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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ptember 19,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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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장편 실록(實錄) 소설 > 순명(順命) ,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1)

 안 동일 작

 서(序),  들어가는 장

갓을 쓴 중년의 남자가 상체를 앞으로 굽힌 채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앞으로 달려 나오려 하고 있었다. 한 손은 앞으로 뻗고 있었고 주먹을 쥔 다른 한 손은 허리 뒤로 가 있었다. 앞으로 뻗은 손에는 십자자가 쥐어져 있었다. 예수가 매달려 있는 천주교의 십자고상이었다. 우연히 벼룩시장에 나갔다가 구한 30센티 높이의 목 조각상이었다.
어찌 보면 그가 쓰고 있는 것은 테가 좁은 것이 우리 갓이 아니라 서양의 중절모이고 도포도 서양식 긴 연미복 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것들을 조선의 갓, 조선의 도포라고 보기로 했다. 그때의 내 마음이 그랬다. 무엇보다 바닥에 씌어 있는 하비에르 (Xavier) 라는 이름이 더욱 그 생각을 굳히게 했다.
그러면서 이 목 조각상을 구하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뜸 그렇게 생각한 것은 그 조각상이 그 즈음 내가 천착하고 있던 조선 천주교 초기 성조(聖祖)들, 그 중에서도 권일신 성조의 모습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하비에르는 지명 또는 이름인데 권일신 성조의 세례명이 바로 하비에르 프란치스코다.

천주교인이 아니라면 성조라는 표현이 생소하리라, 그리고 권일신이라는 이름도 그럴 것으로 여겨 진다. 한국 천주교에서는 1780년대 조선 내부의 선각자들에 의해 조선 천주교가 성립됐다고 여기고 있다. 외부로부터의 선교가 아닌 자생적이었다는 점을 큰 자랑으로 여긴다. 그런데 그 시절, 천주교 이른바 서학이 엄청난 박해를 받았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희생당한 선각자 가운데 다섯명을 추려 성스럽게 희생당한 선조라는 뜻에서 성조라 부른다. 권일신 선생이 바로 그 선각자 다섯 명, 5대 성조의 한 사람이다.
5대 성조는 조선 땅에 천주교를 신앙으로 자리집게 한 이벽 선생, 최초의 세례자 이승훈 선생, 온 몸으로 신앙을 증거한 정약종 선생, 그리고 최고 수준의 유학자 이면서도 분연히 새 신앙을 받아들여 후학들에게 전파한 권철신, 권일신 형제분이 그들이다. 이 다섯 성조는 그 묘소가 지금 경기도 광주 천진암 성지 묘역에 나란히 모셔져 있다.
뉴욕 벼룩시장에 나타난 조선조 정조시대의 권일신 선생,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 아닌가. 이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 나에겐 큰 의미와 사연을 지니고 있다. 지금부터 그 얘기를 시작한다.
“빨리 들어가서 약 챙겨 먹고 좀 쉬어요. 오늘은 글도 많이 쓰려고 욕심내지 말고, 알았죠?”
그날, 몇 달 전 토요일, 차에서 내리면서 아내는 이렇게 말했었다. 그 즈음 나는 몇 가지 글을 동시에 쓰고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조선 초기 천주교 이야기였다. 그 이외에는 3.1 운동과 미국의 기독교에 관한 글, 그리고 한국 동란과 미국에 관한 글이었다.

원 베드룸 좁은 내집에는 책상이 세 개다. 서재 처럼 쓰고 있는 키친 룸 한 켠 큰 책상 위 데스크 톱에는 6.25에 관 한 글이, 거실 작은 책상의 노트북 에는 3.1운동의 글이, 그리고 나머지 카우치 앞 더 작은 받침대 형 책상 위 노트북에는 천주교 이야기가 담겨 있다. 천주교 스토리는 아직 구상 단계였다. 그래도 자료 갈무리를 꽤 해 놨고 영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서두를 써 놓기는 했다.
아침에 혈압을 쟀더니 평소보다 높게 나왔었다. 전날 저녁 음식을 짜게 먹었기 때문인가 싶었다. 나는 아내의 당부와는 달리 아내를 가게 앞에 내려주고는 그 길로 자이안츠 스타디움 주차장에서 열리는 토요 야외장터 벼룩시장으로 차를 몰았다. 먼 거리는 아니다. 3마일쯤 되려나. 그야말로 눈을 감고도 달리던 길이었다. 매주 토요일 마다 열리는 이 벼룩시장은 아내의 표현대로 우리 부부에게는 ‘득템’의 보고였다. 아내의 명품 반열에 드는 자켓들과 구두들이 그랬고, 어렵고 황량했던 시절 나에게 큰 위안을 줬던 오디오 시스템과 칼라스며 파바로티의 오페라 바이닐 LP 들이 그랬다. 그런데 지난 몇 달 동안 아내가 두번이나 수술을 받는 바람에 갈 수 없었고 회복된 후에는 토요일에 일을 하게 되면서 갈 수 없었는데 내가 혼자 운전해서 간 것은 실로 반년 만의 일이었다. 그랬는데 그 뜻깊은 행차에서 이런 ‘득템’을 했던 것이다.

