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동일 지음
금원의 삼천배
금원은 발길을 재촉했다.
경기도 광주 초입의 춘궁리, 기록과 함께 흔적도 없이 폐사된 고찰 미륵동사가 있던 땅, 桐寺址(동사지)의 허름한 토굴촌, 그곳이 금원의 주 거처이자 도반 동패들을 만난 곳이었다. 그곳은 태을 스님이 주석하는 곳이다. 자신에게는 엄격하고 남에게는 관대한 그런 스승이었다.
제대로 된 금당도 없었고 번듯한 강원과 선방도 없었지만 그곳은 빛나는 곳이었고 사람의 내음이 넘쳐 나는 곳이었다. 토굴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진짜 흙으로 된 굴을 생각하는데 언제 부턴가 스님들은 자신의 남루한 거처를 토굴이라고 불렀다.
외출 했다가 그곳으로 돌아가는 길은 언제나 설레었다. 예전에 동무들과의 시회가 열리는 정자 삼호정에 올라 갈 때도 이만큼은 아니었다. 두려우면 지고 설레면 이긴다고 했는데…
실의에 빠져 있던 금원에게 살 용기와 희망을 준 이가 바로 태을 스님과 현봉 스님이었다. 기실은 희망 뿐 아니라 살아야 될 명분과 소명을 주었다고 해야 맞는 말이다.
남편 시랑 김덕희가 갑작스레 떠나고 금원은 한꺼번에 세상을 다 잃은 여자가 돼야 했다.
한 몸 마땅히 건사할 데도 없었다. 남편 시랑의 본가와는 너무 크게 척을 졌다. 시랑이 외직으로 나갈 때 본댁을 제치고 금원을 동부인했던 것이 결정적인 연유였다.
“이제 자네는 자네의 갈 길을 찾아야 할 것이네.”아무리 동년배라 해도 그래도 아버지의 부인 이었는데, 시랑 대감의 장자는 금원에게 하대를 하며 살던 집에서 매정하게 내쫒았다. 기생첩실의 운명이 그랬다. 이 땅의 잘못된 신분제도가 그토록 억울하고 서럽게 다가선 것은 생을 통해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래도 자신을 괄시하지 않을 곳 이라고 찾은 곳이 소요산 자재암 이었다. 녹녹했던 시절 시주도 적잖이 했던 곳이다. 처음에는 주지 스님이며 공양주보살 등이 예전처럼 반갑게 대했지만 몸을 의탁 하고 싶다고 하니 반응이 싸했다.
어느날 공양주 보살과 사하촌 아낙들이 하는 말을 우연히 듣게 됐는데 금원의 가슴을 치는 말이었다.
“춘영당 마님은 이제 완전히 여기 계시겠다고 합니까?”
“마님은 무슨 마님, 이제는 저나 우리나 다 상것인데…”“자기가 언제부터 마님 이었다고 아직 저리 뻣뻣하게 구는지 모르겠어.”
“아무래도 습관이 되어 있을테니…”
“절집에서 살려면 콧대 저리 세우고는 힘들지 힘들어.”양주보살이나 덕이 엄마를 홀대한 적 없다고 생각 했는데 저들에게는 거들먹거렸던 것으로 비쳐 졌던 모양이다. 곰곰 생각하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금원은 다음날 아침, 사람이 잘 찾지 않는 명부전에 가 3천배에 돌입했다. 누가 시킨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해야 될 것 같았다.
바구니에 가득한 천알 짜리 염주를 세 번 돌려야 삼천배다. 염주 오백알 부터 부처님이 무릎에 쾅쾅 부딪혔다. 그 다음엔 관세음보살이 허리에 칼날처럼 파고들었다. 그리고 석가모니가 이마에서 뺨에서 젖어 들었다. 아미타불이 뱃가죽에서 백번이고 천번이고 당겨왔다. 어깨부터 시작해 나중에는 정수리로 모락모락 피어나는 김처럼 금원이 빠져 나가고 그 자리에 하심이 들어왔다.
‘옴 살바 못자모지 사다야 사바하’
한나절이 걸려 눈물과 땀 범벅의 3천배를 막 끝내고 후들거리는 다리로 명부전을 나서는데 법당 앞 마당에서 원주 스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중년 스님의 얼굴이 낯익었다.
금원이 절뚝거리며 그 앞을 지나려는데 그 스님이 먼저 반갑게 말을 걸어 왔다.
“보살님 혹시…”
승복을 입고 있었어도 대뜸 알아볼 수 있었다. 고향인 원주 한마을에 살던 명수 아재였다.
금원이 네 살때 하늘천자를 가르쳐 준 이, 명수 아재 그였다. 그가 바로 태을 스님의 큰 상좌 현봉이었다. 현봉은 요절한 고향동무 평생지기 죽서의 외삼촌이기도 했다.
현봉은 그동안 금원의 소식을 듣고 있었고 먼 발치에서 몇 번 본 적도 있었다고 했다,
그날 그렇게 현봉 스님을 만나지 않았으면 시골 기방에서 생각시 가르치며 얹혀사는 퇴기가 돼야 했을 터였다.
현봉은 금원이 사정을 다 말하지도 않았는데 다짜고짜 자신과 함께 가자고 했다. 부모님에 이어 애틋했던 동생마저 세상을 떠나 외톨이였던 금원에게는 그야말로 친 살붙이의 등장과도 같았다.
“자네와 나, 보통 인연인가, 어쩌면 이렇게 만나게 된 것이 우리 이번 생애 가장 큰 인연 이자 섭리 같네, 우리가 자네 같은 사람이 진정으로 필요함일세,”
그곳은 서러운 사람 핍박 받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라는 말에 고개가 주억거려 졌다.
춘궁리 금암산 널바위 언덕을 내려와 오른쪽 방죽길로 들어서는 순간 고향에 온 것 같은 포근함을 느꼈다. 입구에 서있는 부리부리한 눈에 코가 우뚝한 불가사리 돌 장승에도 묘하게 처연한 정감이 느껴졌다. 문득 추사의 절구가 떠올랐다.
濃抹秋山似畵眉(농말추산사화미)
圓潭平布碧琉璃(원담평포벽유리)
如將小大論齊物(여장소대론제물)
直斷硯山環墨池(직단연산환묵지)
짙게 가을을 바른 산들은 흡사 그린 눈썹을 그린 듯
둥근 못에는 푸른 유리 골고루 깔렸구나.
작고 큰 것을 논하며 따지려 하지 말자
벼루 산이 먹물 연못을 둘러쌓으니 여기서 끝을 보리라.
그때 그랬다. ‘여기서 끝을 보리라.’
큰 돌 탑 두 개가 금원에게 잘왔다고 손짓을 하는 것 같았다. 태을 노스님이 반갑게 금원을 맞았다.
“그래 촛불은 바람 불면 꺼지지만 큰 불은 바람이 불수록 더 타오르는 법이지. 잘 왔네.” 스님은 그때 그렇게 말씀 하셨다. (계속) <삽화 담원 김창배 선생의 동양 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