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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ptember 20,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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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장편소설> ‘조선여인 금원’ 연재 56회

 안 동일 지음

 배론의 파란눈 선비들
 "예배가 끝나고 공식(共食) 시간에 따뜻한 국밥을 손수 날라오면서면서 자매님 드시지요 하셨던 진사 어르신들의 그 따듯한  눈빛을 배반 할 수 없습니다. 죽여 주십시요."

옹기구이는 생계를 유지하는 수단이기도 하지만 감시의 눈을 피해 토굴 속에서 신앙을 지키는 데 안성맞춤이기도 했다. 또 구워 낸 옹기를 머리에 이거나 등에 지고 나서면 아무 집이나 허물없이 드나들 수 있어 잃은 가족을 수소문하거나 교회 소식을 전하는 데에도 편리했다.
계곡 입구에 초막 두 채가 지어져 있었다. 일종의 경계 초소인 모양이다. 항상 그런지는 몰라도 여나문살 난 소년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엄청난 박해를 수차례 받고 난 뼈저린 경험에서 나온 자구책일 터였다.
필제는 어디서 구했는지 기해일기라는 언문책을 지니고 있었다. 천주교인들이 기해박해 때의 전말과 희생자들의 명단과 사연을 적은 기록물이었다. 그 안에 필제 부친의 이름은 없었다.

기해년인 1839년에 일어난 기해박해는 어찌보면 시파(時派)인 안동김씨의 세도를 빼앗기 위해 벽파(僻派) 풍양 조씨가 일으킨 정치적 사변이라고 보는 시각도 만만치 않다. 서세동점의 시기에 국체를 보존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우기는 했다.
하지만 아무 지은 죄 없는 백성의 목숨을 부지기수로 끊어 가면서 벌이는 정권다툼은 야수의 일 이었고 야만의 일이었다. 정권 내에서도 조당에서도 당연히 반발이 있었다.

실제 시파인 안동 김씨는 천주교를 원수처럼 미워하는 벽파와는 달리 비교적 관용적이어서 헌종 초기만 해도 천주교에 대해 개의치 않으려 했던 것이 사실이다.
장김의 세도정치를 연 김조순이 1832년 4월에 세상을 떠나자 세도는 그의 장남 유근 에게 돌아갔다. 2년 뒤 1834년 11월, 헌종이 8세로 왕위에 오른다. 순원 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면서 그의 오라버니 유근의 권세는 더 높아진다.
김유근은 후일 병석에서였기는 했지만 자신이 세례를 받을 만큼 천주교에 우호적이었다.
이같은 천주교에 대한 관대한 분위기로 말미암아 조선 교회는 교황에 의해 조선대목구로 설정 됐고 1836에는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신부 3명(피에르 모방, 자크 샤스탕, 주교 조제프 앵베르)이 직접 파견되는 등 교세가 회복되고 신도는 증가일로에 서 있었다.
그런데 김유근이 1836년 말, 병을 얻어 은퇴 하면서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던 풍양 조씨를 비롯, 반 안김 세력들에게 기회를 제공한다.
정권은 영의정 조인영을 필두로 하는 풍양조씨와 우의정 이지연을 대표로 하는 반 안김 쪽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특히 이지연은 개인적으로 천주교를 몹시 적대시하는 인물로 ‘대왕대비를 비롯 안동 김문이 나라의 공적 천주교도들에게 관대해 나라의 기강을 흔들었다’는 여론을 일으키고 공론화시켜 천주교도 탄압에 나섰다.
기해년 3월, 이지연은 천주교도 소탕책을 김 대왕대비에게 적극 간언했다.
그 내용은, ‘천주교인은 ‘무부무군’(無父無君)하는 ‘역적’(逆賊)들 이기에 좌우포장(左右捕長)에게 명해 조사와 시찰을 강화해 체포 추국하게 하며, 형조에서는 신속하게 재판을 하여 뉘우치지 못하는 자를 처형해야 하며, 한성과 지방에 공문(公文)을 보내 다시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엄하게 세워 빠져나가는 사람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대왕대비는 반김 연합의 압력에 의해 이 박해령에 수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감옥은 교인들로 가득 차게 되었다. 그런데 당시 형조판서 조병현은 그나마 양식이 있는 이였다. 그는 처형을 미루면서 배교를 회유했다.
“김막례, 너는 이제 겨우 스물을 넘긴 젖먹이 엄마가 아니더냐, 글도 깨치지 못한 네가 무얼 안다고 그리 고집을 부리느냐, 천주라는 귀신을 믿지 않겠다고 한 마디만 하거라, 퉁퉁불은 네 젖을 어서 아기에게 먹여야 하지 않겠느냐?”
하지만 여신도는 완강했다. 그녀의 신심과 교회에 대한 의리는 목숨보다 깊었다. 교회에 가면 그 지긋지긋한 차별이 없었다. 다 형제요 자매였던 것이다.
“그럴 순 없사옵니다. 영감.”

