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동일 지음
‘조선여인’ 전말
-후기를 겸한 작가해설
추사 사후를 금원과 을해결사의 시대라고 한다면 그 기간은 안동 김씨의 갑질이 극성을 부리던 시기였다. 그런 갑질을 종식한 것이 바로 대원군의 집권이다.
그 집권이 우연히 행운으로 찾아 온 것이 아니다.
그 지난한 과정이 바로 이 소설이다. 하지만 알다시피 대원군의 개혁도 한계가 많았고 그나마도 실패했다. 을해결사의 좌절이기도 하다. 실패와 좌절은 알다시피 끝 모를 데 까지 가 망국과 식민 침탈로 이어졌다.
그래서 을해결사는 지금도 우리 속에 살아 있다는 것이 나의 확신이다. 최소한 그 정신만이라도 내려오고 있다고 믿는 것이다.
을해결사야 말로 면면히 내려온 을들의 마음속 믿음이었고 종국의 승리결사인 것이다.
을해결사가 역사의 고비마다 백성, 민초, 민중 한마디로 을의 편에 서서 변혁의 지렛대 역할을 했다는 가설을 설득력 있게 그려내려 했던 것이 바로 이 소설이다.
전형적인 토사구팽으로 배신당하고 버림받은 금원의 산으로 들어가 절치부심 때를 기다리지만 이미 조선이라는 해는 서산을 넘어가는 형국 이었다.
김금원은 1864년 겨울 동사지에 꾸려져 있던 요사채들에 불을 지르고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때를 기다리며 실력을 기르고 있었지만 상황은 금원과 청계의 뜻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대원군의 개혁정치가 빛을 바래기 시작한 것이 경복궁을 중건 하면서 부터였다. 일찍이 금원이 관악산에서 걱정했던 일이 그대로 벌어진 것이다. 그래도 을해결사는 나서지 않았다. 결사는 앞장서서 일을 만드는 결사가 아니라 뒤에서 일을 돕는 결사라는 강령에 맞춰 그림자 조직으로서의 활동을 했던 것으로 여겨 지게끔 하는 나름의 안배였다.
조 대비는 고종 27년인 1890년 까지 살았고 흥선 대원군은 8년을 더 살아 1898년에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그들은 권좌에서 내려오면서 급격히 힘을 잃었고 흥선군의 경우 을미사변 직후와 임오군란 직후에 잠시 다시 정치 무대 전면에 서기도 했지만 말 그대로 잠시였고 서슬이 전만 같지 못했다.
내가 그린 그림은 금원이 1880년대에 동사로 돌아와 기와집을 짓고 후학을 양성했고 70여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그때 그녀가 을해결사의 중추로서 새로 지었던 요사채의 기와가 내가 본 동사지의 기와 무더기가 아닐까 싶다.
을해결사가 현대에 이르기까지 그 정신이 면면히 유지 되고 있다면 오랜 은인자중의 시간을 보냈다는 얘기다. 조선이 멸망하고 일제 치하를 견디고 이념의 갈등과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으면 서도 그 명맥을 유지 했다는 얘기다. 명맥을 ,유지하기 위한 그 기반을 닦은 이가 바로 금원이었다고 여기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이필제에 주목을 할 필요가 있다.
관심 있는 독자들은 벌써 알고 있겠지만 이필제라는 이름은 역사속의 실제 인물이다.
이필제는 1869년 진천작변 1870년 진주작변 1871년 영해란 조령의 난 등 무려 6번의 민란을 주도한 인물이다. 한마디로 말해 그는 그 시절 보기 드문 우리나라 최초의 직업 혁명가였던 셈이다, 그의 출신이며 행적 일화들은 거의 알려져 있지 못하다. 역사 속에 그에 대한 기록은 취조기록인 공초로만 남아 있다. 1869년 무렵과 그 이후의 행적만이 남아 있다는 얘기다.
소설 내적으로 말하면 그는 조대비 대원군이 보낸 살수들의 충주 달래강 습격 때 죽지 않았다. 그래서 강물로 던져 졌다는 극적 장치를 동원했던 것이다.
공초를 보면 그는 탁월한 설득력과 친화력 그리고 리더십을 보였던 인물이었다. 그는 우선 한 지방에 잠입을 하면 언제나 자신과 뜻을 함께 할 인물을 찾았고 그 지방에서 가장 덕망이 높은 인물을 알아내어 기어코 그를 자신의 동조자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는 격정적인 태도로 나라의 현실과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제해야 한다는 명분을 들어 상대방의 마음을 휘어잡았다.
