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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탐방

[인터뷰] 순대처럼 구불구불 구곡양장 돌아 온 그녀, 마영애. <2>

<사진> 2020년 10월 , 마영애 대표는 뉴저지 주의회가 수여하는 사회공로상을 수상했다. 고든 존슨 주하원의원의 랄프 슈머 보좌관으로부터 상장을 전달 받고 있다.

“이제는 탈북민 인권문제에서 더 나아가 미 전역의 소외 된 학생들 위한 장학사업 펼치고 싶어”

지금도 귀에 쟁쟁한 철책선 대북방송 인민군 하전사 여러분…’

“지역사회와 미국 국민을 위해 봉사해 주신 귀하의 지속적인 헌신에 감사드린다.

귀하께서는 미국과 미국 국민을 위한 더 강한 미래를 위해 계속 봉사하고 헌신해 줄 것으로 믿는다.”

마영애 씨가 지난 2018년 12월 도날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평생 공로상’과 상패에 담겨 있는 내용이다.

그녀의 활동이 강한 미국을 만들고 있다는 내용이 유난히 눈에 뜨인다.

마영애씨는 2004년 우여 곡정끝에 도미 한 이래, 탈북 난민인권협회 미주대표, 미주탈북자선교회 대표 등을 역임하며 북한 주민들의 인권과 자유, 탈북자들을 위해 봉사하며 투쟁해 오고 있다.

그리고 뉴욕과 뉴저지 등지에서 소문난 ‘마영애 순대’ 체인사업을 운영하며 탈북 난민들을 돕고 있다

인민군 예술단으로 9년여 복무한 그녀는 지금도 북한에서의 군 생활을 자신 인생의 변곡점 터닝 포인트였다고 말한다. 마영애씨와 기자의 인연은 묘하다.

1990년대 중반 기자는 전방 철책 사단의 대북 방송 요원으로 군 생활을 했는데 그 시기 마영애 씨도 북쪽 철책 사단에 한시적으로 시찰을 나와 있었다고 한다.

그녀는 “전연 지대에서 근무하는 인민군 하전사 여러분, 안녕하세요? 이 밤, 추위 속에서 전연 지대 경계근무를 서느라 오빠들은 얼마나 고생이 많으실까요. 잠깐이지만 옥희(기자의 당시 가명)의 목소리와 함께 하며 고생과 시름 잊으시길 바래요.” 로 시작되는 내 방송을 분명히 들었다고 우긴다.

그러면서 자신의 후일 탈북에 내 책임도 일정 부분 분명히 있다고 주장한다.

“그때 얼마나 추웠는지 아십니까? 나중에 탈북해서 안보 강사 노릇할 때 철책에 자주 갈 기회가 있었죠. 남쪽에 서서 내가 있던 곳을 바라보니 기분이 참 묘합디다. 하늘과 땅 차이였습니다. 그 추운 겨울에도 북한쪽 초소에는 난방이 없습니다. 솔방울 몇개 태우는게 고작입니다. 그럴때 꾀꼬리 같은 남쪽 여군 아나운서들의 목소리는 따뜻한 바람이었습니다. 안듣는다 듣지말라 해도 다 듣습니다. 그런데 그마저도 남쪽에선 어느 순간 다 없애더군요, 그 당시 국군 심리전단에 방문해 전방 철책 사단의 대북방송용 확성기 철거에 대해 강력히 항의하기도 했었습니다. ”

그녀와의 인터뷰 1편에서 언급했듯 그녀는 탈북민들 중에서도 몇 안되는 평양 출신이다. 그러나 그녀가 처음부터 평양에 거주했던 것은 아니다.

어머니가 남한 출신이었기 때문에 눈에 띄는 영특함에도 불구하고 출신성분이 안 좋아 대학에 못 갔단다. 군대 가기 전까지 경남도 단천에서 거주했고 단천중학교(한국의 고등학교)가 북한에서의 최종학력이란다.

인민군 입대는 그녀에게 인생의 변곡점이 됐다고 마영애 씨는 말한다.

평양이 고향인 그녀의 아버지 마상렬 씨는 평양에서 의학공부를 한 한의사였다. 아버지는 북한과 중국을 오가며 자주 의술활동을 펼쳤는데 해방 전에는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의 초청으로 중국에 가서 김형직과 측근에게 의술을 가르쳤을 정도였단다. 해방 후에도 북한 정권에서 인정받던 아버지는 그녀의 어머니와 함께 중국 출장이 잦았다. 그녀는 부모님의 출장 길인 1960년대 중반 중국 흑룡강성에서 태어났다.

