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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ptember 20,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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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장편소설> ‘조선여인 금원’ 연재 63회

안 동일 지음

은사스님과 필제

현봉은 이른 절 저녁공양을 마쳤을 때야 동사에 도착했다.
포천의 김상성 분주와 함께였다. 김 분주야 말로 이번에 노론벌열의 실체를 밝혀내는데 일등공신이었다.
장김의 압박이 옥죄어 오면서 이런저런 어려운 일이 일어났다. 그만큼 이쪽의 활동이 활발해지고 있다는 얘기와 통했다. 얼마 전 동사와 부용사가 벌컥 뒤집혀 졌던 일이 있었다.
포천읍 분주 김상성 처사가 장김의 석실서원에 잡혀갔던 것이다. 근자에 들어 석실서원은 공공연하게 인신을 직접 구속하고 고신했다. 바로 지난해 봄에 필제와 다녀온 미음나루의 자경단 장원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김 처사는 결사 집정의 한사람으로 계회의 많은 일을 알고 있는 주요 인사였다.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태을 스님까지도 잠시 춘궁리 고골 방죽 입구의 정초시네 집에 가 있어야 했다. 혹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서원과 농민들의 갈등이었다. 포천 신북에는 용연서원이라는 사액 서원이 있었다. 한음 이덕형을 배향한 명문 서원이었는데 근자에 들어 장김의 마수가 뻗치면서 민폐 서원으로 전락했다. 금년에 들어서 다른 서원과 마찬가지로 금전 갈취의 행악이 더 기승을 부렸다.
그곳 향촌계를 김분주가 이끌었는데 김분주는 계속 ‘문제는 장김과 노론벌열이다’라고 강조 했단다. 그랬는데 지난 보름 계모임에 밀고가 들어갔던지 인근 석실의 자경단이 나타나 불문곡직 사람들을 패고 끌고 갔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이내 풀어 줬는데 그만 계속 가둬두고 있는 통에 많은 사람이 속을 더 끓여야 했다. 것이었다. 현봉이 아전들이며 서원의 유사등 인맥을 총동원 해서 그를 간신히 빼내면서 소동은 일단락 지어졌다. 하긴 김 처사의 집에서 큰돈이라 할 수 있는 오십냥을 만들어 바치기는 했다.
그런데 그때 김처사는 장원 창고 옥사에서 매우 의미심장한 광경을 목도했다. 알만한 안동 김문의 젊은이 세 사람이 끌려와 치도곤을 당하는 소리를 생생하게 들었다는 것이다.

“사람 일 한치 앞을 모른다더니 그 말이 꼭 맞습디다 그려, 그 잘나가던 녀석들이 그렇게 당하는 모습을 보게 될 줄은 누가 알았겠습니까? 무시무시하게 당하더군요.”
취조실이 거적 하나로 가려놓은 바로 옆이었기에 세세히 들을 수 있었고 볼수 있었단다.
‘너희들이 안동 김문 그 잘난 가문을 믿고서 이렇게 방자하게 구는가 본데 너희 김문이 누구덕에 그만큼 누리냐’고 닦달하더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취조하는 작자는 장김이 자신들의 ‘만동’ 없이 하루도 버티지 못한다고 기염을 토했고 ‘만동’이 대업을 위해 마지막 고삐를 죄고 있는데 협조는 못할망정 길을 막냐며 호통을 치더라는 것이다. 만동이라는 명칭이 정확하게 몇차례 들렸단다.

석실에서 풀려난 김분주는 이 사실을 지재의 귀재 현봉에게 즉각 알렸고 현봉은 백방으로 촉각을 곤두 세워 지재의 구슬을 더 모았고 이내 흩어진 구슬을 꿰어 만동의 실체와 연원을 파악해 냈다.
김분주의 구금이 전화위복인 셈이었다.
만동(萬同)이 바로 장김의 뒤에서 군림 조종하던 노론 벌열의 실체였다.
만동은 송시열이 사약을 받고 죽자, 그 제자들이 절치부심하며 만든 신권우선 왕권무시, 사대부 우선, 노론 제일, 숭명반청을 강령으로 하는 비밀조직이었다. 숙종대에 만들어져 경종 영조 정조 순조 헌종 시대를 거쳐 지금의 이르기 까지 은밀하게 세를 넓혀 왕권까지 좌지우지 하면서 내려온 조직 이었다.
당초 만동은 권성하 김정유등 송시열의 전발을 이은 직계제자들 가운데 성정이 드센 이들이 고초를 각오하면서 결성했고 그 두령을 본원이라 했다.
초대 본원이 권성하였고 경종조에 사사된 노론의 수장이자 안동 김문의 중흥조였던 김창집이 2대 본원에 올라 안김과 만동이 하나 되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 이후 누가 본원을 이었는지 또 현재의 본원이 누구인지는 베일에 가려져 있다. 장김의 수장 김좌근이 현 본원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고 했다. 하지만 작금, 김좌근이 이끄는 장김과 만동 수뇌부가 묘한 갈등관계에 있다는 것이 현봉의 진단이었다.

만동의 당초 목표는 우암의 복권이었으나 그 일은 이내 이루어졌고 나아가 우암은 나라 최고의 유학자로 숭앙되면서 공자 주자의 반열인 송자로 받들어졌다. 저들의 최고 명분이자 덕목은 바로 예와 의리를 아는 ‘사대부의 나라’였다. 사대부의 나라에서는 왕권도 도구였고 양민 노비는 말할 나위 없었다.
만동은 숙종 때부터 자신들의 수령이자 스승을 죽인 임금을 예전처럼 알지 않기로 했단다. 대신 스승을 중국의 중화를 이은 소 중화의 수뇌로 삼아 오랑캐 청의 황제나 변방 조선의 임금보다 더 숭앙하기로 했다. 그래서 명분과 권위를 갖추지 못한 조선의 임금에게 우리는 의리가 없다면서 궁궐과 능의 하마비를 그냥 지나치곤 했다는 것이다.
만동은 송시열이 자주 쓰고 좋아했던 구절 만절필동에서 따온 말로 화양 서원 내 만동묘의 이름도 여기서 나온 것이다. 또 만동의 상징적 본부도 만동묘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구별하기위해 만동묘의 만동은 동녘 東이었지만 이들은 한가지 同을 쓴단다.

만동은 비밀조직 이기에 구성원들은 누가 맹원인지 모른단다. 하지만 조정과 비변사의 주요 직책과 각 지역 서원의 실권 요직은 만동 맹원이었다.
그들은 유림의 적통이라는 스스로 내세운 권위 위에 맹원들의 갹출과 징수로 얻은 막강한 재력과 자경단 통문계의 위협적인 무력으로 이 나라를 농단해왔던 것이다.
안김, 장김도 대대로 본원 또는 회정이라도 부르는 수령과 당주, 원상등 최고위급 지위에 오른 이가 계속 상당수 있어 중첩되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만동 수뇌부의 눈 밖에 나면 권력을 유지 할 수 없는 구조란다.
저들의 규율은 무척 엄해 회정은 맹원들의 생사여탈권을 지닌 절대 권력자였는데 대개는 당주라 부르는 2인자가 전면에서 전권을 휘두른다고 했다. 당주 밑으로는 5명의 호법원상이 있었고 조정과 대형 서원마다에 지부장격인 집정을 두고 있단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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