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동일 지음
15. 화양서원 복주촌
화양서원의 서원촌을 특별히 복주(福酒)촌이라 불렀다. 금원이 보기에는 복술이 아니라 폭리 술, 비싼 술이었다. 어쩌면 춘향전에 나오는 만인 백성의 피눈물 이었다. 30년 전 필제 부친과 이명윤의원이 끌려온 곳도 정확히는 이곳 복주촌이라고 했다. 막 태동했던 자경단의 총단이 이곳에 있었단다.
화양서원이 자리 잡은 곳이 좁은 계곡 안이어서 민가가 크게 자리 잡을 터가 없었다. 그러다보니 화양리를 벗어나 앞쪽인 도원리 까지 서원촌이 뻗쳤고 근자에는 후영리와 후평리까지 복주촌이 돼 가고 있었다.
제사 때면 전국에서 수만의 유생이 운집하는데 어느 해에는 무려 3만이 몰려 왔다고도 했다. 그러니 복주촌은 보통 이권이 아니었다. 겉으로는 이 복주촌을 민간 상인들이 운영하는 것 같지만 사실 서원의 직영이나 다름없었다. 자경단이 관리하고 있었다.
화양길을 걸어 구곡 입구에 당도했다. 구곡으로 향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혹시 초롱이라고 열여섯살난 여자아이 모르십니까? 이곳 복주촌 객점가에서 일을 하고 있다는데…”
“객점이 한 두 갠가유?”
“모르겠는디유.”
객점 주변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물었지만 다들 이랬다.
필제도 이곳에서 사람을 찾고 있었지만 금원처럼 들어 내놓고 찾을 사람은 아니었다.
듣던대로 구곡 안은 우암 송시열의 작은 왕국과도 같았다.
화양동 계곡은 벼슬에서 물러난 송시열이 이곳으로 내려와 살면서 정자를 지어 글을 읽고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알려지기 시작 했다.
송시열은 주자의 무이구곡을 본떠 이 화양동 계곡의 볼 만한 곳 아홉 군데를 경천벽, 운영담, 읍궁암, 파천 등으로 명명하고 화양구곡이라 명명했다.
입구에 있어 제일 먼저 만나는 곳이 경천벽(擎天壁)인데 층암절벽에 ‘화양동문(華陽洞門)’이라는 글이 큼지막하게 새겨져 있다. 역시 송시열이 쓴 글이란다.
경천벽을 지나면 오른쪽으로 촌락이 펼쳐진다. 바로 이곳이 말 많고 탈 많은 원조 복주촌이다. 생각보다 넓지 않다. 그래서 바깥쪽 부락이 복주촌으로 변한 모양이다. 사람들로 북적이면서 분주해 보였다. 마침 오늘 저녁 때 통문패계 회동이 있다고 했다.
두 사람은 복주촌 부락에는 나중에 들어가기로 하고 그냥 왼쪽 길을 따라 위쪽으로 올라갔다. 서원과 만동묘를 먼저 둘러보기로 했기 때문이다.
“누님 제가 정혁이라는 말을 어디서 처음 보았는지 알아요?”
“어딘가요? 시경?”
“아닙니다. 송시열이 쓴 기축봉사 였시유.”
“그래요 그 사람이 그런 말을 썼습니까? 그것도 임금에 올렸다는 봉사에서.”
“그렇다니까유.”
필제는 기축봉사를 허 의원 서재에 있던 송자대전에서 읽었단다. 송시열 사후 득세한 그의 문하들이 펴낸 그의 문집이다. 제5권에 기축봉사가 들어 있었는데 거기서 그가 정신혁고라는 단어를 썼단다.
정신혁고는 새것을 취하고 옛것을 버린다는 뜻으로 원전은 시경이 맞았다. 두자로 줄여 정혁 이라 하면 이미 있던 왕조를 뒤집고 새 왕조를 세움을 이르는 강경한 말이 된다. 또 혁신 이란 말도 여기서 나왔다는데 이는 정혁보다 훨씬 완화된 뜻으로 쓰여진다.
필제는 정혁이라는 말을 달고 산다고 할 정도로 자주 했다. 추사의 과지초당에서도 그랬고 동사와 부용사에 와서도 거리낌 없이 정혁을 얘기 했었다. 하지만 스님들은 떠들레하고 우악스런 청년 선달에게 무슨 체계와 철학, 구체적 계획이 있겠는가, 그저 하는 소리려니 하고 받아들이고 있는 눈치로 맞장구치지는 않았다.
그런 필제의 정혁이 송시열에게서 나왔다니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누님, 이 왕조는 임진왜란 때 벌써 뒤집어졌어야 하는 왕조입니다. 그런데 이 왕조를 연명하게 하면서 나라를 이꼴로 만든 원흉이 바로 서인들입니다. 임란이 끝나고 허균선생 같은 선각자들이 나라를 엎으려 했을 때 서인들이 이를 저지하면서 자신들 입맛에 맞는 이씨를 새 왕으로 삼으면서 연명하게 한 것 아닙니까?” 남이 들으면 경을 칠 소리였지만 맞는 말이다.
“그 다음부터 노론으로 이어진 서인들, 한줌 양반들의 나라였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이렇게 긴 세도 정치는 세계에 유례가 없답니다. 역사적으로 3백년 이상 가는 왕조는 드뭅니다. 중국뿐 아니라 서양 구라파 왕조들도 그렇답니다. 그런데 이 왕조 조선은 벌써 4백년을 넘어 5백년으로 가고 있습니다. 고인 물은 썩는다고… ”
가만 들어보면 그의 말에는 늘 새 정보가 담겨 있었다. 추사에게서 함께 들은 이야기 이지만 한걸음 더 진전돼 있는 해석이고 지재였다.
서원건물 전각들이 오른쪽에 나타났다. 화양서원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는 대문을 필두로 명륜전 대성전 보광전 학전 등 전각들이 보였다. 생각보다 크지는 않았지만 꽤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공부하는 학생들의 모습 보다는 나이든 유사들, 하인들, 자경단원으로 보이는 검은옷의 사내들 그리고 잡상인들, 부녀자들의 모습이 더 많이 보였다.
금원과 필제가 보고 싶은 곳은 서원이 아니었다.
얼마쯤 올라가자 길가에 돌기둥이 마주보고 서 있다. 하마소(下馬所)라는 돌 팻말이 걸려 있다. 바로 만동묘가 시작되는 곳이다, 여기서 부터는 누구를 막론하고 말에서 내려 걸어가야 한다는 말이다. 특이하게도 王者(왕자)도 포함 한다고 쓰여 있었다.
서원건물들을 왼쪽 아래로 내려보는 저쪽 높은 곳에 만동묘 사당이 보였다. 그곳을 빙자해서 이런 하마비를 만든 모양이다.
아무리 송시열이라 하더라도 자신 명의의 서원과 정자로는 왕과 왕자를 말에서 내리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명나라 황제라면 얘기가 다르다. 명의 의종과 신종이 그들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