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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ptember 20,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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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장편소설> ‘조선여인 금원’ 연재 제12회

안 동일 지음

이필의 고변

젊은 인재들을 등용하고 개혁정치를 펼치려했던 효명세자는 안타깝게도 3년 3개월이란 짧은 대리청정을 끝으로 세상을 떠난다. 조선이 마지막으로 회생을 걸어볼 수 있었던 희망이 너무도 아쉽게 꺾이고 만 것이다.
세자는 을유년(1830) 윤사월 22일, 갑자기 각혈을 하면서 쓰러지더니 5월 초엿새 세상을 떠났다. 당시에도 이 죽음을 두고 말이 많았었다. 많은 이들이 안동 김가에 의혹의 눈길을 보냈지만 구체적 증좌를 찾을 수 없었다. 또 그때는 저들의 힘이 너무도 강했다.

그런데 이필이 30년 가까운 세월 전의 세자의 죽음을 거론하고 있는 것 아닌가.
그의 다음 말은 더 충격적이었다.
“제 아비가 세자의 죽음이 독살이었다는 증좌를 임금에게 고하려다 살해 되었습니다.”
그런 고변사건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처음 듣는다.
“좀 더 자세히 얘기해보게.”
추사는 청년 쪽으로 몸을 당겨 앉았다.
들어보니 이필의 이야기는 앞뒤 아귀가 맞았다. 허풍이나 거짓이 아니었다.

세자의 죽음에 책임을 지고 내의원 의관 이명윤이 향리 진천으로 귀양을 왔단다. 필의 부친 이종원 선비의 친한 벗, 허진수 의원이 그와 동문수학한 사이였다. 약재상과 의원을 열고 있는 허 의원은 진천의 알부자였기에 귀양 온 동문 선배의 뒷바라지에 적격이었다. 향리부처에는 보수주인이라 해서 후원자가 있어야 했다.
“세 분이서 매일같이 어울려 세상을 한탄하고 장김과 서원패들의 농단에 분통을 터뜨렸답니다. 특히 청주의 화양서원에 대해 격분을 감추지 않으셨다고 하더군요. 주변 친지들도 저러다 셋이서 무슨 일을 내는 게 틀림없다고 걱정을 했었죠.”

그러던 어느날 세 사람이 모두 관가와 화양서원으로 차례로 끌려가 심한 고문을 당했고 그 때문에 이명윤 의관과 필의 부친은 장독으로 며칠 앓다가 세상을 떠났고 덜 당한 허의원만 간신히 살아남았다. 당시 필제는 일곱살 이었다. 허의원에게도 아홉 살 난 아들 선호가 있었다. 필제는 허의원집에서 자랐다. 끌려간 명목은 엉뚱하게도 천주교인들과 어울렸다는 이유였다.
필과 선호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부친들이 억울한 일을 겪었다는 것을 짐작은 했지만 다들 쉬쉬 하기에 더 이상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허 의원도 몇년 전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근자에 그의 서재를 정리하다 임금께 올리는 상소로 보이는 서찰 한통을 발견했단다.
“바로 이것입니다. 여기에 그 구체적인 내용이 다 들어 있습니다.”
필이 서찰을 서탁 위에 올려놓았다. 추사가 받아 들어 펼쳤다.
그의 말대로 임금에게 올리는 상소문 이었다.
첫 대목부터 추사의 손과 가슴을 떨리게 했다. 고친 자국이 아직 여럿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초안이 맞았다. 흥거 3년 뒤, 부친 노경공의 유배 때문에 정신이 없었던 때에 쓰여진 글이다.

