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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생활 인물탐방

특별연재 <구술 수기> “하나님은 분명코 아신다.” (8)

박희도 박희성 형제에 관한 오해와 진실

    -크리스찬, 손주 며느리 노현경씨 에게 듣는다.

그의 묘비는 많은 것을 웅변하는 큰 자료

유상규(1897~1936)는 경성의전 재학 중 3.1운동 주동자로 수배되자 상해로 망명하여 도산의 비서가 되었다. 이때부터 두 사람은 부자지간과 다름없는 관계로 맺어졌다. 몇년 후 상해 임정을 떠나는 도산은 명석하고 성실한 유상규에게 귀국하여 의학공부를 계속해 민족을 위해 일하라고 권고했다. 이에 유상규는 우여곡절 끝에 귀국해 경성의전에 복학했고 동기보다 7년 늦게 졸업했다. 그후 경성제대부속병원의 외과의사가 됐는데 흥사단과 수양동우회 활동에 열심인 한편 의학을 통한 민족계몽에 헌신하다가 세균 감염으로 별세해 40세의 나이에 망우리로 왔다.

도산은 1938년 3월 10일 경성제대부속병원에서 서거해 망우리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고향 평남 강서군에 선산이 있었지만, 장지가 망우리로 정해진 것은 이태전인 1936년에 먼저 이곳에 들어온 제자 유상규 옆에 묻히기를 유언으로 원했기 때문이다. 이는 잡지 《삼천리》 「1938년 5월호, 도산의 유언」, 선우훈의 『민족의 수난』(1948), 등 복수의 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다.
유상규에게는 33년에 태어난 아들이 있었다. 그가 바로 옹섭 인데 당시에도 아이 이름에 어울리지 않는 ‘옹(翁)’자를 넣은 것은 도산의 다른 아호 ‘산옹(山翁)’에서 따온 것이었다. 3살때 부친을 여의고 유복자처럼 컸지만 부친을 닮아 영특한 수재였던 옹섭은 경기중학 서울공대를 거쳐 공군에 학사 장교로 입대해 장성인 준장에 까지 오른 뒤 예편 했다.

효심 또한 강한 그는 경기중학 시절부터 도산 선생의 간곡한 뜻으로 부친이 그분과 나란히 뭍혀 있는 것을 큰 자랑으로 여기면서 틈만나면 부친과 도산선생의 묘소를 찾아 참배하곤 했다. (아래사진)
그런데 73년 서울시가 강남을 개발하면서 청담동에 도산공원을 조성하고 도산로를 건설하면서 도산의 묘만 달랑 도산공원으로 옮겼다. 초급 장교 였던 유옹섭으로서는 너무도 섭섭한 일 이었을 것이다. 그때도 몇몇 언론이 이를 보도하고 그의 처지를 옹호했지만 도산공원 측은 두분 모두를 모실 수 없다고 난색을 표했고 당국은 정 그러면 유상규지사를 국립묘지로 옮길 것을 제시 했다. 히지만 유옹섭은 도산의 엣 비석을 가묘 앞에 남겨 두기만 하면 된다고 대답했고 일은 그렇게 처리됐다. 그래서 도산의 가묘는 아직 유지사 묘소 옆에 있다.

자유기고가 김명식 (62년생, 중대 일문과 졸업)이 유옹섭에게 질문한 것이 바로 그 이유였다. 그랬더니 유옹섭은 망우리 이곳에는 부친이 존경하던 선배 박희도선생의 묘가 바로 옆에 있기 때문이었다고 답했다. 김명식의 당시 발표된 글에는 그얘기와 박희도가 정훈학교에서 강의 했다는 사실 까지만 간략히 나왔지만 그 글의 발표 이후 현경이 부랴부랴 유옹섭에게 연락해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수 있었다.
옹섭은 58년 여름, 서울공대 재학 시절 박희도의 묘소에 비석이 건립되는 과정을 목격 했던 것이다. 처음엔 위관급 장교가 인부들을 지휘하면서 비석을 세우기 전 기단을 설치 하는 광경을 보았기에 그 장교에게 영문을 물었더니 그 박희도 선생의 비석을 건립하고 있다는 답을 들을 수 있었단다.

