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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장편소설> ‘조선여인 금원’ 연재 31회

안 동일 지음

을해결사

“유학이라는 학문이 워낙에 정치적인 학문이기 때문이지. 유학의 근본이 무언가. 효 아닌가? 이는 충을 강요하기 위한 전제로서의 강령 아닌가.”
이같은 운학노사 그의 정치과잉론은 경청할 만했다.
“이 땅의 양반이라 일컫는 사람들은 천자문을 읽는 순간부터 유학으로 포장된 정치의 물결에 휩싸이게 되게 마련이지. 세상의 이치와 도리를 깨달아 성인이 되는 길이라 하여 도덕을 애기하고 군자의 도를 얘기하지만 실제는 자신과 가문의 이익, 당파의 이익을 쫒아온 것이 조선 사대부들의 본모습이 아닌가. 사대부들이 그토록 중시한다는 제사도 따져보면 가문의 위세와 후광을 과시하고 내세우는 정치 행위로 변질되지 않았는가.”
반면에 백결은 그래도 유학이 인간의 학문이기에 너무 모든 것을 부정하고 타파해야 한다고 몰아세울 것 까지는 없다는 온건론을 폈다.
백결은 사색당쟁에도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고 했다. 하긴 당신 스스로가 당쟁의 한복판에 서 있던 조정 신료였기 때문에 그럴지도 몰랐다.
“붕당이 바람직하다는 것은 아니지. 하지만 서로 견제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고 볼 수 있는 측면이 있어요. 그런 붕당이 없었으면 더 부패하고 더 문제투성이의 나라가 됐을 것이라는 게 내 생각이오. 지금이 바로 그렇지.”
“형님은 아직도 그렇게 양반 습속을 버리지 못하고 계시오, 그게 문제에요. 문제”
운학이 백결을 몰아 세웠다.
“참 사람도 젊은 사람 앞에서. 내 얘기는 붕당의 역사가 피비린내 나는 살육의 반복 이었다고들 하지만 내 얘기는 반대파의 집권으로 목숨까지 잃은 예는 손에 꼽을 정도라는 겁니다.”
금원은 두 노사의 이런 티격태격에서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역사의 고비마다 우리 결사의 활약은 크게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면밀하게 이루어 졌다네, 임란 때도 그렇고 호란 때도. 그리고 여러 차례의 사화 때도…”
을해결사는 조선 건국초기인 이징옥의 난부터 가깝게는 홍경래의 서북 작변까지 조선에서 일어난 변란 정혁 개혁에 대부분 직간접으로 참여했다.
노사들은 한성 도읍까지 점령했던 이괄의 작변과 백성들의 호응이 컸던 이몽학의 정혁을 특히 안타깝게 생각 하고 있었다.
조선조에 들어 성공한 두 번의 반정 그리고 정도전 조광조 이이 허균 홍국영 등 개혁 인사들의 이름이 거론되면서 그런 쪽에도 일정한 개입과 참여가 있기는 했지만 결사의 노력이 하늘에 닿지 못했다고 평하고 있었다.
금원이 노사들에게 물었다.
“오늘 거론하신 이괄 장군이며 허균 선생이 모두 우리 결사의 성원 이셨습니까?”“그건 아닐세, 언젠가도 얘기했지만 우리 조직은 그림자 조직이어서 뒤에서 돕기만 했지. 아마 이몽학의 난에서는 군사였던 한현이라는 분이 우리 결사의 일원이었고 이괄 장군 사변 때는 기익헌이라는 분이 직접 관계있는 맹원이셨다고 들었네.”“무슨 기록은 없습니까?”“기록을 남기면 나중에라도 탈이 날수 있기에 그런 것은 안 남긴다네.”
그럴 만도 했다.
유교 유학 때문에 조선을 인정 할 수 없다면 그런 점에서 운학 노사의 主人(주인)론이 더 금원에게 절실하게 다가왔다. 호령을 하고 호통을 치고 있어도 무슨 일만 나면 내빼는 양반들은 이 땅의 주인이 아니란다. 임란 때도 호란 때도 이 땅을 끝까지 목숨 걸고 지킨 주인은 민초들이라는 얘기였다. 그들이 결사의 진정한 주인이기도 하단다.
“하늘이 알고 땅이 알지 않겠나? 누가 자신을 진정으로 위하는지.”