집에 돌아와 목조각상의 기단부 옆쪽에 새겨져 있는 작은 글씨들은 나로 하여금 이 글을 쓰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바로 ‘1999, Newton, Saint Paul Abbey (뉴튼 성 바오로 수도원)’이란 글자였다. 그러면서 저작권을 뜻하는 동그라미 친 영어 C 자 까지 새겨 놓았다.
뉴튼의 세인트 폴 수도원이라면 내가 진작부터 알고 있는 천주교 수도원이다. 한국 왜관의 베네딕토 수도원의 미국 분원으로 돼 있는 곳이다. 한번 가 본다 하고는 그 뜻을 이루지 못 했었는데 실은 이 일을 계기로 지난 주에 아내와 급히 다녀왔다. 그 이야기는 차차 하기로 한다.
최근까지 그곳에 주석했던 몬시뇰 급의 한국인 할아버지 신부님과 절친한 편으로 그곳 얘기를 자주 들었다. 프란치스코 김인식 신부님은 나의 절친한 페친 이었고 작은 단체 카톡방의 멤버였다. 요즘 시대에는 SNS 친구야 말로 절친한 법 아닌가. 그는 내 글들의 멘토이기도 했다.

여러분들 빅토리아호의 크리스마스 기적이라는 말 들어 보셨을 것이다. 6.25 때 미국의 민간 화물선 메러디스 빅토리아호가 1950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 날, 흥남에서 정원의 2백배 (승선인원기준)가 넘는 피난민 만사천여명을 태워 거제도로 후송했던 일 말이다. 민간인 선장과 선원들의 결단과 헌신으로 화물칸을 비우고 그곳에 사람을 태워 한 사람의 희생도 없이 오히려 다섯 새 생명을 얻었다는, 후일에 기네스북에도 올랐다는 그 유명한 기적 같은 일 말이다.
그 선박 메러디스 빅토리아호의 선장이었던 레너드 라루씨가 그 후 가톨릭 수사(修士)가 됐다는 것 또한 널리 알려져 있는데 그가 수사가 된 곳이 바로 이곳 뉴저지의 소도시 뉴튼의 성 바오로 수도원이다. 그는 1954년에 종신서원을 세우고 그곳에 입당해 2001년 선종할 때까지 평수사로 그곳에서 헌신했다.
이미 말했듯이 나는 글 쓰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이다. 20대 초반부터 이곳 미국 뉴욕 동포사회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했고 40년이 지난 지금도 언론인, 저술가를 자처하고 있다. 저술가를 병기한 것은 다니던 신문사나 방송국에서 해고당했다 던지 회사가 문을 닫아 상황이 여의치 않았을 때는 글을 써서 책을 출간하는 일로 살아왔기 때문이다. 르뽀집 평론집 그리고 소설을 합해 10권 쯤의 저서가 있는데 매우 안타깝게도 제대로 팔린 책은 몇 권 없다.

 책을 낸다는 일은 여러 인연이 맞아 떨어져야 하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지만 내 경우에는 두 명의 확실한 독자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바로 아내와 출판사 편집자들이었다. 나이차가 꽤 나는 내 젊은 아내는 내가 세상에서 제일 박학 현명하고 글 잘 쓰는 사람이라고 믿고 있다. 다 내 복이다. 또 편집자들도 내 글을 보고는 대단하다며 고개를 끄덕였고 까다롭지 않게 근사한 책으로 만들어 줬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에게는 내 글이 별로였던 모양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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