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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장편소설> ‘조선여인 금원’ 연재 90회

 안 동일 지음

36. 파 만동묘

대원위 분부라는 깃발을 꽂은 파발과 함께 변혁의 세월이 빨리 흘렀다.
금원은 태을 스님과 백결노사와 함께 화양계곡 송시열의 서재였다는 임서재 앞 큰 바위 위에 사람들과 함께 서 있었다.
화양구곡 계곡 전체에 사람들이 가득 차 있었다. 개울의 바위 위로도 사람들이 빼곡이 올라서 있었다. 어떤 이들은 아예 바지를 걷고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만동묘 쪽으로 고개를 빼고 있었다. 초봄이라 아직 물은 찼지만 깊지는 않았다.
모두들 만동묘가 철거되는 광경을 보기위해 방방곡곡에서 몰려든 사람들이었다.
대부분 이전시대 까지 백정이라 불리던 하얀 옷의 일반 백성들, 그리고 만동묘 같이 양반네들이 세도를 부리고 강짜를 부리던 곳에서 노비 종복 노릇을 했음직한 벗은 하층민이 대부분이었지만 갓 쓰고 도포 입은 양반의 모습도 더러 보였다.

오늘 드디어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만동묘가 허물어 진다.
그 탐욕스럽던 그곳의 참봉, 묘유사, 생지관, 그리고 고지기들의 모가지가 날라 가는 날이다.
물리적으로 참수를 한다는 얘기는 아니고 그들의 근거지이자 밥줄인 만동묘가 사라진다는 얘기다. 지난 백년간 이 땅을 농단해왔던 노론 결사 만동의 아성이자 본부가 허물어 진다는 얘기다.
“사람들 정말 많이 모였습니다.”모처럼 문경에서 올라 온 필제가 말했다. 그는 이제 하릴없는 농사꾼으로 보였다. 그에게 꼭 필요했던 외유내강 소리장도의 모습이었다. 필제도 이제는 을해결사의 정식 맹원이었다.
“그러니까 민심이 천심이라고 하지 않겠소.”
“송시열이 제사 때 이만큼 모였을까요?“
”그보다 많으면 많았지 적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그때는 개울 까지 들어차지는 않았어요.“
“저들이 서원 철폐를 반대하면서 수천이 궁궐 앞에 모였다면서 우리는 그 열배 백배로 모여 민심을 보여 줘야지 그럼.”
“그만큼 이 만동묘와 화양서원이 무너지기를 백성들이 바랬다고 봐야죠.”

저 아랫 쪽에서 풍악소리가 들려온다. 놀이패 농악패들이 몰려 오는 모양이다.
“우리 두물머리 패들도 왔는가?”
태을이 금원에게 물었다.
“그럼요 덕배 아재가 총 꼭두입니다. 오늘 전국에서 모인 놀이패들이 밤새도록 놀겠답니다.”“허허 살다보니 이런 날이 오기는 오는구려.” 백결노사가 감개 무량한 어투로 말했다.
“내 살아오면서 아침이 오기를 기다렸던 밤이 많았기에 그래도 잘못 살지는 않았구나 했는데 오늘처럼 아침이 기다려지기는 실로 오랜만이었소.”

“형님도 그렇습니까? 저도 을해 결사에 가입하고 나서부터 매일 아침이 기다려 집디다. 벌써 30년입니다.”

“그동안 얼마나 애를 많이 쓰셨습니까?”

“그래요 내 동도 중에 김정호라고 지도 만드는 이가 있는데 나도 그이 만큼 이 조선 땅을 걸었던 것 같소이다.”      젊은 축에 속하는 이들이 누 노사를 존경의 눈으로 다시 보았다.

“대원이 대감 정말 정치 잘하시는 것 아닙니까?”    앞쪽에 서있던 어느 사내가 고개를 돌리면서 백결노사에게 물었다.
“누가 아니래나? 진작 이런 날이 왔어야 했는데…”

“그런데 좌상어른, 대원이 대감이 그냥 임금이 될 수는 없습니까?”

“이제는 힘들다고 봐야지.”

사내는 불만이라는 표정이다. 그만큼 흥선 대원군은 백성들한테 인기가 좋았다. 이제 집권 1년 밖에 되지 않는데도 그랬다.
개혁 군주로 꼽혔던 영조와 정조이금이 70년 세월동안 그토록 하고 싶었지만 끝내 하지 못했던 일의 절반 정도는 1년 안에 해냈거나 시작 했던 것이다. 장김은 물리적으로 구금되거나 귀양 가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조정에서 은퇴 당하거나 지방으로 전출 되면서 권세를 잃었다.

그 사이 보안재 시회가 무척 바빴다. 성원들 대부분이 조정에 의해 승차되고 중용되기도 했거니와 시중의 여론을 전하는 대원위 대감의 두뇌 노릇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 금원과 신헌이 제일 바빴고 새로 계원이 된 젊은 조성하가 열심히 땀 흘리며 뛰어 다녔다.
훈련대장으로 복귀한 신헌은 금원과 보안재의 의견을 대원위 대감에게 전하는 창구였다.
을해결사의 사람들은 여전했다. 천하를 주유하던 이는 계속 세상을 떠돌아 다녔고 농사를 짓던 이는 활기차게 농사를 지었고 상여를 메고 탈춤을 추던 이는 계속 그 일을 했다.
동사와 설악을 왕래하는 태을 스님은 다시 머리를 단정히 삭발을 했고 금원과 제자들이 지어준 다소 호사스러워진 승복을 마다 않고 입었다. 부용사는 신도가 늘어 현봉 스님의 일이 더 많아 졌다. 다들 여전했다. 다만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오늘 만동묘 철폐는 대원군 개혁정치의 본격 시동을 다시 알리는 우렁찬 축포였다. 이심전심으로 동패들이 이 역사의 현장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저 아래서 비틀어진 갓에 낡은 도포를 입은 운학 선생이 휘척 휘척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아직 철거를 담당할 충청 3주, 충주 청주 공주 감영의 군사들이 오지 않았기에 가운데 길을 터놓고 있었다. 군데군데 보은과 괴산 관아에서 나온 포졸들이 서있어 사람들을 통제하고 있었지만 여느때 처럼 고압적이지 않았다. 사뭇 달라진 모습이다.
운학선생은 암서재 앞 쪽 까지 와서 개울을 건너려는데 사람들이 많아서 헤치고 오려니 여간 힘들어 하는 게 아니다. 그래도 싫은 표정 없이 얼굴에 웃음을 띠며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마침내 군사들이 도착했다. 예전에 복주촌이 있던 계곡 입구 공터에서 기다리던 농악대가 앞장을 섰고 창 대신 몽치와 도끼 그리고 손쟁기를 메고 군사들이 열을 맞춰 구곡 가운데 길로 들어섰다.
커다란 나무둥치를 실은 큰 수레를 군사 여럿이서 끌고 올라오는 모습이 보였다.
“저건 뭡니까? 노사님.”
“저것은 공성차라고 전쟁 때 성곽과 성문을 부술 때 쓰는 일종의 전차라네, 오늘 철거에 사용할 모양이군. 한자로는 구거라고 하지 아마,”
“누군지 머리 잘 썼네, 저걸 동원하면 일도 쉽고 시간도 절약 되겠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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