“내가 화교라는 말도 돌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화교라면 어떻게 북한군에 입대 할 수 있었겠습니까? 화교는 북한군에 입대 할 자격이 없습네다”

그녀는 군대 생활이 자신의 인생의 변곡점이 됫다고 거듭 말하면서 평양에서 뉴욕까지의 파란만장한 여정이야 말로 군에서 다져진 정신력과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것이었다고 강조했다.

“내가 말입니다, 출신 성분이 걸림돌이 되긴 했어도 젊었을 때는 꽤 예쁘다고 소문났던 사람입네다(웃음).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된 인민군 입대

거기다가 단천에서 소학교 다니던 시절 국악기 양금(洋琴)과 서양악기 아코디언(Accordion)교육을 받았죠. 그러니 군 입대해서도 예술분야로 풀려 평양에 주둔한 <조선인민군 531군부대 선전대>에서 군대생활을 했습니다. 그때 바로 꿈에 그리던 평양에서의 삶이 시작된거죠.

이곳에서 군인들을 위문하러 다니며 수많은 공연을 했습니다. 수 많은 탈북 예술인들 중 김일성, 김정일 앞에서 공연한 사람은 나 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저는 8년 6개월 동안 군 생활을 하다 상사로 제대했죠”

실제로 그녀의 군복무 시절 사진을 보니 ‘남남북녀’ 라는 말은 언제나 정답이었다.

“군 생활을 할 때 나를 목숨 걸고 쫒아 다니던 장교(중위)가 한 명 있었어요.

단천에서 소학교 다니던 시절 악기 연주에 재능을 보이던 그녀는 양금과 아코디언 교육을 받았다. 훗날 평양에 주둔한 <조선인민군 531군부대 선전대>에서 군대생활을 하며 그녀는 김일성 부자 앞에서 공연한 경험이 있는 유일한 군 출신 탈북민으로 알려져있다.

‘최광철.’  인물도 훤출하고 출신성분도 좋았죠. 그 사람의 끈질긴 구애 끝에 1988년, 어렵사리 결혼에 골인을 했죠. 그 덕분에 제대 후에도 저는 계속 평양에 살 수 있었고요. 지금 우리 가게에 나와 일하고 있는 아들 (최)효성이가 첫 번째 결혼으로 얻은 내 유일한 자식입니다.”

‘아들’이라는 말만 나오면 그녀의 눈가는 촉촉해지기 시작한다. 그녀의 탈북 여정 못지 않게 아들 효성씨가 엄마 있는 미국 땅에 오기 까지의 여정 또한 ‘엄마 찾아 삼만리’ 였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는 기회있을 때에 다루기로 하고 다시 마영애 대표의 육성을 들어본다.

“아시다시피 북한은 출신 성분에 따른 차별이 당연시 되는 사회입니다. 내 출신성분이 조금 기울었지만 남편 집안이 워낙 토대가 좋아 저는 정권의 신뢰를 어느 정도 얻을 수 있었죠. 남편의 작은 아버지가 국가안전보위부 실세였던 제1국 부국장이었으니까요. 나는 남편과 연애하던 시절인 1987년부터 1999년 탈북할 때까지 햇수로 12년 동안 보위부를 위해 일했습니다”

보위부에서 일하는 동안 ‘마영애’는 없었다,

북에서는 최광애, 중국에서는 장혜숙이었다. 북한 정보요원들은 모두 가명을 사용한단다.

“말도 마십시오, 별의 별 일을 다 했습니다. 주로 중국과 러시아에서 활동을 많이 했어요. 범죄를 저지르고 탈북한 군인들 잡으러 다니기도 하고, 사업 자금 만들기 위해 해삼, 전복, 골동품 등의 거래도 하고, 중국 거주 조선족들 동태 파악이며… 보위부가 하달한 명령대로 정말 많은 일들을 했습니다.”

출신 성분 좋은 남편에, 평양에 거주하는 보위부 소속 공작원인 그녀. 북한에 살았어도 큰 어려움 없이 살았을 법한데 왜 그녀는 탈북했을까? 아니, 무엇이 그녀를 탈북하게 했을까.

—–3편에서 계속

뉴욕 안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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