“어찌 그런단 말이냐?”

“예배가 끝나고 공식(共食) 시간에 따뜻한 국밥을 손수 날라오면서면서 자매님 드시지요 하셨던 진사 어르신들의 그 따듯한  눈빛을 배반 할 수 없습니다. 죽여 주십시요.”

석방이든 처형이든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윗선은 가혹한 참형을 명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 까지만 해도 참형된 인원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형조의 기록에 의하면, 포청에서 형조로 이송된 천주교도가 그해 3월말 도합 43명인데 그 중 31명이 배교 했다하여 석방됐고, 12명만이 끝내 신앙을 지켜 참수(斬首)된 것으로 집계돼 있다.
그때 조판서는 끝판에 신도들이 “알았습니다 영감, 조상 제사는 지내겠습니다.”고 하면 배교로 인정해 줬단다.

계곡 안으로 한참을 들어가자 초가집 두 채가 나타났다. 말은 계곡입구 초가의 동자에게 맡겨두고 두 사람은 걸어오는 길었다.
한 채는 개울가에 정자 형식으로 지어져 있었고 한 채는 동산을 뒤로 해서 크게 지어져 있었다. 그 초가가 신학당으로 쓰여지는 집 같았다.
연락을 받았는지 초로의 장주기 선비가 나와 있었다. 막 중년에 접어든 여신도와 함께였다.
“어서 오십시오, 오랜만입니다. 험한 길 찾아오시느라 애쓰셨습니다. ”
장선비와 여신도는 농부의 차림이었다.
장선비는 태을스님과 친분이 있는 사이였고 금원도 몇 번 발치서 인사를 한 적이 있었다,

큰 초가에서 수업을 하고 있는지 장교사의 말소리는 작았고 태도도 조심스러웠다.
그의 안내로 초막으로 들었다. 벽에 십자가가 걸려 있을 뿐 아무런 장식도 없었다. 콩기름 먹인 나무 괘짝 하나가 있었고 바닥에는 깨끗한 사각 멍석이 깔려 있었다.
장선비는 자리에 앉자 성호를 긋고 기도를 올렸다. 속으로 하는 기도였다. 금원과 필제는 가만히 앉아있기만 했다. 서로 간 소개와 태을당 이며 아는 이들에 대한 안부 인사가 이어졌다. 장교사와 함께 나온 여신도는 그를 돕고 있는 루씨아라고 했다.
“그래, 이렇게 험한 산골까지 어려운 걸음을 하신 까닭이 있으실텐데?” 장선비가 용건을 물어왔다.
“안성 객사리 향교일과 관련해서 확인 할 일도 있고 해서…”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필제가 입을 열었다.
“선비님, 혹시 진천의 이종원이라는 이름 기억 하십니까?”예상했던 대로 장교사는 기억에 없다고 했다. 필제가 아비의 정황을 아는 대로 얘기했다. 장교사는 혀를 끌끌 차면서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을해 박해 때의 기록을 문갑에서 꺼내왔다.
기해일기와는 또 다른 기록이었다.
“춘부장과 같은 분들이 꽤 많습니다.”
장교사가 해당하는 쪽을 열었지만 역시 그곳에도 이름이 남아있지 않았다. 장교사가 자신들의 기록을 중심으로 기해년의 상황을 들려주었다. 전반부는 금원과 필제가 아는 그대로였고 후반부의 상황이 진짜 박해였다.
아무런 죄도 짓지 않았는데 천하의 악독한 죄수가 되어 참형을 당해야 하는 그런 박해. ‘천주를 믿지 않는다, 믿지 않겠다.’라고만 하면 목숨을 구 할 수 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았던 신도들…. 신앙이 무엇인지…(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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