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46 F
New York
September 20, 2024
hinykorea
연재소설

<장편소설> ‘조선여인 금원’ 연재 96회

 안 동일 지음

 색즉시공 공즉시색

변광원 대감이나 박규수 대감 등 보안재 양반 식구들은 별 탈이 없는 것 같았다. 하긴 그들은 결사 식구가 아니었다. 그래서 이 순간 그이들에게 편을 들어 달라는 것은 같이 불구덩이에 뛰어들자는 얘기 밖에 안됐다. 때문에 그쪽을 어렵게 하지 않기로 했다.

조대비와 흥선군, 그리고 양반네들이 모르고 있는 일이 있었다. 저들은 이 나라가 자신들의 나라라고, 이 땅이 자신들의 땅 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결코 그렇지 않았다. 조선이 건국한지 4백여년 동안, 아니 고조선과 삼한 이래 이 땅의 진짜 주인은 한 번도 바뀐 적이 없는데 저들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호의호식 한다고, 호통치고 호령하는 목소리가 크다고 해서 이 땅이 그들을 주인으로 받아들인 적이 없었다. 주인은 따로 있었다. 땅을 가꾸고 땅을 일구는, 땅에서 땀을 쏟는 그런 주인이 따로 있었다. 땅은 그런 땀 흘리는 사람을 받아 들였다.
그래서 필제가 얘기했고 용호단 청년들이 되뇌었던 ‘우리의 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하다’는 말은 헛말이 아니었다. 그런 산과 땅이 있기 때문이다.

만물상을 바라보는 금원의 눈에 동사 입구의 불가사리가 들어 왔다. 녹번정에도 있었던 그 불가사리였다.  돌 불가사리가 포효하며 벌린 입에서, 곧게 뻗은 코에서 그리고 형형한 눈에서 불을 활활 내뿜고 있었다.
금원은 그 불에서 지난 임술년 여름밤 흰옷을 입고 광주 감영으로 끝없이 몰려가던 백성들이 들었던 횃불을 다시 보았다. @ (대미)

<후기를 겸한 작가 해설>

원래 높은 언덕을 뜻 했다는 壟壇농단 이야말로 갑질의 끝판 왕, 첨단이 아닌가 싶다. 도저히 승복할 수 없는 자격 없는 자가 높은 곳에 올라 일삼는 갑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소설이 갖는 의미가 더 커졌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이 소설이야 말로 ‘갑에 대한 을들의 저항과 반란’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 부터 갑질 이라는 말이 유행처럼 널리 쓰이고 있다. 어감이 노골적이어서 그런지 꽤나 중독성이 있다. ‘질’ 이라는 투박하고 거친 어감이 이 땅의 많은 을(乙)들에게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던지는 모양이다. 서방질, 도둑질 할 때 쓰는 그 질이다. 미국 신문에까지 소개 됐단다.
기실 가진 자, 힘센 자의 횡포 갑질이 어제 오늘 시작된 것은 아님에도 최근 부쩍 이어지는 지적과 지탄은 그냥 당하고만 있지 않겠다는 을들의 의지와 결기가 여느 때 보다 강하다는 얘기다.

이 이야기는 우리사회의 역사적 고질병인 갑질, 그러면서 끈질기게 전개되어온 을들의 저항과 관련해 추사 김정희 선생과 그의 제자들의 생각과 활약을 그리고 있다.

몇 년 전부터 나는 추사 김정희 선생에 빠져 있다.
한마디로 말해 추사는 우리 역사의 르네상스와 같은 인물이며 초대 한류스타였다. 거기에 스스로 고단했던 그의 인생역정은 엄청난 이야기 창고이기도 하다.
추사 바라기가 되어 추사를 따라하는 나는 문득문득 추사가 살아 있다면, 추사가 다시 이 땅에 온다면 어떻게 우리의 이 현실들을 볼 것인가 생각해 보곤 한다.
한마디로 추사야 말로 갑질에 참지 못하는 인물이었다. 따져보면 추사의 일생이야 말로 갑질에 맞선 을의 고군분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당시로는 집권세력이었던 노론, 그것도 실세 벽파의 중심가문에서 태어났지만 그 기득권을 분연히 포기하고 당시로서는 ‘을’ 이었던 북학인의 길을 걷는다. 그는 알려진 실학자가운데 거의 유일한 힘 있는 가문 출신의 인사다.
그의 학문, 입고출신을 내 세웠던 그의 고증적 학문태도 역시 주류였던 성리학의 입장에서 보면 을의 반란이었다.
하지만 을로서의 그는 언제나 당당했다. 그 당당한 태도로 갑질을 규탄했고 종당에는 갑의 항복을 받아내 을의 입지를 세우곤 했다.
학자로서도 예술인으로서, 또 정치에 참여한 경세가로서도 그의 출발은 언제나 소수인 을이었다.
추사체로 대변 되는 그의 서체는 주류인 송설 조맹부의 맥을 잇는 동국진체에 반기를 들면서 시작 됐고 그의 서화 또한 형식주의가 만연하던 당시의 화단에 서권기를 담은 간결하면서도 강렬한 문인화의 기풍을 복원 진작 시키면서 호평을 받았고 종국에는 서단과 화단을 자신 류로 통일했다.
세자의 스승으로서 그는 세자를 개혁적 군주로 키우려 갖은 애를 썼고 얼마간의 성과를 보이기도 했다. 효명세자가 일찍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그의 개혁 경세의 뜻은 좌절 되고 정적들에게 호되게 당하게 되기는 했지만.
그의 옥고와 귀양살이 또한 갑질에 못 참는 그의 성정 때문이었다.
다른 어사 같았더라면 안동 김문의 일원인 사또의 비행 갑질을 적당히 눈감아 주었겠지만 그는 그렇지 않았기에 재주 유배의 근원이 됐고 노년의 북청 유배 또한 조카의 양자가 되어 임금에 오르는 조천의 불합리를 지적했기 때문이다.
그는 형식과 체면을 배격했었다. 그래서 장년의 사대부가 임금의 행차 길에 징을 치며 격쟁을 할 수 있었고 했고, 제주 귀양시절 임금이나 권세가가 글을 써달라고 하면 종이가 없다고 핑게를 댔지만 서책을 보내준 중인 역관 제자에게는 아껴둔 상급지 몇 장을 손수 이어붙혀 세한도를 그려 줬다.
국보급 서화인 불이선란도 또한 먹동인 하인 달준에게 그려준 것이다. 달준이 그 가치를 몰라 시큰둥해 하자 막 유배에서 돌아온 제자가 가로채기는 했지만…
이랬기에 언제나 을이었던 추사는 지금 와서 보면 갑이다.  (계속)

Related posts

<장편 역사소설> ‘구루의 물길’ – 제31회

안동일 기자

<장편 연재 소설> ‘구루의 물길’ -제 34회

안동일 기자

<장편소설> ‘조선여인 금원’ 연재 43회

안동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