향교에 도착한 둘째 날 오전은 편조종사 신돈의 시간이었다.
두 노사 역시 편조스님 신돈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고 그의 정신과 교훈을 강조했다.
노사들은 신돈의 평등정신과 제폭구민 사상이야 말로 결사의 근간이며 뜻을 받들어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드는 일이 결사의 목표라고 했다.
“신돈 편조종사 께서는 당신을 생각하는 두 세 사람만 모여 있으면 그곳에 미륵이 된 당신이 있다고 하셨네.”
“공께서 가장 역점을 두고 하려 했던 일이 신분제도 혁파 아니었겠는가. 일에는 귀천이 없지, 사람들의 생각에 있는 것이지.”
“공께서 또 역점을 두었던 일이 토지 개혁이었지. 지금이나 그때나 토지가 가장 큰 문제 아닌가. 토지를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금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신돈은 집권하자마자 전민변정도감이라는 기구를 설치해 부당하게 빼앗긴 토지를 원주인에게 되돌려주고 노비로 전락한 사람들을 양민으로 환원했다. 농지는 농사짓는 사람에게 분배되어야 한다고 굳게 믿었던 것이다. 신분과 토지문제를 한번에 다루는 양수 겸장의 기구였던 것이다.
신돈은 늘 민초들을 생각했다. 그 자신이 민초였기 때문이다. 신돈은 자라면서 “세상에서 가장 천한 것이 니 놈이다”라는 말을 어머니로 부터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다. 절집에 딸린 사노가 노비 중에서도 제일 험하고 천하다는 얘기였다.
실은 옥천사 여종인 어머니에게 편조를 잉태시킨 호족이 신씨인지 유씨인지 조차도 확실하지 않단다. 편조의 처지를 안쓰럽게 여긴 옥천사 고승 천희스님이 그를 거둬 중은 중이되 머리 기른 중으로 키웠다. 철들자 그에게 맡겨진 일이 바로 사람들의 시신을 염하고 매장하고 복을 빌어 주는 일이었다.
백결 운학 두 노사 역시 이 매골승 시절의 편조가 매우 인상적이었던 모양이다.
“가장 천하다는 그 일을 하면서 그가 신망을 얻었던 것은 누구를 염하더라도 지극정성으로 했다는 사실 때문 아닌가. 차별을 두지 않았다는 얘기지. 그가 복을 빌어준 망자의 자손들은 모두 나름대로 잘 됐다고 하네. 그러니 사람들이 모였지. 그러면서 그는 새 세상을 꿈꿨다네.”
편조는 그 염하고 매장하고 왕생 독경 읽어주는 일에서 한 소식 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다면 사람들이 그리 몰려 들 수 없었다. 편조종사가 꿈꾼 세상은 열심히 일하는 농민이 자신의 땅과 생산물에서 멀어지지 않는 세상이었다. 자기 땅을 가지고 가족과 함께 웃음꽃을 피우며 사는 세상, 그리고 무엇보다 억울한 죽음이 없는 세상이었다. 그는 부지런히 갈고 닦으면서 때를 기다렸고 마침내 그 시기가 왔다.
드디어 왕을 만났을 때 “세상을 복되고 이롭게 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도를 알기에 욕심이 없으며, 또 미천하여 걸릴게 없으니 큰일을 맡을 만 하다.”고 자신을 당당하게 소개했다. 그러면서 자신을 끝까지 믿어 줄 것을 청해 왕으로부터 “스승은 나를 구하고, 나도 스승을 구하리라”는 다짐을 받았다.
그가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지위에 올라 억울하게 노비가 된 사람들을 면천 해방시켜주고 권문세족, 부호들이 강탈한 토지를 돌려주었을 때 백성들은 “성인(聖人)이 나타났다” “미륵이 나셨다.”고 기뻐했고 “역시 우리 매골스님 일세”라고 찬양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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