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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ptember 20,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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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장편소설> ‘조선여인 금원’ 연재 27회

안 동일 지음

하늘 또한 괴롭다고 하네 (仰面問天天亦苦)

그랬다. 한비자는 금서였다.
순망치한 토사구팽의 고사의 원전인 한비자가 금서라는 사실은 조선이 얼마나 성리학에 경도 돼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책쾌를 통해서나 필사본이 은밀히 유통되고 있었던 어려운 책 이었다. 추사도 중국에 가서 그 원전을 처음 구경했었다.
“이 한비자에 보면 ‘망징’이라는 편이 있는데 거기에 나오는 애기가 지금의 조선의 처지와 너무도 똑 같으니 큰일이 아닐 수 없다네.”
금원이 책을 들어 필사본의 쪽들을 넘겨 보았다.
추사의 핵심을 찌르는 열강이 시작됐다.
‘나라는 적은데 군신(群臣)의 저택은 크고, 군주의 권력은 약한데 대신의 세력이 크면 멸망한다.’ 한비자 15편 망징(亡徵)의 첫구절이다.
첫 번째부터 조선에 해당 하는 말 아닌가. ‘법령, 금제를 소홀히 하여 그에 따르지 않고, 모략에 열중하여 국내를 다스리지 못하고,  외국의 원조만 믿고 있으면 멸망한다.‘

입이 벌어질 지경이다.
‘군신(群臣)이 학문을 잘못 닦아 공허한 변론을 즐기며, 상인이 정부를 배경으로 남몰래 축재를 하며, 아래 백성들이 군주가 베풀어 준 것을 받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면 망한다.’
‘군주가 궁전과 누각과 정원과 연못 같은 토목 건축을 좋아하고, 수레와 말, 의복과 기이한 물건 그밖에 오락물에 골몰하고, 그 때문에 백성들을 고달프게 하여 재정을 낭비하면 망한다.’
이어지는 조항은 더 절절하다.
‘중신의 알선으로 관직이 주어지고, 뇌물을 바쳐 작록을 얻을 수 있는 나라는 망한다.’
‘군주의 성격이 아둔하고, 일을 처리한 적이 별로 없으며, 의지가 유약하고 결단력이
미약하며, 기호가 분명치 않고, 남에게 의지하여 자립정신이 없으면 그 나라는 망한다.‘

이밖에 망징은 25가지로 요약 돼 있었는데 어느 하나도 조선에 해당하지 않는 것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정말 놀랍습니다. 어쩌면 이렇게 우리 현실을 그리고 있답니까?”
“그렇지, 조정에 나가 나라의 정치를 했던 사람으로서 참담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네.”
추사의 눈에는 눈물까지 그렁그렁해져 있었다.
“큰일 아닙니까? 이렇게 나라가 망한다면…” 별생각 없이 금원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왔다. 이 조정에서 벼슬살이를 했던 추사를 생각해서 나온 말이었다.
“큰일은 무슨 큰일 잘된 일이죠, 이런 나라 빨리 망해버려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이필이 나섰다.
“흐흠 그런가..”
의외로 추사가 담담하게 받았다. 그로서는 그렇게 말할 밖에 없을 터였다.
“어쨌든 안동 김가의 세도 권력은 하루빨리 종식시켜야 합니다.”
“그렇다네, 저들의 굴기와 전횡을 못 막고 오히려 키운 우리 같은 사람들의 책임이기는 하지만….”
“장김의 전횡이야 말로 망징이죠. 이 나라를 망치고 있는 원흉 아닙니까. 사색당쟁보다 더 나쁩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스승의 눈에 물기가 어려 있었다.

‘멈출 줄 알고 하늘의 뜻을 안다면 승리가 온전할 수 있다’
知止知天 勝乃可全 (지지지천 승내가전)
‘남보다 뛰어난 것은 자랑할게 못된다. 어제보다 오늘 뛰어난 자신을 자랑스러워 해야 한다.’
他面悟 自面滿 又日新 (타면오 자면만 우일신)
‘오직 지극정성만이 세상사를 이룰 수 있다.’
唯天下至誠 爲能化 (유천하지성 위능화)
열변을 토한 뒤 일필휘지로 손자병법과 중용의 가르침으로 세 사람에게 주는 교훈을 휘호하는 노과의 모습은 숭고했다. 그러면서 스승이 강조한 것은 자신이 해내지 못한 이땅의 잘못된 신분제도의 타파였다. 적서의 차별, 노비제도. 반드시 고쳐야 한다고 했다.
노 스승은 작은 일에도 성심을 다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일에 매진하되 섣불리 나서 피해만 입는 일은 하지 말라는 얘기였다.

다음날 등청 때문에 경석은 돌아갔고 금원과 필은 과지초당에서 사흘을 더 묵었다.
시간이 빠르게도 흐르고 늦게도 흐른다는 것은 진작 알았지만 이처럼 빨리 지나가는 경우는 없었다. 그 빠른 시간 속에 차와 서예의 훈향이 있었다.
이필은 연방 추사에게 질문을 해 댔다. 세상사에서부터 조정 돌아가는 이야기 하다못해 왕실의 족보까지 물어 보는 것이었다. 추사는 어떤 엉뚱한 질문을 해대도 막힘이 없었다.
후일 생각해보니 회광 반조였다. 마지막 불꽃이었다는 얘기다.
자신이 휘호한 신안구가 新安舊家, 설백지성 雪白之性, 지란병분 芝蘭並芬 경경위사 經經緯史의 숨은 뜻을 일러 주었고,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황룡가화 黃龍嘉禾, 황화주실 黃花朱實, 황화주실수령장 黃花朱實壽令長, 숭정금실 崇禎琴室을 쓴 연유를 들려주었다.
그 글씨들에 은유되고 형상화된 사연과 비밀에는 추사가 얻은 하늘 땅의 이치와 지식, 그리고 정치적 바람이 담겨져 있었다. 숭절금실은 나라가 치마폭에 싸여 있다는 비유였고 지란 병분은 잡초와 난이 다르지 않다는 신분 평등을 말하고 있었다. 중인 하인 들을 차별치 않는 그의 성정이 담겨 있었다. 추사는 그 누구보다도 철저했던 사해 평등론자였다,.
‘만약 색으로 나를 구하고 소리와 빛과 향기로 나를 구하려 한다면 그것은 사도일 뿐으로 진정한 여래를 만나지 못한다’
천역고를 아는 추사 또한 종국에는 금강경의 가르침을 인용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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