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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ptember 20,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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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장편소설> ‘조선여인 금원’ 연재 64회

안 동일 지음
은사스님과 필제

다음날 오후 무렵이 되어 녹번정으로 돌아오니 필제가 와 있었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태을 스님 하고도 필제 얘기를 했지만 현봉하고도 꽤 오래 필제 얘기를 했다.
초롱이 친 삼촌이라도 온 것처럼 신나했다. 초롱이와 필제는 구면이 맞았다.
필제를 충청도에 두고 초롱과 한양으로 올라 오면서 자초지종을 들을 수 있었다. 쥐 수염 일유사 김유원을 손 본 사람이 필제가 맞았다. 필제가 은밀히 초롱을 찾아와 금원이 어떻게 당했는지 저간의 사정을 들었고 그 밤에 쥐 유사에게 치도곤을 안겼다는 것이다. 쥐유사 김유원은 자신의 집 앞에서 야밤에 몽둥이찜질을 당해 석달 열흘을 자리보전하고 누워야 했었다.

필제는 서북지방을 다시 돌아볼 생각이라고 했다. 홍경래 총사의 작변이 일어난 반역의 땅 그곳이다. 필제는 지난번에 그곳에 갔을 때 자신이 그 신유년 정혁의 선봉장이었던 홍총각을 닮았다고 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하면서 껄껄 웃었다. 그런 사람들도 실제 홍총각을 본 것은 아니었다. 그저 전해지는 총각장군의 풍모 때문이었다.
껄껄 웃고 있었지만 오늘따라 그가 왠지 쓸쓸해 보였다.
집도 절도 없이 저리 떠돌아 다니는 인생, 자기 말대로 불러주는 사람 없어도 가야할 곳은 너무도 많은 사람. 높은 곳을 보고 있어 아래가 허 한사람.
“왜 그리 보남유?”“오늘 따라 우리 선달님 멋지게 보여서.”
두 사람은 뒷채 정자로 자리를 옮겼다.
달이 휘영청 솟아 있었다.
금원이 먼저 애오개 김유사 일을 꺼냈다.
“아우님 마음이야 알지만 그리 무모하게 일했다는 얘기 듣고 적잖이 놀랐다네. 다시는 그러지 마시게.”“언제는 멋지게 보인다면서 또 잔소리입니까?”그때 초롱이가 다반을 들고 왔다.
다반에는 차가 아니라 술이 담겨 있었다.
“아니 얘가 왠 술을 다 가져오누?”“작은 어머니 졸랐지요. 두 분께 꼭 술 한잔 올리고 싶었습니다.”초롱은 지선을 작은어머니라 불렀다.
모처럼 만의 술이었다. 필제는 술을 못했다. 한 잔만 들어가도 얼굴이 붉어지고 가슴이 벌렁댄다고 했다. 그것은 금원이 환영해 마지않는 점이었다. 사람 만나고 감추어야 할 일이 많은 사내가 술 좋아 하면 그것은 끝장이다. 술은 실수를 부르게 마련 아닌가.

그래도 그날 밤 술은 퍽 달았다.
금원은 초롱도 한동안 자리에 함께 있으라 했다. 여인네 에게도 주도가 있는 법, 술은 남자 뿐 아니라 여자도 어른에게 배워야 했다. 초롱은 술의 폐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터였다. 화양동 복주촌에서 술 때문에 신세 망친 사람들을 지근에서 다수 목격했기 때문이다.
참 금원과 초롱의 간절한 바람인 화양 복주촌 유곽 철폐는 지난달에 이루어졌다. 김좌근의 힘이 아직 그 정도는 됐던 모양이다. 형식은 비변사가 풍기단속을 간언한 선비들의 상소를 해결한다는 형식을 취해서였다. 하지만 화양 복주촌만 철폐됐지 다른 서원들의 서원촌 색주가는 그대로였다.
어쨌든 금원과 필제는 이날만큼은 긴장을 풀고 술자리에 흥을 담았다. 필제는 세잔쯤이나 술을 마셨다. 그러더니 필제가 의외의 싯구를 읊었다.
上方明月下方燈(상방명월하방등) : 상방에는 달, 하방에는 등불
頂相應須不已登(정상응수불이등) : 정상이란 모름지기 쉼 없이 오르는 것
鍾鼎雲情非二事(종정운림비이사) : 사랑과 세상 두 가지 다른 일 아닐텐데
名山空自與殘男(명산공자여잔남) : 명산은 부질없이 남은 남자만 허여하네

이 남자 술먹으면 정신을 잃는다더니 거짓인가 보다.
“아우, 정말 세상일과 사랑이 둘이 아닌가?”“금원 누님이라면…”
대단한 고백이다.금원이 다리를 쭉 폈다. 간편하게 집에서 입는 치마였기에 짧은 틈새로 종아리가 들어났다. 필제의 눈이 휘둥그래졌다가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눈을 다른 데로 돌렸다.
“동생은 이 나이의 나를 보고도 그리 춘심이 동하는가?”“춘심이라니 당치 않소.”“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금원을 쳐다보는 눈에는 갈망이 가득했다.
‘그래 내가 요조숙녀도 아니고 아우가 출가한 스님도 아닌 바에야.’
마침 지선은 홍제촌 동무 집에 밤 마실을 가서 오늘 들어오지 않는다고 했다.
그날 밤 금원은 몇 년 동안 꽁꽁 닫혀 있던 단속곳을 풀었다. 그리고 꽁꽁 여미고 있었던 가슴을 열었다. 사내는 서툴었지만 힘이 좋았다. 하지만 자주 있을 일이 아니라고 다짐을 해 두었다.

다음날 아침 필제가 녹번정을 떠난 뒤 엇갈리듯 동사 식구인 용호단 경원 총각이 문을 두드렸다. 다른 청년 두 명과 함께 였다. 동사에서 사람이 오는 일은 좋은 일 보다는 궂은 일이 더 많았다. 이번에도 그랬다. 필제가 있었더라면 지난번 보은에서 처럼 자신이 나서야 한다고 했을 터였다.
보은에서 큰 살변이 일어나 용호단이 내려가 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청년들은 횟대검을 녹번정에 맡겨두고 있었다. 사건은 지난번 필제와 함께 징치했던 거들먹 승정대부 김가의 짓이 거의 분명했다. 자경단에 의해 향촌계 상두계원들 여럿이 다치고 죽었다는 것이다. 필제의 말대로 그런 자는 싹을 잘랐어야 했는지도 몰랐다.
그런데 올라온 지재에 의하면 청국인 자객들이 화양서원 과 만동묘 일원에 횡행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청국인 자객들과 자경단이 격돌 직전의 신경전을 벌이고 있어 이번 살변서도 자경단을 막았기에 그 나마에 그쳤다고 했다. 만약 사실이라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자경단과 청국 자객단의 대립이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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