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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장편 연재소설> ‘구루의 물길’ 연재 65회

안동일 작

도림 스님과 한산성 전투

 

사나이의 우정은 마주하는 그 촌각에  그 눈빛으로 결정이 난다고 했지만 생면부지의 승려를 그것도 도나 덕이 높은 게 아니라 재주만 승한 듯한 승려를 대뜸 군주 앞으로 데려 간다는 것은 위험한 일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알았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지요, 오늘은 밤이 늦었으니 이곳 제 사랑에서 묵으시고 밝은 날 더 자세히 상의 하십시다.”
아진은 마음 속으로 이미 결정을 내렸다.
“듣던대로 장군은 참 호쾌하시기 짝이 없습니다.”
“제대로 배운 것 없고 가진 것 없는 저같은 사람이 의지 할 것이라고는 직관 하나 뿐입니다. 실은 이 직관도 마마께서 깨우쳐 주신 것이지요. 그러더 보니 더러 호쾌하다 소리도 듣습니다, 그려.”

도림은 그날밤 뿐 아니라 며칠을 더 아진의 집에서 묵은 후 홀연히 떠났다가 보름 쯤 후에 다시 돌아 왔고 또 며칠을 묶었다. 그 묶는 사이 거련왕을 만났다.
격구장에서였다.
거련왕은 도림에 대해 만족하는 눈치였다. 왕은 대창하를 불러 장시간을 숙의를 했다.
며칠 뒤 도림은 왕궁에 모습을 드러냈다.
왕에게 불법을 전하는 법사로 조정과 내군에 소개 됐다.
그러면서
도림은 사흘들이로 왕궁을 들락거렸는데 이내 불법 뿐 아니라 바둑과 장기의 명인으로 왕에게 그것들도 전수하고 있다고 소문이 났고 대소 기박을 좋아하는 신료들도 도림과 한판 승부를 겨루게 되는 것을 고대하게끔 되었다.

그러던 차 조정에서 적지 않은 소동이 있었다.
도림과 아진을 둘러싼 소동이었다. 북위에 다녀온 사신들을 위무하는 잔치가 열렸는데 이 잔치에 마침 참석했던 도림이 그 석상에서 아진에게 말갈 오랑캐라고 해대면서 삼한의 주인은 배달이라 불리우는 한민족이라면서 여진인이 이땅에 있을 필요가 없다고 큰소리를 질럿던 것이다. 불법까지 들먹였고 여진인을 총애하는 왕도 잘못 됐다고 고함을 쳤던 것이다.
그날 장수왕은 보기드물게 화를 냈고 자리가 서먹해져서 파장이 났다.
그 사건이 있으후 도림의 모습은 평양성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얼마 뒤 도림이 백제 개로왕의 바둑 사범이 되어 백제의 도읍 한산성 왕궁에서 떵떵거리며 살고 있다는 소문이 평양성에 퍼졌다.
장수왕과 대창하는 그 소문을 듣고 아무도 보지 않을 때 씽긋 웃었다.

얼마 뒤 백제에서는 대대적인 축성 토목 공사가 실시돼 가뜩이나 각종 부역과 징발에 시달리고 있는 백성들이 더 죽을 지경이 되었다는 소식이 들려 왔다.
밥술께나 먹는다는 대가 부호들도 왕궁 축성에 따른 자원 염출에 비명을 지르면서 왕에 대한 원성을 삭이고 있다는 얘기들이 들려 왔다.

-고구려군은 대로 제우와 재중걸루 고이만년의 지휘 아래에 북성을 7일 만에 함락하고 연이어 남성을 공격 하였다. 백제군은 성문을 굳게 닫고 방어 하였으나 고구려 군은 4개 방향으로 나누어 성을 들이쳤다. 때 마침 불어오는 바람을 이용해 성문을 불태웠다. 개로왕은 성문을 빠져 나가 서쪽으로 달렸다. 그러나 곤 붙잡혀 아차성으로 보내졌다. (삼국사기 권18 고구려 본기)-

(저자 주) 장수왕의 을묘정벌,

장수왕은 증조부인 고국원왕의 복수를 가장 큰 명분으로 하여 도탄에 빠진 동족 백제의 백성들을 구제한다는 이유를 들어 백제정벌에 나서게 된다. 그때가 475년으로 을묘년으로 이를 을묘정벌이라 한다.
을묘정벌에 나서기 전에 장수왕은 승려 도림을 첩자로 보냈다는데 이는 삼국사기 구당서 등 많은 사서에 등장하는 얘기다.

백제의 개로왕은 바둑의 고수였던 도림에게 푹 빠지게 되며 도림은 개로왕에게 반란으로 목숨을 잃은 선왕의 무덤건설과 치수사업, 성곽 보수 등을 권유하게 된다. 가뜩이나 어려운 사회에 개로왕의 무리한 토목공사가 더해지자 백제 백성들은 백제왕실에게 등을 돌리게 되고, 고구려의 침입을 염려하여 북위에 사신을 보내 원조부탁을 했지만 사신이 풍랑으로 가질 못해, 백제는 북위에게 도움 요청마저 못하게 되고, 도림은 백제가 혼란스러운 틈에 고구려로 도망가 장수왕에게 백제의 모든 상황을 보고하게 되고, 장수왕은 군대를 몰아 백제의 옛 도성인 위례성(한산성)으로 쳐들어 오고, 개로왕은 상좌평이던 아우 문주에게 왕족들과 함께 남쪽으로 내려가라 하면서 자신은 아들들과 도성을 지키겠다고 했다.

그러나 고구려의 군대들은 아리수를 순식간에 넘어 북성을 함락시키고, 7일 만에 개로왕이 머물던 남성까지 함락시킨다. 한편 남으로 내려갔던 아우 문주는 신라에 사신을 보내 원병요청을 하고 신라는 군대 1만을 문주에게 준다. 그러나 개로왕은 반란에 실패한 후 고구려에 망명중이던 고이만년등 백제 출신 장수에게 남성에서 붙잡혀 아차산에서 참수당하며, 문주는 뒤늦게 신라의 원병 1만을 이끌고 도성으로 왔으나, 이미 도성은 폐허가 되었고, 고구려군도 포로 8천을 데리고 돌아갈 준비를 하였기 때문에 전쟁은 끝났고, 문주는 왕위에 올라 도읍을 웅진으로 옮기고, 백제는 한층 더 약해진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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