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희도 박희성 형제에 관한 오해와 진실
-크리스찬, 손주 며느리 노현경씨 에게 듣는다.
감옥에 있으나 집에 나오나…
박희도는 신생활사에 자본금 1만 5천원(해주 부친의 전답을 판 돈)을 기탁하여 사장으로 취임하고 잡지 『신생활』 발간을 이끌었다. 기독교 세력과 초기 사회주의 세력의 연합적 성격을 지닌 잡지 『신생활』은 사회주의사상을 비롯한 여타 신사상을 소개하고 전파하는 활동을 전개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런데 출발부터 암초에 부닥쳤다. 창간호부터 발매금지를 당하였는데 그 후로도 몇 차례 기사삭제와 압수처분을 당하였다. 결정적 문제가 된 것은 1922년 11월 14일 발행된 제11호였다. 일제 당국은 러시아 혁명 5주년 특집을 문제 삼고 나섰다. 조선총독부는 신문지법을 위반했다며 발매금지 처분을 내렸다. 마루아먀(丸山) 경무국장은 이례적으로 직접 나서 발매금지 사유를 밝히면서 “처음부터 과격한 사회주의적 선동기사를 실어 왔다”고 밝혔다.
단순히 발매금지에서 끝나지 않았다. 사장 박희도는 물론 주필 김명식, 기자 신일용 등 6명이 구속됐고 인쇄기도 압수당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신생활 필화사건’이다.
이들은 기소돼 재판에 넘겨졌는데 이듬해 1월 17일 열린 결심 공판에서 박희도는 징역 2년6개월을 선고받았다. 어떤 이들은 이 재판을 두고 ‘조선 최초의 사회주의 재판’이라고 부른다. 박희도는 함흥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25년 1월 1일자로 만기출옥 하였다. 1919년에 이어 두 번째 감옥살이였다.
출옥 후 그는 평생의 본업이라고 할수 있는 교육사업을 위시해 문화사업, 사회사업, 종교운동 등 각방변에 걸쳐 무척 분주하게 활동한다. 출옥 직후, 1924년에 어렵사리 재건된 중앙유치원 사범과 교사로 부임했다. 중앙보육원은 그의 평생 직장이었던 셈이다. 출옥 두달 만인 1925년 3월에는 위장 독립운동 그룹인 흥업구락부 결성에 참여했으며, 1927년 1월에는 좌우합작 민족단체인 신간회 창립에도 참여했다. 1929년 7월 신간회 중앙집행위원 내 출판부장을 지냈으며, 같은 시기 동경에 잠깐 머물렀을 때는 신간회 동경지회 대표회원으로 선임되기도 했다. 또 그해 9월 신간회 회보 편집위원을 맡았으며, 10월에는 중앙상무 집행위원으로 선임됐다.
1928년 중앙유치원 사범과가 중앙보육학교로 정식인가를 받으면서 그는 초대 교장에 취임했고 1934년 모종의 치욕적인 스캔들로 임영신에게 교장 자리를 넘겨주기까지 이자리 만큼은 보전했다. 그 무렵 그는 만주동포 구호를 위한 단체에서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조선 고아 구제회 이사로도 활동했다. 그러면서 그는 여러 잡지에 계몽적 성격의 글을 다수 발표했다.
많은 이들이 1930년대 들어서면서 박희도의 삶은 이전과는 180도 뒤바뀌었다고 얘기 한다. 민족주의자를 자처했고 한때는 기독교 사회주의를 표방했던 그가 이른바 자치론에 빠져 들면서 친일로 접어들기 시작 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현경은 다른 견해를 갖고있다. 박희도는 처음부터 온건한 비폭력 노선의 독립운동을 선호했다는 것이다. 무장투쟁등 적극적 독립운동을 배척하고 폄하 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행적이 친일, 변절로 평가 되는 그 정점은 최린이 회장으로 있던 시중회(時中會) 발기인으로의 참여였다. 33인 출신의 최린 등이 ‘신흥조선의 건설’을 내걸고 발기한 시중회는 1934년 11월 5일 조선호텔에서 성대한 창립식을 열었다.(매일신보, 1934.11.6.) 이날 행사에서 박희도는 경과보고를 맡았는데 당일 임원선거에서 뽑힌 7명의 이사 가운데 한 사람 이기도 했다. 시중회 참가는 최린의 권유가 큰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최린은 33인 시절부터 유난히 박희도를 아끼고 신임했고 박희도 역시 최린을 따랐다.
또 박희도가 자치론으로 경도 된 것에는 일생 선배인 동석기 정춘수 두 목사의 영향도 컸던 것으로 여겨진다.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듯 개량론에 빠져 있었다. 동석기는 자신의 터전인 감리교를 떠나 환원운동에 열심이었고 정춘수는 총독부 후광으로 조선 감리교를 장악하려 하고 있었다. 동석기는 조선에서 추방돼 만주 길림에서 온건 독립노선을 따르는 목회 활동과 초기교회와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환원운동을 펼치고 있었다.
그런데 최린의 시중회는 출발 직후 최린 스스로와 박희도의 성추문 스캔들로 시쳇말로 스타일 완전 구기면서 영향력을 펼치지 못하게 된다. 당시로선 흔치 않았던 사생활 관련 스캔들이었다. 요즘으로 치면 미투, 성폭력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최린 이야기는 뒤로 하고 박희도로 집중하면 그는 친일파로 돌아섰다는 지탄 위에 ‘제자 정조유린 사건’이라는 스캔들로 치욕적인 위기에 빠지게 됐던 것이다.
