시가지 점령에 이어 김포반도, 신촌 노고산까지 한강을 건너 중앙청을 향한 진군은 계속됐다. 연희동 104고지 전투는 아군에게는 서울 탈환의 적에게는 서울 사수의 마지막 교두보였다.
서울 서방에 포진한 북한군 제25여단 및 독립 78연대는 약 4,000명 규모였으며 이에 맞서 한국 해병대와 연합군은 한국 해병대 제1대대를 중 앙, 미 해병대 제5연대 1대대를 좌, 제3대대를 우로 하여 동시 공격을 감행했다. 한국 해병대 제1 대대는 제3중대를 주공으로 치열한 백병전 끝에 104고지를 완전 점령했다.
이 과정에서 9월 21일, 쇼 대위는 3대대 1소대장 윌리엄슨 대위의 판초에서 밤을 새우고 22 일 아침 미 해병 7연대의 진격을 위한 북한군의 후방 정찰을 위해 녹번리 쪽으로 향했다. 수색조의 선두에 나선 쇼 대위는 기관총으로 무장한 북한군 매복조에 노출되었고 적의 총탄은 쇼 대위의 아까운 생명을 앗아 갔다.
한국전쟁에 참여한 지 2개월 남짓한 1950년 9월 22일, 만 28세 110일 째 되는 날이었다. 그의 장렬한 희생은 새로운 기폭제가 되어 6일 후 한미연합군은 수도 서울을 탈환하고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할 수 있었다.
쇼 대위는 서울 마포구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 안장되었고 1956년 우리 정부로부터 금성 을지무공훈장을, 미국 정부로부터는 은성 훈장을 수여 받았다.
쇼 대위는 화랑의 후예였다. 쇼 대위는 인천상륙작전 직후 이상호 해군중령에게 편지를 보낸다.
“나도 한국에서 태어났으니 한국 사람 입니다. 내 조국에서 전쟁이 났는데 어떻게 마음 편하게 공부만 하고 있겠습니까? 화랑의 후에인 저는 내 조국에 평화가 온 다음에 공부를 해도 늦지 않습니다.”
앞서 부모님께 보낸 편지와 같이 그는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을 조국으 로 자신의 헌신을 통해 나라와 국민
을 깨우치는 사명을 타고 난 사람이었다.
쇼 대위는 우리의 신라 시대 화랑 5계를 실천한 화랑이 되어 전장에서는 물러서지 않았으며 (임전무퇴·臨戰無退), 국가에 대한 충성심으로(사군이충·事君以忠) 한국을 위해 숭고한 목숨을 바쳤다. 부모의 뜻을 따라 장차 한국에서 선교사업을 승계하겠다는 의지로 하버드에서 학업을 지속해 부모에 게 효도하는 사친이효(事親以孝)정신을 실천했으며 교우이신(交友以信), 신의로 초석을 쌓은 한국 해군에서 그를 사랑하고 아끼던 제자들이자 친구 들인 해사 제2기생들이 그의 거룩한 희생을 추모하며 전사 기념비 좌대를 헌정했다.
그의 행적은 이렇듯 화랑정신에 부합했고 한국인보다 더 한국적인, 한국사람 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한국의 혼이 깃들어 있어 그를 아는 모든 이들이 이토록 그를 잊지 못하고 있다.
아버지 윌리엄 얼 쇼와 그 가족
아버지 윌리엄 얼 쇼(William Earl Shaw)와 어머니 에드린 해밀턴 쇼(Adeline Hamilton Shaw)는 모두 헌신적인 선교사였다. 얼 쇼는 1921년 평양 광성보통 학교(현 마포 광성고교) 교사로 한국에 첫 발을 디뎠다. 다음해 외아들 쇼 대위를 얻고 목사 안수를 받은 후 선교사업에 몰두하게 된다.
일제 강점기 한국에서의 복음 활동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선교단은 목적을 달성시키기 위해 또 다른 방법인 교육, 의료, 고아사업 등 국민계몽이나 복지사업 등 우회적 방법을 택했고 일부는 항일 민족자주의 정신을 전파시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시점에는 일제에 의해 전원 추방되기도 했다. 얼 쇼도 마친가지였다.
얼 쇼의 한국명은 서위렴(徐偉廉)이다. 성씨 서(徐)는 쇼(Shaw)에서 위렴은 william에서 따와 훌륭하고 그의 청렴한 인품을 표현 했다. 그 또한 1941년 강제 추방되었다가 태평양전쟁 종식 후인 47 년 재입국하였다.
얼 쇼는 연변, 만주 등에서도 복음사역을 하는 교육자였고 1938년 무어( J. Z. Moore)선교사와 함께 평양 요한학교를 설립하고 평양소년단(보이스카웃) 단장으로도 봉사한 바 있었다.
1950년 가을 아들을 잃은 후 얼 쇼는 미군에 재 입대하여 미 육군 군목으로 종군하면서 한국 군 군종제도 창설에 기여했다. 아들 쇼 대위의 전사는 이들 부부에게 큰 상처와 영광을 주었는데 그때 윌리엄을 추모하는 5,925명이 보내준 14,500불의 헌금 으로 쇼 기념교회를 대전에 건립했다.
얼 쇼는 나이 64세인 1954년 목원대의 전신 이자 감리교 농촌 교역자 양성기관인 감리교 대전 신학교 창립이사로 참여하기도 했다. 그는 1967년 10월5일 캘리포니아 스탠포드 병원에서 격동의 77년 인생을 마감했다.
유해는 유언에 따라 부인의 품에 안겨 서울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역에 안장됐다.
