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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ptember 20,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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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장편소설> ‘조선여인 금원’ 연재 26회

안 동일 지음

 하늘 또한 괴롭다고 하네 (仰面問天天亦苦)

승설은 지난번에 올 때 금원이 애써 구해 가져온 중국의 명차였다. 그리 기뻐하면서 초의를 불러 자랑해야겠다고 그 자리에서 꽁꽁 싸매 설합에 넣는 바람에 혹시 맛볼까 했던 금원은 저윽이 실망했었는데 그 차를 오늘 낸다는 얘기다.
경석과 필이 들어왔다. 칠성도 한자리 차지하고 앉았다. 자주 그러는 모양이다. 그사이 물이 적당히 식었다. 추사를 중심으로 원을 지어 앉았고 추사가 익숙한 솜씨로 김이 오르는 갈색 차를 한잔씩 따라 각자의 앞에 놓았다.
주전자를 든 손이 손이 가늘게 떨리는 것은 금원은 놓치지 않았다. 저고리를 걷어 올린 하얗고 가는 팔뚝에 푸른 핏줄이 그대로 드러났다.
역시 차는 그윽한 풍미가 금원이 느끼기에도 대단했다.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일품입니다.”
“아까 얘기 했다만 이 차가 완원 스승님과 나를 이어준 바로 그 차네.”
추사의 표정이 어느 때 보다 밝았다.
“승설이라는 말은 단단히 묶어 새겨 놓는다는 뜻이 아닌가.”
모두들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승설에 그런 중의가 있구나 하는 생각에서였다.

“난 자네들이 또 백성들은 주리는데 한가롭게 차 타령이나 할 수 있냐고 못마땅해 할까 걱정 했다네.”
“어르신도 참.”
“그래 세상살이 라는 게 쉬운 일이 아니지.”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추사가 다시 말을 이었다,
“자네들 ‘앙면 문천 천역고’ 라는 말 들어 봤는가?”
“처음 듣습니다.”
세 사람 다 그랬다.
“얼굴을 들어 하늘에게 물어보니 하늘 또한 괴롭다고 하네. 仰面問天天亦苦, 송나라때 정유 라는 시인의 印章詩(인장시)일세. 도장에 시를 새겼다는 얘기지.”
가슴이 쿵하고 저려온다. 다들 나름대로 힘들다는 얘기다.
“제주 대정에 있을 때 이 인보를 보고 내 많은 위안을 얻었다네.” 제주 대정이라면 유배시절을 말한다.
“하지만 세상이 다들 괴롭다고 그냥 그러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필이 나섰다.
“그렇지 역시 자네일세.”
칠성은 슬며시 방을 나갔다.

추사는 찻상을 한쪽으로 밀고 작심한 듯 자세를 고쳐 앉더니 옆쪽 문갑에 놓여 있던 글씨를 세 사람 앞에 펼쳤다,
攷古證今(고고증금) 山海崇心(산해숭심)
옛 것을 상고하여 오늘의 증거로 삼고자 하여도
높은 산과 깊은 물이 위업을 막아서네.

“년 전에 쓴 글일세, 옛 글을 뒤져 보았더니 이런 글도 나오더군.“
금원은 이 글귀가 장김과 노론벌열을 겨냥한 글이라는 것을 단박에 알아 차렸다. 산과 바다가 비틀려 있었는데 그 안에 노와 벽이 보였고 숭에는 김자가 보였다.
“바다같이 깊은 물이 노, 소, 벽, 시, 청, 탁, 그리고 김이겠군요.”
“그렇지, 그래서 내가 오늘 자네들에게 들려줄 얘기가 이 나라를 농단하고 있는 세도의 핵심 이자 뿌리인 노론의 적폐에 관한 것일세. 먼저 자네들 이 상소문을 한번 보게나. 이 상소를 쓴 분이 바로 필이 부친이라네.”
그러면서 추사는 필을 쳐다보았다. 필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 간에는 애기가 있었던 모양이다.

경석과 금원 앞에 펼쳐진 필제 부친의 상소문은 두 사람을 격분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그 강도는 사뭇 달랐다. 경석은 아예 떨기 까지 했지만 금원은 거기까지는 아니었다.
두 사람이 상소를 다 읽고 고개를 들자 추사가 입을 열었다.
“장김을 포함하는 노론이라고 일컫는 붕당 집단이 혁파해야 할 이 나라 종사와 민생의 공적이자 적폐라고 오래전부터 생각해 오긴 했는데 필이 부친의 이 글을 보고 다시금 마음을 다잡았지. 삼호당 자네가 고초를 겪은 일 때문에 고산과 사충의 서원패와 접촉해야 했을 때 저들과 부닥뜨리면서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네. 저들이 생각 보다 훨씬 조직적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세 사람은 추사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나라를 이 꼴로 만든 저들을 몰아내는 것, 그것이 정치한 사람으로 내가 이 땅 에서 받은 은혜에 보답 하는 길이 아닐까 싶네만 이제 나는 늙어 힘없는 몸. 직접 나설 힘이 없다네. 내 살면 얼마나 더 살겠나?”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스승님.”
심재 경석이 말했다. 추사파 3천이라고들 해도 추사를 스승님으로 부르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추사가 손을 들어 알았다는 동작으로 심재의 말을 막았다.
“어쨌든 자네들이 내 말을 명심하고 어떻게 해서는 자네들 세상에서는 패역도배들의 전횡에 시달리지 않는 세상을 만들어 주게나.”
패역도배라는 말까지 나왔다.“다 아는 얘기지만 한 사람보다는 두 사람이, 두 사람 보다는 세 사람이 힘이 있는 법이지, 동무들과 회를 만들고 계를 조직하는 일에 승설이 있지 않을까 싶네만…”
사람을 모으고 뜻을 모으고 그리고 힘을 모아야 한다는 말씀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추사는 벽장에서 책을 한권 꺼냈다. 꽁꽁 싸매 두었던 책 인 듯 했다.
“자네들 한비자를 읽었는가?”
추사가 앞에 앉아 있는 금원과 이필 앞으로 책을 내려 놓으며 물었다. 제목이 없었지만 이책이 바로 한비자구나 싶다.
“아직…”
“그렇겠지 아직 까지는 금서니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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