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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ptember 20,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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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장편 이민현장 소설>  영웅의 약속 

연재10회

안동일 작

마침 당시의 한인회장이 뉴욕시의 유명 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인사였었고 한인 대학생 연합회의 활동도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었기에 자원봉사자로 참여한 학생들은 긍지와 보람을 가지고 가두 선전이며 한인업소 탐방들에 열심이었다.
윌리는 국무장관이 되었건 연방 하원의원이 되었건 자신의 야망을 구현 하기 위해서는 피를 나눈 형제인 한인들을 발판으로 커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면에서 아버지와는 마찰이 있기는 했다. 아버지는 한국들과 섞여 한국식으로 지내면 미국 사회의 본류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믿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아버지는 그무렵 늦게 까지 싸돌아 다니는 윌리에게 크게 뭐라고 하지 않았다. 당신의 회사내의 일이 너무도 복잡하게 꼬이기 시작한 무렵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윌리와 승혜는 같은 조로서 맨해턴 브로드웨이 일대의 한인 업소를 탐방 하면서 유권자 등록을 홍보하고 또 시민권 취득에 필요한 서류 작성을 돕는 일을 했었다.
시립대학에 다니고 있던 승혜는 이민 온지 3년 밖에 되지 않아 모든 면에서 윌리보다 한국적이었고 또 한국에 대해 아는게 많았다.
승혜는 한국학생회 모임에서도 별로 눈에 뜨이지 않는 여학생 이었지만 윌리에게는 첫 인상 부터 친숙한 얼굴로 다가왔었다. 함께 일을 하다 보니 볼수록 참 괞찬은 여학생이었다.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지 않으면서도 자신이 맡은 일에 대해서는 진지하고 침착한 자세로 끝까지 최선을 다 했다. 승혜는 모임에 빠지는 법이 없었다. 그리고 늘 끝까지 남아 있었다. 회의 중 거의 발언은 안했지만 남의 말은 열심히 들어 주곤 했다.
두사람만 은밀하게 만나는 그런 일은 별로 없었지만 같이 어울려 다니려니 서로 자연 친하게 됐고 여러가지의 화제를 떠 올려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한국에서 유행하는 노래에 대해서 얼마간의 지식을 갖게 된것도 승혜를 통해서 였고, 잘나가는 영화배우며 탈렌트들의 사진을 보면 그들의 이름을 떠 올릴 수 있게 된 것도 승혜 덕분이었다. 참새 시리즈, 당시 막 유행했던 최불암 시리즈의 조크를 기억 할 수 있었던 것도 승혜 때문이었다. 승혜는 윌리와 동갑 이었지만 학년이 밑이라는 이유로 윌리를 오빠라고 불렀다. 윌리는 한국 학생들 사이에서 이미 전설적인 인물 이었기에 사실은 윌리에게 은근한 관심을 표하면서 접근해오는 여학생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언제 부터인지 윌리는 승혜만을 관심의 대상으로 여기게 되었다.
승혜의 별명은 순둥이였다. 평소에 말없이 착하기만 하다고 해서 선배들 가운데 누군가 붙혀준 별명이었다. 그런 순둥이가 윌리며 친구들이 캠페인 일에 지치고 또 더위에 짜증 날때면 불쑥 한번씩 신판 최불암 시리즈를 들려줘 좌중을 포복절도하게 만들었다. 승혜가 뚱한듯이 능청 스럽게 읇조리는 조크였기에 더 재미있고 우스웠다.
캠페인은 대통령선거가 있었던 그해 11월 까지 계속 됐는데 자원 봉사자 학생들은 개학을 하고 나서도 방과 후면 조를 짜서 한인회관이며 각 지역 한인회 사무실로 달려가 켐페인 일에 매달렸다.
워낙 시민권자가 많지 않았기에 큰 성과는 없었지만 그런대로 이들의 활동은 어른들의 관심을 끌었고 기특하다는 찬사를 받기에 충분 했다. 윌리에게는 자신이 한인 사회에서 역시 똑똑한 청년이구나 하는 식으로 부각 됐고 또 개인적으로는 승혜라는 마음에 드는 친구를 만난 것이 더 없이 기쁜 일이었다.