그의 부인 아데린 H. 쇼(Adeline Hamilton Shaw)선교사는 1895년 7월 2일 출생해 1919 년 7월 4일 윌리엄 얼 쇼와 결혼, 1남2녀의 어머니로 숭덕여학교 교사로 1960년까지 이 땅의 교육에 헌신했다. 아데린은 1971년 5월 8일 캘 리포니아에서 별세했는데 양화진 남편의 묘 옆에서 아들 쇼 대위와 마주보며 잠들고 있다.
쇼 대위의 부인 후아니타(Juanita Robinson Shaw)는 1956년 두 아들과 한국에 돌아와 서울 외국인 학교 교사로 봉직햇고 , Case Western University 에서 석사학위 취득 후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로 활동하면서 세브란스 병원에 의료봉사과 (Medical-Social)을 신설해 봉사활동을 계속한 후 1968년 고국 미국으로 귀국했다.
아버지를 이어 하버드에서 한국학 박사학 위를 취득한 장남 로빈슨 역시 서울법대 교환 교수와 풀브라이트 장학사업 등으로 한국인 들의 교육에 헌신하였고 며느리 캐럴(Carol Cameron Shaw)은 한국 근대사 연구가로 활
동하며 “The Foreign Destruction of Korean Independence”란 명저를 출간하였다. 둘째 아들 스티브는 미국의 지방 판사로 활약하고 있다.
은평 평화공원과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 간직된 윌리엄 해밀턴 쇼
28년의 짧은 생애를 오로지 대한민국에 바쳐 우리의 가슴에 묻혀있는 쇼 대위. 그의 죽음을 애도한 정일권, 백낙준 등 당시 정계, 교육계, 해군, 종교계의 주요 인사 61명이 기념비 설립위원 회를 결성했고 1956년 녹번동 쇼 대위가 산화한 현장에 전사 기념비를 건립했다. 휴전협정 체결 3년, 혼란한 시기에 억척스레 이루어진 일이라는 점에서 아는 사람들 사이에 그가 남긴 울림이 얼마나 컸었는지 짐작이 간다.
기념비는 도시가 확대됨에 따라 2010년 6월 22일 지금의 은평 평화공원으로 이전되었고 쇼대위의 전신동상과 함께 대한민국의 평화를 기리 는 윌리엄 해밀턴 쇼 추모공원으로 변모 했는데 6호선 역촌역 4번 출구와 연결되어 추모객들 이 발걸음이 용이하다. 쇼 대위와 그의 부모가 안장된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역은 같은 6호선 합정역 구간으로 전철로 15분 거리에 있다.
1890년 7월 28일 제중원 의료 선교사 헤론의 안장으로 시작된 양화진 묘역에는 대한민국 근대화의 과정과 그들의 고난과 노고의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있다.
언더우드 박사의 4대에 걸친 7명의 가족이 잠들어 있는 이 곳에는 15개 국의 417명이 안장되어 있으며 이 중 선교사와 가족은 6개국 145명으로 윌리엄 쇼의 가족은 F-20/21에 모셔져 있다.
한미동맹 70주년 선정, 한국전쟁 10대 영웅
올해 초 국가보훈처와 한미연합군사령부는 한미동맹 70주년을 맞아 6·25전쟁과 한미 동맹 10대 영웅을 선정했고, 삼성과 LG는 뉴욕의 타임스 스퀘어 전광판을 통해 이들의 헌정 영상을 하루 680회 내보냈다.
10대 영웅은 맥아더 유엔군총사령관, 벤 플리 트대장 부자(父子), 윌리엄 쇼 부자, 딘 헤스 공군대령, 랄프 퍼켓 주니어 육군대령, 김영옥 미 육 군대령, 백선엽 육군대장, 김두만 공군대장, 김동석 육군대령, 박정모 해병 대령이다.
특히 윌리엄 얼 쇼 선교사의 헌신적 선교사업과 아들 윌리엄 해밀턴 쇼 중위의 살신성인의 숭고한 희생이 선정되었다는 점에 기꺼이 박수를 보내게 된다.
대한 민국을 절대 절명의 위기에서 구하고 선진국 반열에 올려놓은 이들 영웅들의 행적을 가슴깊이 새기며 다시 한번 제복 영웅들의 명복을 빈다.
(한미 우호협회 회지 ‘영원한 친구들’ 23년 5월호 최 상진 편집위원 기사 다수 참조)
<한국전쟁 당시 서울 탈환작전 중 녹번리 전투에서 전사한 고 월리엄 해밀턴 쇼 대위의 둘째 아들인 스티븐 로빈슨 쇼(미국 오하이오주 법원 부장판사)와 부인 버지니아 쇼 씨가 지난 2018년 5월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발자취를 찾아 목원대를 방문했다. 사진 우측이 스티븐 로빈슨 쇼 부부. 이들은 5월 26일 서울에 도착해 할아버지와 할머니, 아버지가 묻힌 양화진 외국인 묘역을 참배했고, 아버지의 동상과 전사기념비가 있는 서울 은평구 평화공원, 자신이 다녔던 서울외국인학교, 진해 해군사관학교 등을 찾아 아버지와 지신의 어린 시절 발자취를 둘러봤다.>
이제 곧 6·25전쟁이 일어난 지 73년 되는 날이 돌아온다. 3년이나 강토를 피로 물들인 그 전쟁에서 대한민국을 지켜낸 것은 제복 영웅들이었다. 특히 파란눈 금발의 미국인 제복 영웅들, 이들이 아니었다면 오늘날 우리 고국 대한민국과 이곳 미국에서 우리 동포들이 누리는 자유와 민주주의는 없었을 것니다. 또한 전쟁의 폐허를 딛고 산업화와 민주화를 달성해 세계 10위권의 번영을 누리는 대한민국의 신화도 없었을 것이다.
(안지영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