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동일 지음
추사의 편지
그때는 조대비가 막 대비에 올랐을 무렵이다. 세자빈에서 왕비인 중전을 거치지 않고 대비에 오른 특수한 예였다. 하지만 대왕대비 김씨가 있어 어른으로서의 역할은 할 수 없었다.
“이것은 무엇인가?”
“펴 보십시오.”
“탁본 아닌가?”
“예 그렇습니다.”
조대비는 돋보기를 꺼내 끼고는 탁본을 펼쳤다.
“가만히 보자.‘이것은 신라 진흥대왕 순수비이다. 정축년[丁丑] 6월 8일 김정희와 조인영이 와서 상세하게 살펴보았는데, 남아 있는 글자가 68자였다’고 쓰여 있는 것 아닌가?”
“맞습니다, 추사대감과 조인영 대감이 순수비 옆면 하단에 직접 새겨 놓으신 글입니다.”
“뭐라, 그 귀한 유물에 글을 새기셨다고?”
“예 말하자면 문화재를 훼손 하신거죠.”
“그 젊잖은 양반들이 쭈그리고 앉아서 바위에 정을 직접 쪼으셨단 말이지?”
“아마 그러셨을 겝니다. 그때 하인들 데리고 가시지 않았다고 하더이다.”
그랬다. 추사와 우석은 북한산 정상에 있던 오래된 비석이 신라 진흥왕이 세운 순수비였음을 밝혀냈다. 이때 두 사람의 기쁨은 대단했던 모양이다. 추사와 우석은 1천여 년 전에 세운 비석에 당신들 이름을 새기는 데 망설이거나 조심스럽지 않았을까. 후대 사람들이 몰라볼까봐 염려하는 마음이 더 컸던 모양이다.
“이것은 무엇인가? 언문이네.“
사실 오늘 대비에게 꼭 보여 주고 싶은 것이 그것이었다.
‘한번 읽어 보시지요.마마, 추사 대감이 북청에 있을 때 흥선군에게 보낸 서찰입니다.“
“흥선군에게?”
“추사의 유물 상자에서 나온 것으로 보아 초안인지 아니면 써놓고 전달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언문 편지는 ‘외씨 마누라 흥선전’ 이라는 제목으로 귀히 될 몸이니 은인자중 하라는 신신 당부였다. 대비는 그 글을 읽고 한참을 생각 하는 눈치였다. 그러더니 금원에게 그 서한을 자신이 가져도 되겠냐고 했다.
금원은 흥선의 난 그림 하나를 대비에게 보였다.
“이 그림이 정말 흥선 그이가 그린 그림이라는 말이더냐?”
“네 그렇습니다.”
대비의 눈이 휘둥그래져 있었다.
“대비마마 몇 번 말씀드렸지만 흥선군은 비상한 인재 이옵니다.”
“그래 그렇지 않아도 우리 성하도 그 얘기를 자꾸 하던데 그럼 한번 만나 보도록 할까, 금원 자네가 날을 잡도록 하게나.”
“예 마마.”
일은 이렇게 진전이 되어갔다.
30. 청주성 감옥
장헌성과 함께 떠들레하게 녹번정을 나서던 필제의 모습이 너무 들떠있는 것 같아 어째 불안불안 하다 했더니 그예 일이 터지고 말았다. 어쩌면 한번쯤은 겪어야 될 일이었다. 그런 일이 여지껏 안 일어 났던게 오히려 신기했는지도 모른다.
필제의 동무이기도 한 희연이 녹번정으로 달려와 급한 변고를 전했다. 혹시 김성순을 척살했는가 싶었는데 그보다 더 험한일이었다. 필제가 충주부 관아에 끌려 갔다는 것이다. 그것도 작변을 꾀하려다 고변되어 잡혀 갔다는 얘기였다. 당초 진천현으로 고변이 되었는데 사안이 중대하다 해서 충주부로 이첩돼 그곳 옥사에 갇혀 있단다.
한양에 다녀간지 한달도 채 되지 않았는데 이런 변고가 일어난 것이다.
자칫 역모 사건으로 비화 된다면 불똥이 어디까지 튈지 모르는 엄청난 불상사중의 불상사였다. 가뜩이나 지난해 들불처럼 번졌던 민요의 폭풍에 놀랐던 조정과 장김이 일을 더 크게 부풀려 전세역전의 기회로 삼으려 할 가능성도 있었다.
어찌됐건 진상과 자초지종을 알아보는 일이 먼저였지만 금원 혼자서 어찌 해볼 도리가 없어 보안재 노장들에게 전언을 넣었고 동사의 태을 스님에게도 사람을 보냈다.
변광운 대감이 제일먼저 득달같이 달려 왔고 환재 대감과 우선 대감, 흥선군 석파까지 늦은 시각에 녹번정에 달려 왔다.
사실 변대감을 제외하고 보안재 식구들은 필제가 무엇을 하고 다녔는지 자세히 몰랐다.
“무어 큰일이야 있겠습니까?”
“항상 불만에 가득 차 있는 필제 청년이 경향세족들 크게 욕하다가 잡혀간 것이겠지요.”
이렇게들 한가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