그럼에도 그의 거사가 영해지방에서만 성공한 이유는 민초들, 을들의 호응이 크지 않았기 때문이다. 힘께나 쓴다는 명망가 중심으로 동도들을 모았기 때문이다. 영해에서 성공 할 수 있었던 것은 동학도들의 꽤 큰 규모의 참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영해의 거사가 성공 했다 하더라도 이틀 천하에 지나지 않았다. 성을 지키고 고을을 다스릴 준비까지는 이르지 못했던 것이다.
이들은 성중을 손아귀에 넣고 곳간에 보관된 쌀과 이방에 보관된 돈 궤짝을 부수어서 동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얼마간은 경비로 지출했다. 그들은 민간에서 밥이나 술을 가져가 면서 꼭 돈을 지급했다. 이들은 하룻 밤 동안 마음껏 호기를 부린 뒤에 다음날 낮 부중에서 물러 나왔다. 관군이 오기 전에 스스로 물러간 것이다. 이들 부대는 영양 쪽으로 달아나면서 악질 토호의 집에 불을 지르기도 했다.
이필제는 자신이 체포되어 처형당하는 1871년 말까지 문경 등지에서 2번에 걸쳐 봉기를 더 주도 했다. 필제는 1871년 여름 문경 조령에서 또 한번의 민요를 획책하다 밀고가 들어가 그만 추포되고 만다.
이필제는 문경관아에서 처음에는 이름을 바꾸어 둘러 댔지만 다른 연루자들의 실토로 이필제라는 게 드러났다. 그렇게 20여 년 동안 충청 · 전라 · 경상 · 강원도를 누비며 신출귀몰한 수법으로 몸을 날리던 이필제가 문경 거리에서 끝내 죄인의 몸이 되었다.
의금부에서는 이들을 문초하기 위해 추국청을 벌였다. 이들을 심문한 문사낭청은 훗날 친일파가 되어 나라를 팔아먹은 박정양 이었고, 이들의 죄상을 기록한 자는 뒷날 고부군수로 있을 때 전봉준의 봉기를 일어나게 한 조병갑이었다.
이필제의 문초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름을 이리저리 바꾸고 종적을 날려 숨겨서 도당(떼를 지은 무리를 얕잡은 말)을 긁어모아 난을 일으키려 한 것은 무슨 심보인가? 한 번 굴러서 호중(湖中, 오늘날의 충청북도를 가리킴)을 선동했고, 두 번 굴러서 영남에서 옥을 일으켰으며 영해에까지 손을 뻗쳐 변란을 일으켰으니 지극히 끔찍하다. 또 조령에서 도둑 무리를 매복시켜 흉측한 계획을 품었다가 죄악이 꽉 차서 저절로 잡혀 온 것이라, 밝은 천도 아래 어찌 감히 속이랴. 지금 엄한 심문 아래 앞뒤 역적질한 사정을 사실대로 아뢰어라.”
그러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천하에 진정(眞情) 없는 일이 없고, 일 없는 죄도 없다. 나의 정실(情實)에는 죄가 세 가지인데 조목에 따라 하나하나 물어보라. 나는 거리낄 것 없으며 천하 대산 심해에 떳떳하노라.”
그는 끝내 47세의 나이로 군기시 앞에서 모반대역죄로 죽음을 당했고, 그의 팔다리는 찢겨져 남해 하동 등지에 본보기로 걸렸다. 이필제의 활약은 이제 막을 내린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봉기를 꿈꾸는 자들에게 홍경래의 이름과 함께 신화처럼 전해져 왔다.
필자는 이같은 후일의 역사적 사실 때문에 이 필제를 을해 결사의 맹원이 아닌 것으로 처리 해야 했다. 하지만 이필제의 정혁 정신도 우리 을들의 정신 속에 면면히 살아 숨 쉬고 있다는 믿음이다.
을은 특별한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평범하고 약한 존재다. 하지만 을들이 한번 화나서 뭉치면 그 어떤 갑도 당해내지 못한다. 또 엄밀히 따지면 우리는 누구에 대해서는 을이지만 누군가 에게는 갑이기도 하다. 부처와 예수는 이 땅의 을들 때문에 이땅에 왔다고 누누히 외치고 있다.
을처럼 생각하고 을처럼 살아가는 이는 모두 을이다. 때리는 자의 편에 서지 않고 기꺼이 같이 맞기를 주저하지 않는 이가 을이다. 이 땅의 을들이여 영원하라.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