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동일 지음
조선여인 전말
-후기를 겸한 작가해설
그러던 차 추사의 인척이 되는 김금원이라는 빼어난 여류가 홀연 내 앞에 나타났다.
정확히 말하면 추사의 훈향으로 세상을 풍미한 여류 금원의 놀라운 발자취를 만난 것이다. 추사에게는 김덕희라는 규장각 학사 출신 명민한 6촌 동생이 있었다. 추사의 가계는 그 시절로서는 단출해서 6촌이라도 매우 가깝고 절친했다. 제주 유배에서 돌아온 추사에게 용산(한양 한강변) 거처를 마련해 준 이다. 덕희에게는 기생 후실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김금원이다. ‘호동서락기’라는 멋진 시집을 펴낸 조선후기의 대표적 여류시인 그녀다. 시대의 질곡과 성차별 그리고 신분질서에 맞섰던 그녀다.
추사가 서울로 돌아온 무렵 금원은 남편의 후원으로 용산강가에 서호정이라는 정자를 세우고 여류 시회를 갖고 있었다.
나는 분명히 추사와 그녀가 만났으리라 본다. 금원은 추사를 몽매토록 사숙했던 예인이다. 원주 기방을 찾았던 덕희에게 유난스럽게 다가서 마침내는 건너방을 차지했던 까닭도 덕희가 추사의 동생이었다는 점에서 였다.
현존하는 기록에는 추사가 과천 과지초당 시절, 세상을 떠난 남편 덕희를 추모해 금원이 지은 제망부가를 보고 금원의 문재를 극찬 했다는 후일의 일만 있지만 같은 시기 같은 장소에 있었던 두 걸출한 예인이 자리를 함께 하지 않았을 리 없다.
추사의 대표적 위작 이라고도 하는 ‘일독 이 호색…’ 이 휘호는 덕희가 자신의 별장 서호정에 추사를 초빙해 작은 술상을 차려 대접하고 금원을 인사 시킨 날 그날 밤 거처로 돌아온 추사가 거나한 김에 쓰지 않았나 싶다. 이는 전적으로 내 상상이다.
두 사람이 만난다. 무슨 얘기와 감정의 교류가 오갈까.
두 빼어난 예인의 학문과 재주가 한꺼번에 쏟아지지 않겠는가. 처음에는 두 사람의 교유와 대화를 통해 그것들을 그려내고 싶었다. 추사가 생각하는 유학이며 실학 그리고 서화와 시에 대한 생각을 금원이 묻고 추사가 답하는 그런 형식으로…
그런데 그것만이 아니었다. 두 사람의 만남은 학문과 예술의 시너지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큰 무엇이 있지 않을까 싶었다. 갑질을 싫어하는 추사와 남녀차별 신분 질서에 항거했던 김금원, 어차피 상상의 나래를 펼 바에는 두 빼어난 예인의 만남을 근대사로 이어지는 19세기의 일대 사변으로 만들면 어떨까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추사는 1857년 나이 70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 무렵부터 금앵, 김금원의 행적도 아무런 기록이 없다. 그녀는 1817년 생, 추사가 세상을 떠났을 때, 정확히 마흔이었다.
아무리 그 시절이라 해도 연부역강한 나이다. 당당했던, 재주 많았던 그녀가 그냥 스러져 갔을 리 없다는 것이 내 생각 이다.
그러던 차 그녀의 것 일 수도 있는 흔적과 자취를 발견 하게 된다. 바로 하남 춘궁동에 있는 동사라는 절 에서였다.
하남 초입에 있는 춘궁동.
올림픽공원이 있는 한체대 사거리에서 서하남 IC를 지나 널바위(광암)고개를 넘으면 바로 나오는 동네가 하남시 춘궁동이다. 물론 이곳도 예전에는 경기도 광주였다.
