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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일 컬럼> 법정에 선 전직 대통령의 데자뷔와 자메뷔

 

 (본보 대표기자) 

 

미국의 전직 대통령 중에서 최초로 형사기소된 트럼프 전 대통령은 4일 오후 뉴욕 맨해턴 형사법원에서 평소와 달리 입을 굳게 닫은 모습이었다고 현장을 취재한 언론들이 전하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이날 트럼프 전 대통령이 기소인부절차에 출석해 검찰 기소에 대해 혐의를 부인하며 무죄를 주장한 것 이외에는 침묵을 지켰다고 보도했다.

이날 재판정 안의 모습을 생중계하는 것은 불허됐으나 사진 촬영은 허용돼, 시민들은 사진을 통해 기소인부   절차가 진행중인 동안 트럼프 전 대통령의 표정이나 법정내 상황 등을 가늠할 수 있었다.
우리에게는 데자뷔와 자메뷔를 동시에 느끼게 하는 광경이 아닐 수 없다.
데자뷔 (기시감 旣視感)는 처음 보는 대상이나, 처음 겪는 일을 마치 이전에 보았다는 느낌을 받는 이상한 느낌이나 환상을 말한다. 이에 반해 자메뷔 (미시감 未視感)는 분명히 보았거나 경험한 일임에도 전혀 새로운 생소한 느낌을 갖는 경우를 말한다.

전직 대통령의 법정 출두, 우리에게는 매우 낯익은 광경이다.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을 필두로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전 대통령의 예에서 우리는 이번에 ‘서초동 데자뷔’를 보고 있으면서 다음 재판이 올 연말이나 돼서야 열리게 된다는 보도를 접하면서 미국식 자메뷔를 느끼게 된다.

미국 내에서도 찬반 양론이 거세게 갈리고 있다. 반대자들은 이번 기소가 민주당 소속 검사에 의해 이뤄진 정치적 사건이며 이는 오히려 트럼프 지지자들의 결집을 초래해 그의 공화당 대통령 후보 지명을 도울뿐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반대자들은 검찰의 기소는 오로지 증거에 의해서만 이뤄져야 하며 이것이 정치적으로 어떤 파장을 미칠 지는 검찰이 신경쓸 사항이 아니고 전직 대통령이라는 이유로 죄를 묻지 않는 것은 ‘누구도 법 위에 없다’는 만민 평등 원칙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맞서고 있다.

미 주요 언론들은 전직 대통령에 대한 검찰 기소가 지난 수십년간 반복돼온 한국을 예로 들면서 트럼프 기소가 일회성 사건에 그치지 않고 되풀이될지 모른다는 분석 기사를 잇달아 내는 중이다. 썩 자랑스러운 일은 아니다.
미국은 전·현직 대통령이 기소된 전례가 없고, 문제가 불거지면 정치적 협상을 통해 해법을 찾는 방식을 취해 왔다. 하지만 트럼프가 법정에 서면서 이 같은 ‘합의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한국과 비슷한 ‘정치의 사법화’가 전개될지 모른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일부에선 전직 대통령에게 일종의 면책 특권을 줬던 미 정치권의 관행을 바꿀 때가 됐다는 여론도 만만치 않기는 하다.

뉴욕타임스는 “트럼프가 한국의 박근혜, 이탈리아 실비오 베를루스코니의 반열에 올랐다”며 “트럼프 기소로 200년 넘게 전 대통령 기소를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켜온 미국 민주주의가 시험에 빠질 수 있게 됐다”고 전했다. NYT는 애초부터 적나라한 반(反)트럼프 입장에 서 있는 언론이지만 트럼프 기소에 대해서는 유보적인 논조로 보도를 하고 있다.

워싱턴포스트와 CNN, 타임지 등 또한 전직 대통령이 기소돼 사법 처리를 받은 해외 주요 사례로 ‘단연’ 한국을 꼽고 있다. WP는 “한국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전직 대통령들이 예외 없이 정치적 논란에서 촉발된 수사로 인해 수감되거나 기소 요구에 맞닥뜨리는 정파 간 보복 주고받기의 양상을 띠고 있는 대표적인 나라”라고 했다. 전직  대통령에 대한 기소를 정치적 보복으로 단정하고 있다는 얘기다.

