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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ptember 20,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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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장편 연재소설> ‘구루의 물길’ 연재 75회

안동일 작

에필로그,  장수왕 그리고 다물정신

2000년대 중반  7월 어느날,   서울 광화문 플래티넘 빌딩 13층 세미나장. 국무총리 산하 기구인 광복60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가 주관하는‘광복 60 새로운 시작’포럼의 주제발표와 지정토론이 끝나고 자유토론, 질의응답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날 포럼에는 한국 사학계의 원로의 한사람인 박성수 교수가 ‘광복60년의 역사적 의의’라는 제목의 주제를 발표했고 나는 주최측의 일원으로 준비 단계서부터 참여하고 있었다.
“교수님, 조의선인이 선비의 원류라고 하셨는데 설득력 있는 사료적 근거가 있는 말씀인지 아니면 교수님의 개인적 역사 철학을 담은 선언적 명제인지 한번 여쭙고 싶습니다. 또 다물 정신과 선비 정신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선뜻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내가 박 교수에게 상당히 도발적인 질문을 던졌다. 당시 나는 적잖이 흥분해 있었다. 박 교수의 이날 발표 가운데 나로서는 귀가 번쩍 뜨이는 부분에 대한 질문이었다.

이날 박 교수는 ‘광복 60년’의 의미를 세계사적 의미와 한국사적 의미로 나누어 설명하면서 지난 60년이 역사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세계사적으로는 부정적 요소가 더 많이 혼재되는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고 진단했고 상대적으로 한국사는 긍정적 요인이 더 발양되고 있다고 했다.?이런 때 우리의 다물 정신, 선비 정신을 제대로 구현한다면 세계사적 부정적 요인을 바로 잡을 수 있을뿐 아니라 우리 앞에 놓여있는 제 난관을 극복해 내면서 세계사의 주역이 되어 앞으로 60년을 떵떵거리게 될 것이라고 역설했다.

박교수는 다물에 대해서 역점을 두고 있었다. 발표 서두에 광복이 바로 다물 이라면서 삼국사기를 원용했고 다물 정신이야 말로 면면히 내려온 선비정신이며 그 원류가 바로 고구려의 조의선인이라고 했던 것이다.

선비정신의 구현을 강조하면서 다물을 그 근본의 하나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김학준 선생의 지론 아닌가. 그러면서 다물을 근간으로 한 선비 정신이야 말로 고구려시대의 조의선인으로 시작돼 신라의 화랑으로 이어졌고 근래에는 한말의 의병으로 이어지는 면면한 전통이 있다고 고구려 조의선인을 그 원류로 지목했던 것이 논지였다.
그말을 듣는 순간 나로서는 온몸의 숨구멍이 열리는 듯한 짜릿한 전율을 느껴야 했다.

장수왕과 니르아이신에 천착하면서도 그들의 역사적 활약의 의의를 어떻게 규정하고 결론 지을 것인가 고민하던 차에 귀가 번쩍 뜨이는 탁론이라고 여겨졌던 것이다. 박 교수는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역사적 근거가 물론 있지요. 말했듯이 고구려의 조의선인 제도는 고구려가 사해(四海)에 맹위를 떨치고 그 세력이 능히 수나라, 당나라를 물리칠 정도의 국력을 갖게 하는데 초석이 되었던 제도입니다. 고구려를 잔뜩 폄하했던 삼국사기에도 고구려 제22대 안장왕 때의 조의선인의 선배로 선발되었던 을밀선인(乙密仙人) 문하에는 조의선도 3000명이 다물방지가(多勿邦之歌)를 부르며 심신을 수련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을밀선인 뿐 아니라 고구려 부흥의 비조격인 명재상 을파소(乙巴素)도 조의선인 출신이고 또 그 후의 명 국상으로 칭송받는 명림답부(明臨答夫)도 조의선인 출신입니다. 연개소문(淵蓋蘇文)은 9세에 조의선인으로 선발되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자꾸 우리가 선비하면 조선조의 유학에 물든 유생을 떠올리니까 연결이 잘 안 되는 것 같은데 선비는 그들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조의선인의 덕목을 쉽게 풀이하면 청렴결백과 애국, 효심이라는 것으로 집약 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선비의 덕목 아닙니까? 또 조의선인 제도에서 앞선 학도를 선배라고 불렀는데 이 말이 나중에 선비로 된 것입니다. 틀림없습니다.”

