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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장편소설> ‘조선여인 금원’ 연재 29회

안 동일 지음

 을해결사

한시도 병석에 눕지 않고 홀연히 떠난 그의 喪(상)을 사람들은 천하의 호상이라 했다.
금원은 추사의 부음을 달포가 지나서 전라도 익산에서 들었다. 미륵사의 미륵불 앞에서 그곳 호남의 도반들과 회합을 갖고 있을 때였다.
대웅보전에서 향 연기 한 줄을 피어 올리면서 금원은 존경하고 은혜하던 스승의 입적을 결연히 받아드렸다.
‘메테야 메테야 메테에라 보디싯따 사바하 나무 아미타불’
아미타불을 붙여 외었다. 색으로 향미촉법으로 자신을 구하지 말라했던 스승.
국경을 초월해 평가 받는 뛰어난 예술인이었으면서 좋은 경세가가 되기를 바랬던 스승.
이 땅 백성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여겼던 스승. 백성의 아픔을 치유하지 못한 것을 못내 아파했던 스승.
금원의 볼에 눈물방울이 주루룩 흘렀다.
스승은 평생의 원 이었던 경세유표 실사구시 정치의 실현을 보지 못한 채 떠났지만 그는 그가 할 수 있는 안배를 하고 떠났다. 미륵불 아래서 금원은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이 추사 안배의 형광이 돼야 한다고.
다행히 그런 스승의 정신과 안배는 그림으로 글씨로 도처에 남아있었다.

那將月老訟冥司(나장월로송명사)
來世夫妻易地爲(내세부처역지위)
我死君生千里外(아사군생천리외)
使君知我此心悲(사군지아차심비)

어찌하면 매파가 저승 관리에게 송사하여
내세에는 우리부부 바꾸어 태어나게 할 수 있을까
내가 죽고 당신이 천리 밖에 태어나
나의 이 마음의 슬픔을 알게 하고 싶은데…
(유배시절 부인 예안이씨의 부음을 듣고)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고 세상을 떠난 추사를 두고, 그리고 많은 이들의 한과 슬픔, 그리고 바람을 두고 세월이 흘렀다.
겨울이 가고 봄이 가고 여름이 물러간 자리에 다시 가을이 들어섰다.
그 사이 나라 안에 일이 꽤 있었다. 그중에도 순원왕후 김씨가 세상을 떠난 일이 큰 일중의 하나였다.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60년을 이어가게 한 주역의 한사람이었던 그이가 철종8년 8월 4일 창덕궁에서 6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순정왕후 조 대비가 왕실의 가장 큰 어른으로 등극했다. 개혁 군주가 되고 싶어 했던 효명세자의 부인 바로 그이다. 궁중 대소사의 최고 결정권이 안동김씨에서 풍양조씨로 넘어온 것이다. 금원과 태을당 에게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일 이었다.
하지만 백성들의 삶은 달라지지 않았다. 계속 백성들은 주렸고 안동김문에 이어 풍양조씨에 줄을 댄 탐관오리가 극성을 부렸다.

부쩍 동사와 부용사의 식솔이 늘었다. 동사의 경우에는 고골 저수지를 중심으로 사하촌 아닌 사하촌이 형성 되어 있었다. 처음엔 한두 채였던 움막 초가집이 열 두어 채로 늘어 있었다. 그만큼 세간서 살기가 어려워진 탓이다. 이리로 들어온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지만 사람들은 숨통이 트인다고 했다.
세간은 분명 무엇인가 대책이 필요 했다. 백성을 먹고 살게 해주는 것이 나라와 나랏님의 일인데 그 둘이 하나도 작동하지 않았다.
금원은 그럴수록 계속 스승 태을 스님을 쳐다보았다. 무언가 대책이, 무언가 할일이 그리고 시킬 일이 있을 텐데 싶어서였다.
얼마만큼은 초조하고 얼마만은 울분에 찬 날이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하루는 태을 스님이 자신이 직접 쓴 봉서 한 장을 건네면서 춘궁리 향교에 금원이 꼭 만나야 할 ‘귀인’이 와 있으니 이 편지를 건네고 오라 했다.
봉서의 겉면에는 해자(亥字)가 쓰여져 있었다.
동사에서 방죽을 오른쪽에 두고 언덕을 오리쯤 내려가면 광주 향교가 나온다. 명륜당과 대성전을 다 갖춘 꽤 큰 향교다. 비위와 비리 없이 운영되는 몇 안되는 향교라고 했다. 그러려니 전체적으로 한적했다.
금원이 갔을 때 그곳 수호목인 오백년 은행나무 아래 평상에서 두 노인이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백결 노사와 운학 노사였다. 두 사람 다 웃옷의 소매에 검은 문양이 보였다. 전설의 불가사리였다. 부용사와 동사의 매향비에 세워져 있는 형상이기도 했다.

한 노인은 두루마기와 저고리 바지 할 것 없이 기운 자국이다. 하지만 깨끗이 빤 옷 이었기에 흰 수염 흰 눈썹과 썩 어울렸다. 그가 백결 노사였고 부리부리한 이가 운학 이었다. 금원은 두 노인 모두 태을 스님과 만나는 것을 먼발치에서 본적이 있었다. 계에서는 원로들을 노사(老師)라고 불렀다. 중국식 이었지만 뜻이 어울렸기에 어색하지 않게 사용했다.
두 노사는 금원이 올 것을 알았던지 다가가자 담소를 멈추고 온화한 표정으로 금원을 쳐다보았다.
“복이 많아 이렇게 노사님들을 뵙습니다, 금원 가성행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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