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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ptember 20,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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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장편소설> ‘조선여인 금원’ 연재 77회

 안 동일 지음

 임술의 함성

부녀자 들의 모습도 많이 눈에 띄었다. 쇠스랑도 없었고 죽창도 없었다. 대신 상두군들은 북과 징을 들고 있었다. 그날은 오포 장날이기도 했기 좌전을 열었던 장꾼들도 봇짐을 맨 채 행렬에 가담했다.
장관이었다. 보름으로 가는 밤이었기에 달이 밝아 사람들의 때국에 절었을 흰옷이 반짝였고 군데군데 청년들이 횃불을 들고 있어 행렬이 더 장엄해 보였다. 민심은 천심이었다.
불타거나 부수고 때리는 폭력이 없었다, 횃불을 든 상두군들이 징을 치며 북을 울리며 동헌으로 몰려가자 부사가 나서 싹싹 빌며 폐정의 시정을 약속했다. 주동자 색출도 없었고 처벌도 없었다. 동헌으로 몰려간 초군이 모두 주동자였기 때문이었다.
진주를 위시해 민요가 크게 일어났던 곳에서 주동자들은 처벌을 받아야 했다. 처벌도 약한 것이 아니라 참형, 참수였다. 박규수대감 같이 목민을 아는 안핵사도 진주에서 9명을 참수했다.

“뭐야 또 민란이라고?”

“장흥 이랍니다.
“무슨 말이야 또 작변이라니.”
“이번에는 경기도 광주랍니다.”“이번에는 어디라고?”
“황해도 황주랍니다,”
“아이고 이러다 우리백성들 다 죽겠구나.“심약한 임금은 자리에 누운 채 울부짖었다. 일어날 기력도 없었다.
장김 무리들은 서로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며 전전 긍긍 해야 했다.
그런데 저들에게는 더 신경쓰이고 충격을 주는 일이 있었다. 바로 자신들이 그토록 자랑하던 정예 자경단이 아무런 힘을 못쓰고 있다는 것이었다, 진주에도 익산에도 한다하는 서원이 있었기에 규모 있는 자경단이 있었다. 위세가 등등한 자경단이었는데 그저 서원 대문 앞에 무기를 들고 서 있어 초군이 들어오는 것을 막았을 뿐…그뿐이 아니었다. 실은 급속도로 전국의 자경단이 와해되고 있었다.
자경단의 급작스런 몰락의 배경에는 필제의 일죽계의 역할이 컸다. 필제는 물 만난 고기처럼 동에서 번쩍 서에서 번쩍 하면서 눈부신 활약을 보이고 있었는데 무엇보다 괄목할일은 그와 정예 선달들이 양주 석실의 자경단 총본부를 급습해 자경 통문계 문서를 불태웠던 것이다. 그 문서는 일반 자경단원들에게는 노비문서나 다름없는 불공정 계약서였다.
땅에서 죽은 것은 장김과 자경단의 기세였다.
“서원 자경단이 거의 허물어져 있습니다. 저들이 말하는 새경을 제대로 지불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죠.”
“자경단 자체의 수입이 딱 끊겼습니다. 장리환곡도 그렇고 또 복주촌 세 걷는 일도 그렇고 뜻대로 되는 일이 없습니다.”
희연이 녹번정에 와서 해준 말이다.
재미있게도 필제는 명일당 일죽계 동무 서넛과 함께 전국을 주유 하면서 자경단의 검객들에개 비무를 신청한단다.
“가뜩이나 사기가 떨어져 죽을 맛인데 뜬금없이 대문 앞에서 비무를 청하는데 고수들은 다 떠났지, 저들도 환장할 노릇 일겝니다.”

임술년 민요의 불길이 장김을 더 심정적으로 괴롭게 한 것은 자신들의 독재 통치를 쉽게 하려고 공들여 새롭게 조직화 했던 오가작통과 향촌계가 오히려 비수가 되어 자신들의 가슴으로 돌아온 그런 상황이다. 임술년 민요의 대부분은 향촌계가 주동이 됐고 향약의 계주 혹은 꼭두가 주동자였다. 성난 농민 초군과 상군들은 주로 밤에 횃불을 들고 관아로 몰려갔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은 죄 지은게 있는 자들에게는 화탕 지옥의 불 처럼 보이기 마련이다.

너희는 백성의 적이다.
부끄럼도 양심도 없는 너희는 악귀다.
굶주린 사람의 한이 사무친다

백성의 숟가락을 녹여 제 화로를 만드는 놈들
그 화로를 뒤엎어 잘난 네 탐욕을 불사르겠노라
공자를 외치다 맹자를 말하다 송자를 외우다 도둑이 된 놈들
씨가 빠질 놈들 너의 붓대로 너의 허위를 찔러 주마

우리는 이제 잃을게 없다.
땅을 뺏을 것이냐 쌀을 뺏을 것인가
우리는 성났지만 웃으며 간다.
얻을 건 새 세상이요 잃을 건 하나도 없다.

그 해 동짓달에 함경도 함흥에서 민요가 발생하기 까지 임술년 농민봉기는 경상도에서 15차례, 전라도에서 8차례, 충청도에서 9차례, 경기, 황해, 함경도에서 각각 1차례씩 일어났다.

시간은 계속 흘렀고 산 사람은 살았다. 동사도 부용사도 다시 옛 모습을 되찾았다. 아니 전보다 더 북적였고 상대적으로 활기가 넘쳤났다.
민요가 들불처럼 번지던 임술년 일년 내내 다들 바빴지만 태을스님이 제일 바빴다.
스님은 민요가 일어난 곳을 거의 빠지지 않고 방문했다. 뒷수습이 어떻게 되어가는가 살피기 위해서라고 했다. 더러는 현봉이나 백결노사와 함께 가기도 했지만 대대는 동자승 인주 한사람만 대동하고 방방곡곡을 주유했다.
인주는 스님이 조선 팔도의 지리지를 쓰고 있다고 했다.
“금원이 자네 아는가? 이번 민요에 목숨을 잃은 사람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
“기백은 되겠지요.”
“아닐세 그보다 훨씬 적다네.”그랬다. 임술년 민란 때 인명피해가 거의 없었다. 전국에서 발생한 소요로 숨진 목숨은 설흔명 이었다. 대부분 민란 초반기 때 악질 아전들이었다.
참으로 착한 백성들 아닌가. 세상에 어느 민란이 그 정도의 인명만 살상하고 끝낸단 말인가. 홍경래의 난 때는 효수된 농민군만 3천에 기까왔고 이인좌의 난 때도 2천에 가까운 정부군 관군과 반란군의 사망이 있었다.
수습책 하나로 조정에서 삼정의 개혁을 위한 이정청(釐整廳)을 설치하겠다며 삼정이정절목을 공포했을 때 편조스님 신돈의 전민변정도감을 생각 하면서 감회가 새롭다며 은근히 기대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조정의 수습책은 아무리 봐도 조삼모사의 미봉책이었다.
전혀 개선이 이루어지지 않자 계해년 정월에는 제주도에서 또 민요가 일어났다.
추사가 귀양살이를 했던 대정현에서 시작돼 제주 전역으로 번빈 민요 였다. 추사에게 천자문과 동몽선습을 배웠던 서당 아이들이 주동한 작변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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