승혜 문제를 놓고도 아버지와는 마찰이 있어야 했다. 아버지는 가난한 집안의 학벌도 변변치 않은 승혜가 어떻게 윌리의 여자 친구 혹은 미래의 반려자가 될 수 있겠냐는 투 였다.
물론 윌리는 아직 승혜를 자신의 반려로 까지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녀와 함께 있으면 남자 친구들과 있을때와는 또 다른 편안함이 느껴 졌고 며칠 안 보게 되면 궁금해서 좀이 쑤실 지경이 됐다.
사실 따지고 보면 승혜네 집이 가난한 것도 아니었다. 승혜의 아버지는 타고난 성실성과 건강을 무기로 이민 온지 3년 만에 뉴욕시내에서는 내노라 하는 큰 규모의 야채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다.
온 가족이 열심히 매달린 결과였다. 충청도 서산이 고향인 승혜 아버지와 엄마는 사과 하나라도 다른 가게 보다 더 반짝이도록 열심히 닦았고 하루에도 몇번씩 가게를 청소해서 반질거리게 만들었다.
승혜는 딱한번 왔던 이래 윌리네 집에 놀러오지 못 했지만 윌리는 무상으로 승헤네 가게며 집을 출입했다. 승혜의 부모들은 언제나 윌리를 환영했다.
어쩌다 승헤네 집에서 늦은 저녁이라도 함께 먹을 때면 윌리는 이런게 사람 사는 거구나 하는 인간적 편안함과 가정의 화목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만큼 승혜네 집은 단란했고 그녀의 부모들은 윌리를 편하게 대했다.승혜의 두 남동생은 윌리를 친형처럼 따랐다. 가끔씩 윌리에게 들고오는 어려운 수학 숙제를 단번에 풀어 내고 그 복잡한 과학 프로젝트의 요령을 아주 쉽게 일러 주면 녀석들은 더없는 존경의 눈으로 윌리를 우러러 쳐다 보곤 했고 그럴때 승헤며 승혜 엄마 아버지의 얼굴에도 잔뜩 자랑스런 기운이 퍼지곤 했다.
“너도 윌리 형 처럼 대통령 메달 타낼 수 있겠어? 형은 세개나 탔대는데 하나만 이라도 말이다.”
형제 가운데 공부 잘하는 막내에게 언제나 승혜 아빠가 던지는 말이었다. 윌리는 고등학교 시절에도 에세이 경연 대회에 나가 최고상을 탔었다. 그땐 대통령 메달이 없이 그저 백악관에 초대 받아 가는 것이 전부 였는데 사람들은 그냥 대통령 메달을 탔다고 말하곤 했다.
시간이 지나고 학년이 높아지면서 승헤와 만나는 빈도는 줄어 들었지만 만남의 밀도라고 할까 그 강도는 자연 높아져 갔다. 어찌된 셈인지 한국 대학생회의 활동이 뜸해 졌다. 회장을 맡은 학생이 활동적이 아닌것도 큰 이유였고 학교간의 경쟁도 그 원인이었다. 윌리는 주위에서 회장을 맡으라는 권유도 많았지만 아버지 때문에도 그랬고 또 그 무렵 다음 학기에 영국 런던대학에 교환 학생으로 가야 하는 계획이 있었기에 회장 선거에 나서지 않았었다.
런던으로 떠나기 바로 직전, 어느날 승혜네 집에서 저녁을 먹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배웅에 나선 승혜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탔던 윌리는 깜짝 놀라야 했다. 윌리네가 탄 아래층에서 엘리베이터에 오른 어느 한국 사람에게 인사를 던지는 승혜의 옆얼굴의 눈매가 바로 엄마의 눈매 였던 것이다. 애써 생각지 않으려 했던 엄마의 모습이 돌연 눈에 삼삼 해지면서 가슴이 뛰었던 것이다. 승헤가 엄마를 닮았다는 것은 한번도 인식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아버지가 승혜를 처음 봤을때 멈칫 했던 것도 그 이유가 아닐까 싶었다. 두근 대는 가슴을 으로 집에 달려가 한번도 펴보지 않았던 어린시절의 엘범을 뒤졌다. 아무리 미국으로 떠나 오면서 추려 냈었지만 몇장쯤은 엄마의 사진이 있었다. 틀림 없었다. 승혜의 눈매가 엄마의 그것을 닮아 있었다.
