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46 F
New York
September 20, 2024
hinykorea
연재소설

<장편소설> ‘조선여인 금원’ 연재 제8회

안 동일 지음

4. 편조스님과 과지초당

추사 노 대감이 정신이 든 것은 저녁 무렵 자신의 서실로 쓰는 초당의 안방에서 였다.
“정신이 드십니까, 마님.”
“응 그래. 그냥 집으로 왔구나.”
“기억 하십니까?”
“대강은 기억이 난다. 연희패가 나타나 우리를 구했지?”
“네 천행이었습니다.”
“그런데 용산 아씨가 왔더냐?”
“용산 아씨라니요?” 달준은 전혀 모르는 모양이다.
“그래 알았다.”
체구 작은 할미탈이 자신을 무릎에 올려 놓았을 때 청포향이 강하게 났었다는 이야기를 달준에게 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그 청포향은 금원의 내음이었다.
“아 그러면 그 각시탈이..”
달준은 그제야 상황이 짐작되는 모양이었다.

불명을 태을로 한다는 옛 동학(同學) 임만성이 주석하고 있다는 광주 춘궁동 동사의 서동이 금원의 편지를 가지고 온 것은 재종제 덕희가 세상을 떠난지 반년 가까이 되는 계해년 늦봄의 일이었다.
서신에서 금원은 안부에 이어 과한 칭찬에 몸 둘 바 모르겠다고 일전 자신의 제망부가에 대한 추사의 경탄을 먼저 언급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일간 과지초당으로 찾아와 직접 가르침을 받고 싶으니 좋은 날짜를 일러 달라고 썼다.
원춘은 서동을 세워놓고 그 자리에서 답신을 썼다. 새달 보름 이후에는 언제든 좋다고. 그리고 이태 전 시집을 엮었다는데 그것도 가져와 줬으면 좋겠다고 썼다.
임만성과 함께 있다는 것이 다소 마음에 걸리기는 했다. 다 알지는 못하지만 미륵을 내세우고 있는 태을과 그 주변이 결코 온건하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막상 그녀가 오늘 내일 중에 당도 할 것이라 여겨지는 무렵부터 부쩍 밖의 기척에 신경이 써졌다. 사립문 열리는 소리라도 날라치면 더 그랬다.

이태전 겨울 덕희가 돌연 세상을 떠났을 때 금원이 지었다는 제문은 가히 명문장 이었다. 그때 초당을 떠날 수 없었던 원춘은 상가에 가지 못했지만 덕희의 친형 도희가 서동을 통해 보내온 제문을 볼 수 있었다. 재종형 도희도 적잖이 감탄 했던 모양이다. 원춘은 서찰을 보내 소감을 토로했다.
‘제문(祭文)을 읽어 보니 그 문장이 정(情)에서 나온 것인지, 문장에서 정이 나온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글의 기운이 편안하고 구성이 반듯하며, 움직임은 패옥소리에 맞고 면목은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과 그것과도 같습니다. 화장을 짙게 한 여인의 기미는 한 점도 없고 옛 선비의 요조한 품격만 있어, 턱 아래 3척 수염을 휘날리고 가슴속에는 5천자의 글을 담고 있는 제가 곧장 부끄러울 뿐입니다.’
후학의 글을 평가 하는데 인색했던 원춘 으로서는 파격이다. 글에 대한 칭찬은 사람에 대한 칭송으로 이어졌다.
‘우리 집안에 이런 보배가 있었는데도 어떤 이 인지 알지를 못하고 보통사람으로만 여겼으니 한갓 이 사람만 위하여 슬퍼하고 탄식하는 것이 아닙니다.’

실은 약간의 과장이 있었다. 집안에 이런 보배가 있는지 처음 알았다는 대목도 사실과는 조금은 달랐다.
화장을 짙게 한 여인의 기미라… 금원의 글을 설명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부지불식간에 사용한 표현이다. 그랬다. 원춘이 처음 본 금원은 화장을 한 여인이었다. 그리고 북학자 추사에게 금기의 단어였던 호색(好色)이란 단어를 휘호하게 했던 장본인이기도 했다. 용산 시절의 일이었다.
긴 세월의 제주도 유배를 마치고 도성으로 돌아 왔지만 원춘은 아직 근신해야 하는 처지였다. 마포나루에서 노들나루로 이어지는 용산강가 언덕 위 낡은 초옥이 그의 한정된 기거였다. 초옥을 마련해준 이가 바로 덕희였다.
초옥에 든지 며칠 지나지 않은 어느 날 저녁, 퇴청한 덕희가 찾아와서는 자신의 별장으로 가자고 권유 해왔다. 원춘이 망설이자 보는 눈 없는데 어떠냐고 졸랐다. 해배된 이의 초옥 밖 출입을 금하는 것은 관례였지 지엄한 법으로 정해진 일은 아니었다.

원춘은 못이기는 체 덕희를 따라 세 마장쯤 떨어져 있는 그의 정자로 향했다.
가는 길에 덕희는 오늘 형님을 꼭 모시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다면서 자신의 첩실 금원의 얘기를 했다.
“자네 같은 샌님 한테도 그런 풍류가 있었네 그려”
“다 형님 덕분 아닙니까.”
금원은 강원도 원주의 詩妓(시기)였는데 그 지역 동학들과 어울리다 알게 되었단다. 미모와 재주가 뛰어나 이내 눈에 들었는데 덕희가 추사의 종제가 된다는 사실을 알고부터 그녀가 부쩍 다가왔으며 마침내는 머리를 얹혀 집안에 들어앉히게 됐다는 얘기였다.
덕희는 금원이 자신에게는 과분한 여인이라고 연방 칭찬을 감추지 않았다.
이내 덕희의 별장에 당도했다. 말이 별장이지 문도 담도 없이 초옥 한 채와 정자가 전부인 단출한 곳이었다.
“누추합니다. 집으로 모셔야 하겠지만 보는 눈들이 있어서…”
“무슨 소리, 이만해도 황감일세.”
정자에는 조촐하지만 정성이 엿보이는 주안상이 차려져 있었다. 초옥 정지간에서는 집에서 따라왔을 찬모가 술과 음식을 덮히고 있는 기색이 있었다.
덕희의 권유에 따라 강이 내려다 보이는 상석에 앉았다. 한강의 본류인 용산 강이 내려다 보이는 초봄 저녁 어스름 경치는 일품이었다.      (계속)

 

Related posts

<장편소설> ‘조선여인 금원’ 연재 81회

안동일 기자

<장편소설> ‘조선여인 금원’ 연재 48회

안동일 기자

<장편 실록(實錄)소설>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2)

안동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