널다리 언덕길을 좌우로 이런저런 음식점들이 들어서 있다. 저마다 길가에 입간판이며 풍선간판을 세워 놓아 손님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많은 안내 표지 가운데 눈에 띄는 안내판이 있다. 언덕 초입에도 하나 있고 언덕 절반쯤 내려왔을 때 오른편에서도 만나게 된다. 바로 ‘동사지(桐社祉)‘라고 쓰여 있는 안내판이다. 절 이름 치고는 뭔가 부족한 듯 한 동사. 거기다 지(祉)라는 접미사는 무슨 뜻인가. 절터만 남았다는 이야기 인가. 그리고 더 눈길을 끄는 것은 바로 밑에 쓰여 있는 ‘국가 지정 보물 3,5층 석탑’이라는 문구다.
안내판의 안내를 따라 고골 저수지가 쪽으로 들어가 다시 오른쪽으로 얼마간 들어가면 동사지가 나온다. 안내대로 두개의 오래된 돌탑이 자태를 뽐내고 있다.
고색창연 하면서도 우람한 자태가 보는 이의 경탄을 자아내게 한다. 내 경우에는 주변의 나무숲과 어울린 경치며 분위기에서 아련한 기시감까지 느꼈다.
국가 보물로 지정된 5층 석탑과 3층 석탑이다. 신라의 양식을 답습한 고려초기의 양식이라고 안내판에 소개돼 있다. 무려 천 년 전에 조성된 탑들이라는 얘기다.
사람을 압도하는 그 힘과 멋에 빠져 한참을 탑 앞에 서 있다가 주변을 돌아보면서 절을 찾게 된다.
하지만 정작 절은 탑과 어울리지 않게 초라했다. 오른편 쪽에 작은 법당 건물이 있기는 했다. 기와가 얹어 있고 단청도 돼 있기는 한데 그 추녀 밑으로 슬레이트 지붕을 얹어 건물크기를 넓힌 통에 묘한 모습이다. 한 눈에도 근래에 급히 지은 요사채라는 느낌이 든다. 공양간이라고 쓰여 있는 법당 바로 앞 요사채는 진짜 가건물이다,
저 멋진 탑을 두 개나 가지고 있는 절이 어떻게 된 일일까. 일대 광활한 부지 3천 평방미터 가 문화재 보존 구역으로 설정돼 있다는 하남시와 문화재청의 표지가 서너 군데 설치돼 있지만 절에 대한 설명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동사지 라고 하는 모양이다. 절이 있었던 터라는 뜻이다.
나는 백방으로 동사에 대해 알아보기로 했다.
동사지 전체가 사적 231호 라면서도 이에 대한 기록은 전무 했다. 문화재청 에서도 하남 시 에서도 그리고 인터넷에서도 동사 절에 대해서는 그 어떤 설명도 찾을 수 없었다. 모든 기록이 절실 돼 있기 때문이다.
그럴 수 있을까, 이토록 큰 규모의 사찰에 대한 기록이 하나도 없다는 것에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가까스로 기록하나를 찾아냈다. 동국대학교 박물관의 기록이었다. 80년대 후반 불교 종립학교인 동국대학교에서 박물관을 중심으로 특별 탐사팀을 구성해 이 동사지 발굴에 나섰단다. 그때 이런저런 탐사와 발굴이 이루어졌던 모양이다. 각 건물들의 주춧돌이며 기둥의 편린, 기와며 막새 등 다수의 유구가 발굴 됐다고 했다.
기와에는 ‘동사(桐寺)’, ‘신유광주동사(辛酉廣州桐寺)’, ‘흥국삼년(興國三年)’ 등 명문이 새겨져 있었다. 기와의 무늬와 질은 고려 초기의 것으로 보이며 명문으로 미루어볼 때 광종 대(949∼975)에서 경종 대(975∼981)에 걸쳐 창건 또는 중창된 것으로 추정된단다.
노출된 금당(金堂)터와 주춧돌의 크기와 배치로 미루어 로 보아 대웅전의 규모는 황룡사에 버금가는 거대한 규모로 추정된다고 했다.
발굴팀 보고서 역시, 다른 문헌에 동사라는 절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지 않아 이 절에 대한 내력은 알 수 없다는 점이 아쉽다고 밝히고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