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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ptember 20,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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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장편 연재소설> ‘구루의 물길’ 연재 61회

안동일 작

왕의 사돈이 되다

말한대로 미미의 아비는 내군 장수였다. 아진과도 전장을 함께 나서기도 했던 전우였다. 아깝게도 그는 8년전 백제와의 대 전투 때 왕을 보필하다 아차산에서 전사해 주위 모두를 안타깝게 했었다.
“아비도 살아 계셨다면 나라를 위해 하는 일을 적극 장려 했을 것이라 생각 됩니다.”
“그래 네 뜻은 알았다. 생각해 보도록 하자. 참 당돌한 녀석들이 이렇게 많구나.”
“마마 진정 위와 전쟁을 불사 하시렵니까? 그러면 백성들이 더 괴로워집니다.”
“이제 알았다 그만 하거라.”
일은 이렇게 해서 일사천리로 진행 되게 되었던 것이다.
왕은 그날 아진에게도 의견을 물었지만 아진으로서는 미미의 충정이 갸륵해서 감동했다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미미는 애써 명랑한 채 하며 “장군님 께서도 제가 공주가 되는 영예를 가질 수 있도록 도와 달라”며 애교를 떨었다.

일이라는 것이 순서가 있고 모든 일은 사필귀정인 법이다. 미미의 충정이 진실 된 것이었기에 하늘은 그에게 걸 맞는 상을 내렸던 모양이다.
미미를 양녀로 맞아 경문이라는 새 이름이 내려 졌고 위나라 에는 초상이 보내져 위 황제가 너무도 흡족해 한다는 전언이 있으면서 양국의 국혼은 다시 무르익어 가는 듯 했다. 그러나 전술한 대로 위 현조가 죽자 국혼은 없던 일이 되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경문의 일이 난감한 쪽으로 흐르게 되었건만 왕은 기다렸다는 듯이 아진에게 둘째 아들을 데리고 궁에 들라 했고 경문을 대면하게 했고 두 사람을 맺어 주었던 것이다.
“내가 자네의 혼사에는 항상 중신을 서게 되는군.”
새옹지마의 일은 이를 두고 말함이었다.
미미, 경문 공주는 후일 발해국이 세워 졌을 때 상징적 국모로 모셔졌는데 동경대전에는 그녀의 일화가 아름다운 충절에 아우른 기개로 유려하게 쓰여져 있고 그녀의 사당은 수도 중경의 가장 중심부에 건립되었다.

 

 16. 백제와의 한산성 전투

 

 -고구려군은 대로 제우와 재중걸루 고이만년의 지휘 아래에 북성을 7일 만에 함락하고 연이어 남성을 공격 하였다. 백제군은 성문을 굳게 닫고 방어 하였으나 고구려 군은 4개 방향으로 나누어 성을 들이쳤다. 때 마침 불어오는 바람을 이용해 성문을 불태웠다. 개로왕은 성문을 빠져 나가 서쪽으로 달렸다. 그러나 곤 붙잡혀 아차성으로 보내졌다.   (삼국사기 권18 고구려 본기)-

고구려 조정이 들끓었다.
그렇지 않아도 도미와 아랑의 일로 백제 개로왕에 대한 고구려 조정의 인식이 아주 안 좋았던 터에 이런 일 까지 있고 보니 그냥 넘어갈 수 없다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개로왕이 문제는 문제였다. 그는 용력과 욕심만 있었지 지혜가 없는 왕이었다. 거기다 호색하고 잔인하기까지 했다.
지도자를 잘못 만났을 때 백성이 겪어야 하는 어려움을 개로왕 시대의 백제가 여실히 보여 주고 있는 터였다..
“아니 어떻게 이런 글을 외국에 보낼 수 있단 말이오, 호태왕 마마 이래 우리가 그래도 동족이라고 저희를 얼마나 배려해 주었는데…”
문서 수발을 맡고 있는 중하 대부 하경이 나서 혀를 차며 말했다.
“일국의 국왕 이라는 자가…”
“도저히 묵과 할 수 없는 일이오.”
“대왕께서도 몹시 진노하시면서 대책을 구하라 우리에게 이 글을 읽어보라 하신 것 아니오.”
“하지만 이글이 진본인지 아닌지를 확인할 길이 없으니…”
“글쎄 위나라 에서 자중지란을 일으키려는 간계를 쓰는 것 같기도 하고…”
“내가 보기엔 진본이오. 지금 위나라가 가짜를 만들어 우리를 농락하려 할 이유가 없소”
“그렇지요 지금 이 시점에서 위가 굳이 우리와 적대하려는 생각을 갖고 있다고 보기에는…”
“위에서도 얼마나 기가 찼으면 서한을 우리에게 보내 왔겠소?”
“내가 보기에도 서한은 틀림없는 진짜요.”
“그래도 국서를 이렇게 내 돌린다는게…”
의론이 분분 했다.
백제의 개로왕이 위 현제에게 보냈다는 상소문 때문이었다.
일국의 국왕이 다른 나라에 보내는 글을 상소라고 적은 것도 문제 였지만 그 내용은 더 했다.
고구려 왕들을 천하의 몹쓸 폭군 망나니로 묘사하고 있었다.
꽤 긴 글이었다. 글에서 개로왕은 자신을 북위의 현제에게 칭신을 하고 있었다.

‘신이 동쪽에서 나라를 세우자 이리가 길을 막고 있습니다. 그래서 대대로 황제의 신령스런 교화를 잇고 있으나 번국의 예의를 받들 수 없습니다. 멀리 황제의 대궐을 바라보나니 달려가는 정이 망극 하오며 서늘한 바람이 가늘게 느껴 집니다….’
그러면서 험한 뱃길로 신하를 보내는데 자신의 하소연이 ‘황제의 귀에 들어가서 뜻을 펼 수 있다면 그 소식을 아침에 듣고 저녁에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는 말까지 하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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