그때까지 옹섭은 그 묘소가 박희도의 묘소인 줄 몰랐다. 묘소앞에 낡은 판자로 된 표식만 있었기에 무심히 지나쳤다는 것이다. 박희도라면 그 이름을 어머니에게서 자주 들었고 아버지의 유품 사진에도 있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가 친일 변절자로 알고 있었는데 현역 군인들이 나서서 비석을 건립하는게 특이 하게 여겨져 더 관심을 가졌고 며칠 뒤 거행된 건립제 때는 학교를 빼먹으면서 까지 직접 참석했다.
제막제 때 묘소에는 별단 장군도 있었고 영관급 위관급 장교들이 먾았다는 기억이다. 그러면서 그들에게서 박희도 선생이 49년 부터 공산침략이 있을 가능성을 대비해 군인들의 정신 교육에 매진 해야 한다면서 정훈학교 설립을 강하게 주장 했고, 불철주야 솔선수범의 모습을 보였다는 얘기를 똑똑히 들었다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3.1운동의 역사를 다시 보고 아버지의 유품을 다시 봤더니 박희도 선생이야 말로 다시 평가해야 할 인물이라는 생각이 확실히 들었다고 했다.
박희도와 유상규, 유옹균과 박현경 , 망우리를 휘감아 감싸는 엄청난 우연이고 신기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유상규 지사 애기는 3.1운동을 다루면서 다시 나온다.
그랬다. 친일의 불명예 때문에 그 누구도 고인에 대해 비석 하나 제대로 세워주지 않았지만 육군정훈학교는 그의 사후 7년 만에 한국 기독교계의 큰 인물이었으며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 이었고 말년에는 묵묵히 백의종군하며 하릴 없는 교육자로 생을 마친 인물이었다고 그를 추념하며 이 비석을 세웠던 것이다. 이 비석이야 말로 그의 진정한 이름이 아닐까.
사람의 일생에 대한 평가는 관뚜껑 못을 박을 때 나오게 돼 있다는 말이 있다. 정승집 개가 죽으면 문전 성시지만 정작 정승이 죽으면 상가는 쓸쓸하다는 말도 있다. 박희도에 대한 평가는 이제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변절자(?)에 대한 차가운 시선 이대로 좋은가

사실 박희도 뿐만이 아니다. 그동안 우리 역사에 있어 33인에 대한 평가는 야속할 만큼 야박했던 것이 사실이다. 요 몇해전 TV 강의로 유명해진 한 역사강사가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이 우리나라 최초의 룸살롱인 태화관에서 낮술을 먹었으며, 대부분 1920년대에 친일로 돌아섰다’며 민족대표 33인을 적나라하게 비판해 논란이 일었다.
결국 법정까지 간 이 논란의 진위와 명예훼손 여부를 따지기에 앞서 그간 우리 국민들이 민족대표 33인을 부정적으로 보고 있는 사실이 새삼 확인된 헤프닝이었고 할 수 있다.
진보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한국 역사학계가 상당 기간 민족대표에 대해 부정적 시각을 보여왔던 것이 그 원인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3·1운동 70주년이 되던 1989년, 벌써 30여년 전 이기는 하다. 그때 한국 사학계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학회인 ‘역사학회’는 학회 명의로 33인을 ‘민족대표’가 아니라고 선언했었다. . 탑골공원이 아닌 태화관을 선택하고, 독립선언식을 마친 뒤 경찰에 자진해서 끌려감으로써 스스로 운동의 지도권을 포기했다는 이유에서다.
“ 33인의 한계는 첫째, 일본과 미국,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을 청원하는 등 타협적이고 외세 의존적인 독립방법론에 입각해 있었고 둘째, 외세에 의존하면서도 국제정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셋째, 민중에 대해 심한 불신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김성보, ‘3·1운동에서 33인은 ‘민족대표’가 아니다’, <역사비평> 1989년 겨울호). 라는 것이었다. 그때의 전반적 분위기가 그랬다.
그로부터 30여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역사학계의 연구 흐름도 바뀌기는 했다. 독립 운동사에 대한 연구가 진전되면서 민족대표를 바라보는 비판적 시선도 점점 무뎌졌던 것이다. 그들이 엄혹한 일제의 무단통치하임에도 1919년 3월1일 서울만이 아니라 평양, 진남포, 선천, 의주, 원산에서 만세시위를 사전에 주도한 행위에 대해 종전보다 더 높은 평가가 이뤄졌다.
첫날 앞서 언급한 도시에 안주를 보태 모두 7개 도시에서 일어난 만세시위가 다음날부터 인근 지역에 확산되면서 3·1운동의 전국화에 토대를 놓았다는 점이 주목됏다. 3월1일의 조직적 만세시위가 전국적 시위를 촉발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물론 1989년의 시점에도 ‘33인이 없었다면 3·1운동은 일어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33인이 3·1운동의 기폭제 역할을 했음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는 전제는 깔려 있었다.
하지만 그무렵에는 이들이 운동의 지도권을 포기한 결과 지도권이 민중에게 넘어간 사실에 더 주목했기에 33인 보다 유관순이 더 추앙되는 뷴위기 였다면 최근엔 33인의 민족대표가 만세시위를 기획했던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평가를 받이야 한다고 얘기되고 있다.
이같은 흐름을 잘알고 있는 한 학자는 최근 33인 가운데 국민들이 생각하는 것 만큼 변절자가 없다는 내용의 글을 발표 했는데 요지는 다음과 같았다.