‘충청도 진천 고을에 사는 유생 이종원과 내의원 의관 이었던 이명윤이 함께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소를 올립니다. 이 나라는 태조대왕께서 용비하시어 개국하신 이래 성군 열조들이 그 위를 높이셨고 충신 효민들이 그 세를 넗혀 왔습니다. 환난과 위기가 왕왕 있어 왔지만 성군과 충신의 부조로 이를 극복해 왔던 차, 지난 을유년 망극한 환난을 다시 당하여 백관과 만백성이 오열하면서도 성충을 합하야 대계를 마련했던 바 있습니다. 그런데 오열했던 만백성이 공노하게도 그 망극한 일, 을유년 효명세자 저하의 흉거에 국기를 흔드는 음모가 게재되어 있었음을 인지하였기에 이제 피를 머금고 전말을 금상께 고하고자 합니다.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불충과 패악이지만 삼가 말씀드리면 세자 저하의 흥거는 치밀한 음모에 의한 독살이었습니다.’

추사의 손이 심하게 떨렸고 눈가에는 물기가 어렸다.
‘저들이 조직적으로 나서 세자의 수라와 다과에 장기간 소량의 투구꽃 씨앗, 부자, 황기를 넣어 체질을 바꾼 뒤 마지막에 산수유와 하명주을 사용했던 것입니다. 당시 대전의 소주방과 동궁전의 소주방이 병합돼 있었던 것도 저들의 치밀한 간계였던 것입니다. 저들은 그때 소주방이 내의원 옆에 있었던 지형을 이용해 …’
내용은 당시 내의원과 궁중사정을 잘 알지 못하면 쓰지 못할 내용이었다. 거기다 구체적인 약명까지 거론 하고 있었다.
“흉계의 진원지는 청주 화양동의 화양서원, 특히 서원과 함께 있는 만동묘 입니다. 흉사에 쓰여진 약재도 그곳 화양동 금산에서 채취돼 궁궐 소주방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
화양서원과 만동묘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우암 송시열을 배향 했다는 이 서원은 겉으로는 문자향 서권기 있는 명문서원을 표방하고 있지만 실제는 속 시커먼 흉폭한 역당의 소굴입니다. 이들은 대놓고 자신들은 조선의 왕에게는 의리가 없고 중화의 상징인 명나라 황제에게 직접 의리가 있다고 공언하곤 합니다. 이들은 궁궐의 소주방과 내의원에 심복들을 심어 두고 있어 무엄하게도 조선 왕들의 명줄을 자신들이 쥐고 있다고 기고만장해 합니다.’
실로 엄청난 고변이다. 음모에 가담한 사람 몇몇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적시하고 있었다. 소주방 주부, 내의원 의관들 화양서원 만동에서 고직일을 하는 의생들의 이름이었다. 어떤 이름은 먹으로 지워져 있었다. 당시 도제조였던 좌의정과 부제조의 이름들도 거명되고 있었지만 이들이 가담을 했는지는 적시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상소자 이종원은 구명에 도움이 될까 싶어 그랬겠지만 위험한 거명을 하고 있었다. 당시 귀양 가 있던 추사의 생부 김노경 대감이 이 음모를 어느 정도 갈파하고 있었다고 적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상소에 거명되는 것이 얼마나 중대한 의미를 지니는 것인지 몰랐던 모양이다. 이 때문에 필이라는 청년도 이처럼 추사 자신에게 들이대고 있는 것 같았다.

추사는 생각에 잠겼다. 그림은 선명하게 그려졌다. 그 당시에도 의심했던 상황과 과정이 설명되고 있었다. 하지만 치는 떨리지만 이제 와서 어쩌란 말이냐 싶은 생각이 이내 들었다.
자그마치 27년 전의 일인 것을…거명된 이들 열에 아홉은 세상을 떠났다. 그럼에도 이 상소가 세상에 나오게 되면 또 한 번 피바람이 불게 될 것이 자명했다. 음모와 악행의 범인인 노론벌열과 장 김, 그리고 만동묘 고직들은 별 탈 없는데 발고한 측만 우루루 엮여 당하는 그런 그림이다. 상소의 내용대로 부친 노경공이 내막을 알았다 해도 증거가 불충분했고 폭발력이 워낙 큰 위험한 사안이었기에 자식에게 까지도 말하지 않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또 그 때문에 안김은 기를 쓰고 부친과 자신을 제거하려 했던 모양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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