당연히 미 정치권도 극 과 극의 반응을 보이고 있다. 공화당은 “후진국적 현상”이라며 크게 반발했고, 트럼프는 자신의 소셜미디어 ‘트루스 소셜’에 대문자로 “미국은 이제 제3세계 국가가 됐다”고 썼다. 전직 대통령 기소가 ‘정치 선진국’ 미국이 아닌, 부패와 내전이 만성화된 아시아·아프리카·중남미 개발도상국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라는 뜻이다.

민주당 측은 대체로 “트럼프의 탈법 행위에 면책 특권이 주어져선 안 된다”는 입장이지만 이번 기소가 정치 보복 악순환의 신호탄 아니냐는 우려 또한 팽배해 있다. NYT는 “민주당 소속 검사장이 이끄는 맨해튼 지검이 트럼프를 기소했듯, 남부 주(州) 검찰이 공화당과 손잡고 ‘조 바이든 대통령이 중남미 국경 단속을 제대로 못 해 불법 이민자 폭증을 초래했다’는 식의 기소를 시도할 가능성이 충분해졌다”고 했다.

하버드대의 한 저명 역사학 교수는 “전직 대통령 기소는 첫 한두번은 법치주의일 수 있지만, 반복되면 더 이상 법치가 아니게 된다”고 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트럼프 기소가 민주당에 대한 역풍이 되지 않도록 말을 아끼고 있다. 바이든은 트럼프 기소에 대한 취재진의 질문에 “할 말 없다”로 일관했다.
트럼프 기소는 이번 한 번으로 끝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조지아에서는 트럼프가 2020년 대선 결과를 뒤집으려 했다는 혐의에 대한 수사가 마무리 단계에 들어갔고 기밀 서류 무단 반출 사건과 2021년 1월 6일 폭도 의사당 난입 선동 사건, 트럼프사 조직 장부 조작을 통한 부정 대출도 현재 수사중이다.

워싱턴포스트(WP)는 이번 기소의 경우 트럼프 전 대통령이 유죄 판결을 받으면 혐의마다 최장 4년의 징역이 선고될 수 있다면서 34개 혐의에서 모두 유죄가 인정된다면 최장 136년형이 내려질 수 있다고 썼다. 다만 이 신문은 트럼프 전 대통령이 초범이고 2024년 미 대선 출마 선언을 한 상황이란 점을 고려할 때 유죄가 인정되더라도 실형이 선고될지는 미지수라고 덧붙였다. 이번 기소의 혐의들이 파괴력 있는 새로운 혐의가 아니라는 것도 그같은 전망에 힘을 싣는다.

트럼프는 이날 재판 후 플로리다로 날아가서 지지자들 앞에서 “미국”을 외쳤고 지지자들은 환호했다. 그는 “내가 저지른 유일한 범죄는 우리나라를 파괴하려는 사람들로부터 두려워하지 않고 방어한 것“이라며 다시  혐의를 부인했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여태 본 적이 없는 규모의 엄청난 선거 개입”이라고 주장했다. 또  바이든 대통령을 언급하며 “우리나라는 지옥으로 가고 있다”고 주장했고, 트럼피 청중들은 다시 박수로 화답했다.

트럼프 기소를 주도한 앨빈 브래그 맨해튼 지검장은 집중 공격의 타깃이 되고 있다. 살해 협박 편지와 백색가루 봉투가 배달됐다고도 한다.  그가 진보 진영의 큰 손 후원자인 조지 소로스로부터 검은돈을 받았다는 식의 음모론도 난무한다. 그는 뉴욕 시민들에 의해 선거로 선출된 민주당 정치인이다. 하바드 출신인 그는 최초의 흑인 맨해턴 지검 검사장이란 타이틀을 지니고 있다.

전직 대통령에 대한 형사 처벌을 자제해온 미국의 금기는 깨졌다. 이날 재판을 주도한 맨해턴 형사법원의 머천 판사는 오는 12월4일 법원에서 다시 검찰과 변호팀의 의견을 듣겠다고 밝혔다. 실제 재판은 내년 이후로 잡힐 것으로 보인다. 속전속결, 끓는 냄비와 같았던 우리의 경우와는 다른 길고 지리한 공방이 이제 시작된 셈이다. 이는 전직 대통령 기소의 자메뷔다.

아무튼 이번에 떠오른 ‘서초동 데자뷔’는 결코 즐겁고 자랑스러운 일이 아니다.  (동일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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