<지난 시절의 역사학계의 영향 탓인지 대중들도 민족대표를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있는데 그 중심에는 ‘민족대표가 대부분 친일파로 변절했다’는 오해가 자리잡고 있다. 33인 민족대표 중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린 사람은 최린, 박희도, 정춘수 세 사람뿐이다. 민족대표 중에 친일파가 많다는 오해는 독립시위를 주도적으로 준비한 천도교 지도자 최린과 기독교 지도자 박희도의 변절에서 비롯된 바가 크다. 주모자인 두 사람의 친일행위를 33인 민족대표 전체의 변절로 받아들인 것이다. ‘3·1독립선언서’를 작성한 최남선의 친일도 ‘민족대표=친일파’라는 오해를 키우는 데 영향을 미쳤다.>
그 조차도 박희도는 변절자의 대명사로 운위하고 있다. 최린 정춘수와는 달리 박희도는 아무런 친일의 댓가를 받은바 없는데도 그렇다. 최린은 총독부로 부터 세계 일주 여행의 후원을 받기도 했고 신문사 하나를 할양 받기도 했다. 정춘수는 조선 감리교의 총독격인 통리에 올라 전횡을 한바 있다.

‘죽은 자들은/ 산 자들의 짐이다/ 살아서 흘린 피/ 살아서 남긴 욕/ 살아서 피운 꽃/ 모두 짐이다’ (남태식 ‘짐’).
시인 남태식의 시처럼, 독립군이 흘린 피와 한용운이 피운 꽃뿐만 아니라 최린 정춘수등이 남긴 욕(辱) 또한 우리가 짊어지고 가야 할 짐이다. 그런 짐은 비난하고 욕한다고 해서 가벼워지지 않는다.

친일파 연구로 평생을 바친 임종국(1929~1989)이야 말로 죽창을 꼬놔 쥔 반일의 선봉격인 인물이다. 그 조차도 자신의 저서 ‘실록 친일파’(돌베개, 1996) 중 ‘일제 말 친일군상의 실태’ 대목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친일행위를 인신공격의 자료로 삼으려는 경향도 있었다. 그러나 이 점에서 반민법(반민족행위처벌법)은 분명히 시효가 지났다. 또한 이런 자에게 묻노니, 그대는 저 여인을 돌로 칠 수 있다고 자신하겠는가? 전비(前非)로써 현재의 지위를 위협당할 사람도 없겠거니와, 이로써 위협을 하려는 자 있다면, 그 비열함이야말로 침을 뱉어 마땅한 일일 것이다.”
그는 또 같은 책 ‘민족대표 33인 중의 훼절’ 대목에서는 이렇게 밝혔다.
“민족대표 33인 중 10%의 변절이 한국인에게 수치만 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한 민족의 한 시대의 비극이 그들의 추문이 될 수도 없는 것이다. 친일자의 전부에 해당할 말은 아니지만, 적어도 민족대표 중의 4명( 박희도, 최린, 정춘수, 최남선. (최남선은 33인에 속하지 않으나 3·1독립선언서를 기초)만큼은 한 시대의 민족의 비극을 고뇌하면서 살다간, 변절을 했을망정 그래도 조선의 양심이었다. 이들 4명의 죄상보다는 식민정략의 정체에 대한 인식이 앞서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그렇다 지금도 우리 사회에서는 친일파 문제가 여전히 논란에 휩싸여 있지만, 이미 오래전에 ‘종교의 마음’ 그것도 상명하복의 위계 질서가 강조되는 군에서는 고인(故人) 박희도에게 생전의 공(功)을 비석에 새겨 주고 부모 밑에 고이 잠들게 했던 것이다.
다시 마태 복음을 인용한다. 우리 모두는 너나 할것 없이 용서받아 할 죄인 아닌가.
“너희가 남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의 천부께서도 너의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남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 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 하시리라.”(마태복음 6장 14절)
일단 박희도 일생에 대한 개괄 소개는 이쯤에서 접고 3.1운동, 민족 개조론 개량론 자치론 등에 대해 탐구해 보기로 하면서 잠시 박희성 지사에게로 시선을 옮겨 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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