빌리는 그날밤 엄마를 혼자두고 아버지와 미국에 온이래 처음으로 진지하게 엄마에 대해 생각 했다. 그때는 자신이 너무 어렸구나 싶었다.엄마에게 너무 심하게 대했구나 싶었다. 지금이라면 엄마를 얼만큼은 이해 할 수 있을것 같았다. 엄마에게 편지를 쓰면 어떨까 싶었다. 그러나 엄마와의 연락은 진작 두절돼 있었다. 아버지는 혹시 근황 정도야 알고 있을지 어떨지 몰라도 윌리와 아버지 두사람 사이에는 서울의 엄마에 대해 얘기 하지 않는 다는 불문율이 9년동안 지켜져 있었기에 새삼스럽게 아버지에게 묻는 다는 것도 어울리지 않았다.
빌리는 그날밤 휘영청 밝은 달이 서울의 그것이나 뉴욕의 그것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었다. 어쩐지 가슴이 스산했고 쓸쓸했다.

런던에 한학기 있으면서 승혜와는 편지로 전화로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바쁜 교환학생 일정에서도 밤늦은 시각 기숙사 책상에 앉으면 승헤의 얼굴이 뽀얗게 떠오르곤 했기에 펜을 잡았고 때론 통화료 청구서가 걱정 되면서도 전화통을 붙잡지 않을 수 없었다.
일정을 마치고 런던에서 뉴욕으로 오는 비행기에서 윌리는 자신 혼자 결심 했다. 이제 얼마 안있으면 승혜도 졸업을 하게 되는데 지금처럼 맹숭맹숭한 친구로 지낼 것이 아니라 미래를 함께 설계 할 반려가 되자는 전제로 만남을 계속 하자고 고백하겠다는 것을…
그랬는데 일이 묘하게 꼬여 승혜는 공항에서 가슴 아픈 꼴을 당해야 했고 공연히 자신감을 잃어 마음에도 없이 윌리에게 헤어지자는 말까지 해야 했던 것이다.
“승혜 혹시 이런말 들어본 적 있니? 순응하는 자에게 운명은 봄바람 같지만 거역하려는 자에게 운명은 매서운 칼바람과 같다는 말, 괴테가 한말인데.”
“처음 듣는데, 오빠가 벌써 내운명이야?”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녀의 태도는 상당히 누그러져 있었다. 봄바람에 눈녹듯 그녀의 매서웠던 억지 결심은 사라져 버린 모양이다.
“사람이 하는 일이 모두 자기 마음먹은대로 될리야 없지만 그래도 꿈을 갖고 무언가 이루겠다고 노력하는 것이 중요한 것 아니 겠어? 알았어?”
보일듯 말듯 살며시 고개를 끄덕이는 승혜의 눈에는 웬일인지 물기가 그렁그렁 했다. 윌리가 다시 승혜의 어깨를 감아 쥐었고 승혜의 몸이 윌리쪽으로 기대져 왔다. 쿵쾅대는 두사람 가슴의 고동소리가 서로에게 전해졌다. 윌리가 승혜의 어깨 위에 있던 자신의 손을 살며시 들어 승혜의 귓볼을 만졌다.
윌리가 승혜의 턱을 가만히 쥐었고 승혜는 파르르 떨면서 눈을 감았다. 이러다가 심장이 터져 버릴지 모른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벼락치는 듯한 가슴의 고동을 느끼면서 윌리가 자신의 입술을 승혜의 입술로 가져 갔다.
승혜는 윌리의 입술이 자신의 입술에 닿는 순간 승혜는 멈칫 하기는 했으나 두손을 꼭 쥔채 가만히 있었다. 온 세상이 승혜의 입술을 통해 윌의 입술로 들어왔고 가슴이 터질듯 부풀었다.
그러나 날카로운 첫 키스였다. 웬지 윌리에게는 그 말이 생각났다. 날카로운 첫기스의 기억은 나의 운명의 화살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 달아 났다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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