<조선중앙일보>는 1934년 3월 17일자에서 박희도가 제자를 유인하여 정조를 유린했다고 대서특필하였다. 이 신문은 이후로도 10여 차례에 걸쳐 관련 기사를 실었다. 사태가 커지자 교계와 교육계의 민간 조사위원회 까지 구성돼 조사를 벌였으나 도중에 피해여성이 애초의 주장을 번복하는 등 논란만 가중된 채 유야무야 됐지만 이 사건으로 박희도는 파렴치한으로 낙인찍혀 얼마 뒤 중앙보육학교 교장 직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당시에도 <조선중앙일보>의 박희도 스캔들 관련 보도는 다분히 정치적이며 과도하게 선정적이었다는 비판이 나왔었다. 민족지사에서 자치론 등 타협적 민족주의자로 변신한 박희도가 언론의 표적이 됐다는 지적이다. 당시 <조선중앙일보> 사장은 몽양 여운형이었다.
민족대표 33인 중에 자치론으로 기운 박희도와 최린 등에 대한 민족의 시선은 늘 따가웠다. 자치론은 적극적 독립운동을 약화시키고, 일제의 정책에 놀아난 것으로 간주됐으며, 따라서 그들의 이름 앞에는 ‘변절자’ ‘친일파’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그시절에도 그랬던 모양이다. 특히 경향성 있는 언론들이 더 그랬다.
“ ‘자치론=비겁한 민족주의’라는 논리는 너무나 단정적인 견해다. 만약 이 논리만이 바르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진보세력을 무조건 친북좌파라고 매도하고 보수를 수구꼴통이라고 매도하는 독단적 흑백논리와 다를 바 없다.” 현경의 목청높은 견해다. 민족 개량론에서 출발한 자치론 그 문제에 대해서는 떠로 탐구해보기로 한다.
시중회 이후 해방 때까지 박희도의 행적은 표면적으로 보면 친일행각으로 일관 하고 있었다. 1936년 11월 징병제 실시 상임준비위원을 맡아 징병제 찬양에 나섰으며, 이듬해 7월 중일전쟁 개전 이후에는 총독부 학무국 주최 시국강연반에 참여했다. 1939년 5월에는 전시동원단체인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및 국민총력조선연맹 참사, 조선인전보국단 평의원 등을 지냈다. 일제 패망 직전인 1945년 6월에는 조선언론보국회에도 참여햇다고 거의 모든 기록이 말하고 있다.
세인들은 박희도의 대표적 친일행각으로 친일잡지 <동양지광(東洋之光)> 창간을 들고 있다. 1939년 1월 1일 창간된 이 잡지의 창간사에서 그는 “필경 내선일체의 구현에 대한 일본정신 앙양의 수양도장(修養道場)을 제공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며 내선일체 구현을 적극 표방했다고 알려져 있다.
자료에 따르면 박희도는 <동양지광>에 여러 차례 칼럼을 썼으며, 수많은 친일 인사들에게 지면을 제공했다. 그런데 당시 단골필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김용제(金龍濟)는 <한국문학> 1978년 8월호에 기고한 ‘고백적 친일문학론’에서 “동양지광은 항일 지하단체의 본거지였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김용제는 제1회 ‘국어(國語)문예총독상’을 수상한 이른바 1급 친일문인이다. 여기서 국어는 일어를 말한다. 이 때문에 당시에 이 발언은 냉소 속에 오히려 지탄을 더 받았을 뿐이지만 그 내용 가운데 구체적인 것도 있기에 자초지종은 따져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현경을 비롯한 가족들은 박희도가 썼다는 많은 글들이 일제의 농간과 협박에 의해 쓰여 졌거나 다른 사람이 쓴것에 이름만 빌려 줬다고 말하고 있다. 박희도는 글보다는 연설을 잘하는 사람인데 아들 박승두는 어바지가 다른 사람이 쓴 일본어 글을 들고 와서 침통한 표정으로 밤새 노려보곤 하는 광경을 여러차례 목격 했다고 말한다. 동양지광은 일본어로 발행되던 잡지였다. 박희도의 소위 변절행각을 기독교회사(史) 연구가인 김승태는 한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비판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나온 일반적인 박희도에 대한 평가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다.
“박희도의 일생은 그 시대의 가장 주류를 이룬 사조에 쉽게 빠져 들어가 열성을 다해 일하다가, 그 사조가 일단 잦아들면 쉽게 포기하고 또 다른 사조를 찾아 뛰어들었던 것 같다. 그리하여 민족주의 운동의 최고봉이었던 3·1 운동에 민족대표로 참여하였고, 그 후 사회주의 사조가 일어나자 『신생활』을 창간하여 동조하였으며, 1920년대 말경에는 신간회에 참여하면서도 자치운동에 기울었다가, 마침내 1930년대에 들어 일제의 대륙침략과 세력의 확장으로 독립에 대한 희망이 사라지자, 자발적으로 관제운동인 황민화운동에 뛰어들어 『동양지광』을 창간하여 친일논설을 펴고 내선일체와 전쟁협력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현경씨를 위시한 가족들로서는 예단에 가득차 너무도 쉽게 결론과 평가를 내리고 있다고 할 법 하다. 이글이 끝나 발표 됐을때 저런 평가들이 어떻게 달라지려나 자뭇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