박 교수는 확신에 차 있었다.

“그러면 다물 정신과 선비정신이 어떻게 연결 되는가 의문이라는 얘기인데 앞서도 말했지만 다물이란 말 자체에 대한 설명은 제왕운기에 더 자세히 나오지만 삼국사기에도 있다고 했지요.” 그러면서 박교수는 자신의 발표문을 다시 집어 들어 손으로 그 부분을 짚었다. “다물이란 말이 바로 광복이란 말입니다. 광복은 두말할 것 없이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는 것이죠.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 보면 고구려 시조 동명왕 2년, 6월달 송양왕이 나라를 들어 항복함으로 왕은 그 땅을 다물도라 하고 송양을 다물도주로 삼았다. 고구려 말에 옛땅을 회복하는 것을 다물이라 함으로 이와 같이 이름하였다(松讓以國來降 以其地爲多勿都 封松讓爲主 麗語謂復舊土爲多勿 故以名焉)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다물이 곧 광복의 옛말이라고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여기서 그 옛땅이란 구체적으로 어디를 말하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이견이 분분하지만 나는 잃어버린 옛땅을 중국의 중원땅이라 생각합니다. 요동땅이라고도 하나 단군 조선의 강역을 생각할 때 고구려인들은 요동 요서보다 훨씬 서쪽에 있는 땅 치우가 차지하고 있었던 중원 땅을 다물도(多勿都)라 그리워했을 것입니다. 광복과 연관된 발표였기 때문에 굳이 이것과 연관을 지었기는 했는데 조의선인 다물 정신으로 무장했다고 했을 때 그 다물 정신은 꼭 영토나 강역을 의미한다기보다 잃어버린 정신을 되찾는다, 되돌린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더 합리적일 수는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에게는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정신이 있습니다.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 이보다 멋지고 함축적인 인간 중심의 철학이자 통치이념이 어디 있겠습니까? 다물에서 되돌린다는 얘기는 바로 홍익인간의 정신으로 돌아간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선비의 덕목도 넓게는 홍익인간이 돼야한다는 것이죠. 이해가 됩니까?”

다소의 비약이 있는 느낌이라 상쾌하리만큼 시원하지는 않았지만 그뜻은 충분히 공감하고 받들 수 있다 싶었다.?어쩌면 우문의 현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무슨 정신이야 굳이 내가 그것을 전수했소 계승했소 하고 나서는 것도 그리고 그 증거를 댈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그리고 역사란 사가의 해석이기도 하기에 어떻게 종합 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 아닌가. 모두들 박 교수의 논지를 생각하느라 잠시의 침묵이 있었다.

박 교수가 부연 설명을 했다. “고구려의 조의선인들은 불교와 선도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여겨지는데 초기에는 특히 도가 계통 선도의 영향이 컸던게 사실입니다. 후일 유학이 본격적으로 고구려에 유입되면서 372년에는 국립대학인 태학(太學)이 설립되었고, 사립학교로는 경당이 세워졌던 것은 여러분도 다 잘 알겠고 국사(國史) 편찬도 행해져 일찍이 유기(留記) 100권이 편찬되었는데, 이것은 후에 이문진(李文眞)에 의해 신집(新集) 5권으로 개수된 일은 알고 있지요? 그러면서 조의선인과 유학이 만나게 됐고 그 정신이 더 큰 생명력을 지니면서 이어졌던 것입니다.”

조의선인과 선비, 그리고 선비정신. 그랬다. 박 교수는 조의선인의 철학을 얘기하면서 아직 사해동포론에 대해서는 관심을 돌리고 있지는 않았지만 장수왕이 추구했던 그래서 아진, 대창하에게 이르고자 했던 정신이 바로 이 정신이 아니었나 싶었다.

내 눈앞에 홀연 장수왕과 대창하의 모습이 그려졌다. 대창하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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