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동일 지음
14. 보은의 징치
금원과 현봉은 보은에서 일을 한번 벌이기로 했다. 옆 고을 진천에 이필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과지초당에서의 짧은 동문수학 이후 이필은 부쩍 더 친근하게 금원에게 다가왔다.
동사와 부용사를 세 차례 쯤 찾아 왔었다. 함께 하는 시간은 적었지만 그 밀도는 세밀했다. 그의 본명은 필제였다. 사람들에게 더 강렬한 인상을 심어 주느라 외자 이름을 쓰고 있다 했다. 듣고 보니 그랬다. 필제보다는 필이 더 강렬한 느낌을 주는 것 같기는 했다.
필제는 순조25년 을유생이었다. 충청도 홍주에서 태어났다.
부친을 일찍 여의었지만 부친 친구인 허의원의 물심양면 도움으로 글을 배울 수 있었다. 어려서부터 독서를 많이 했단다. 사람 사귀기를 좋아했고 언변이 뛰어났다.
그런 그에게는 커다란 아픔이 있었다. 이 땅에서의 큰 결격사유이기도 했다. 바로 서출이라는 것이다. 천만 다행으로 그의 어머니가 천출은 아니었기에 종이 되는 신세는 면할 수 있었지만 이런저런 차별을 피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조선의 신분제도에 대해 유난히 격분하고 있었다. 다행인 것은 그의 양부격인 허의원과 그의 아들 선호가 깨어있는 인물 이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각별한 후원과 사랑을 받을 수 있었다. 그가 무과를 택한 것도 그리고 선뜻 벼슬 임용에 나서지 못한 것도 적서의 차별 때문이었다.
동사와 부용사에 와서는 불교에 대해서 혹독한 비판을 쏟아 냈지만 스님들에게도 꽤 강한 인상을 주었다.
“조선 불교야 말로 일어서야 합니다. 불교의 근본정신이 무엇입니까? 바로 맞서는 겁니다. 무명과 맞서고, 불의와 맞서는 것 아닙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멋진 말이었다. 그런데 필제가 부용사를 여러차례 다녀간 것은 금원이나 스님들 때문만이 아니라 덕배아재와 상두계 때문인 측면도 컸다. 필제는 자신의 말대로 상두계와 탈춤패 사내들에게 볼일이 많았고 그들과 사귀기 원했기 때문이다. 특히 처음부터 덕배 아재와 죽이 잘 맞았다. 아재가 기호지방 상두꾼 조직에서 가장 목소리가 큰 인물이라는 것을 알고 나서부터 부쩍 더했다.
현봉스님이 갑인년 (철종4년)에 치러진 무과 급제자 명단에서 진천 사람 이필제의 이름을 확인했다. 하긴 그 무과에서 합격한 이가 천명이 넘었다. 그리고 진천의 부자인 허선이라는 한의가 그의 유력한 후원자로 필제가 그 집을 제 집처럼 들락거리고 있다는 것도 확인했다.
相見不答 濁世硏 (상견부답 탁세연)
我窮他乏 悟病難 (아궁타핍 오병난)
平世好男 誰由從 (평세호남 수유종)
無王床說 唯鼎革 (무왕상세 유정혁)
이리보고 저리봐도 기운세상 답이 없네
너도 굶고 나도 아프고 저도 힘드네
세상 바로 펴겠다고 나선이여 따르는가.
왕후장상 따로 없다 정혁만이 우리 살길.
허 의원 부자를 비롯해 주변사람들이 무서워하면서도 감탄했다는 필제가 스무살 약관 무렵에 쓴 시란다.
필제는 자신이 정혁에 관심을 쏟게 된 것은 허균 선생의 영향이 컸다고 했다.
소년 무렵 홍길동전을 한글본 으로 읽었는데 그 책을 읽고 나서 자신의 처지와 관련해 신분질서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게 됐다. 그리고는 허균의 다른 저작들을 찾아보았다. 금서로 되어 있었지만 조금만 노력하면 찾아 읽을 수 있었고 그 영향으로 정혁을 생각하게 됐다는 것이다.
이 험한 시기에 너도 나도 자신만 잘 먹고 잘살겠다고 어떻게 해든 출세해보겠다고 나서는 판에 남들을 위해 세상을 위해 살겠다고 공언을 하는 젊은이. 금원과 스님은 그 정신을 높이 샀다.
진작부터 현봉스님은 필제를 법주사 쪽 회중과 연결시키려 하고 있었고 얘기 끝에 필제 이름이 나왔는데 서로들 잘 아는 사이라고 했기에 잘됐다싶어 진천으로 사람을 보내기로 했다.
금원과 현봉이 보은에 와 있다는 전갈을 받은 필제는 한달음에 달려 왔다. 외지로 쏘다니기 일쑤인 사람이 마침 처소에 와 있었던 모양이다,
필제는 변을 당한 고생원에 대한 안부를 먼저 챙겼다.
“좀 어떠십니까? 고 숙부님.” 고생원과 필제의 부친은 동문수학한 사이였다.
필제는 그렇지 않아도 고생원이 횡액을 당했다고 해서 위문하러 오려 했는데 금원과 현봉이 불러 줘서 너무 잘됐다고 떠들레 했다.
“어서 오시게 이선달, 보다시피 큰 문제 없다네 ”
자리를 털고 일어나 옆 자세지만 벽에 기대 있던 고생원은 필제를 반갑게 맞았다.
금원에게는 이럴 줄 알았다면서 무척이나 반가워했다.
“누님께서 우리 고 숙부님과 동패일 것이라고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쏜살같이 병구완을 와야 하는 사이일 줄은 생각도 못했는디 정말 반가와유.”
사람도 많은데 손을 덥썩 잡는 것 아닌가. 금원은 너무 매정하게 뿌리치면 그가 멋쩍어 할까봐 살며시 손을 뺐다. 의외로 그의 손은 큼직하게 우악스럽게 생겼지만 느낌은 부드럽고 따뜻했다.
필제는 대뜸 숙부를 이렇게 만든 놈들을 그냥 둘 수 없다고 나왔다.
“그렇게 흥분만 할 일이 아닐세.” 고생원이 오히려 말려야 했다.
“저를 부른 게 그런 뜻 아니었시유? 장사 스님.”
필제는 현봉당을 장사 스님이라고 불렀다.
“그렇기는 한데 이선달 말처럼 당장 몰려가고 그럴 일은 아닌 듯 싶으이.“
”성급하긴 뭐가 성급하답니까? 모든 일에는 때가 있는 법이지요, 모든 일은 사람이 하는 일인데 사람 이렇게 모이기 어디 쉽습니까? 오면서 생각해둔 게 있슈.“
듣고 보니 무조건 혈기로만 달려드는 그런 무모한 얘기는 아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