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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장편 연재소설> ‘구루의 물길’ 연재 59회

안동일 작

왕의 사돈이 되다

정란에게는 자신이 정해 놓은 신랑감이 있었다는 소문이었다. 군문에 있는 청년 장교 였는데 둘의 사랑은 이만저만 깊은 게 아니었단다. 그러나 젊은 장교마저 나라의 일이 더 중하다면서 왕과 부친의 뜻에 따를 것을 종용하자 정란이 일을 저질렀다는 그럴듯한 소문이었다. 그의 곁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고 유서까지 써 놓고 사냥을 가서는 일부러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는 얘기였다.
하지만 어느 것도 확인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일이 일어나자 고진하 대가가 왕과 나라에 불충이며 집안의 망신이라고 하면서 황급히 약식으로 장례를 치룬 뒤 국내성 인근 자신의 향리 영지로 낙향 해 버렸기 때문이다.

사고 당시 사냥터에 몰이꾼으로 동원 됐던 일꾼들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굳이 말을 타고 좁은 산길 잔도에 들어서지 않아도 됐는데 만류에도 무릅쓰고 말에 올라 좁은 길 낭떠러지를 들어간 것, 그리고 빠른 속도로 몰았던 것은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던 것이 아니냐는 추론이 나오게 됐던 것은 사실이다.

어쨌든 고구려 여인의 꺽달진 기상을 중국에 알린 계기는 되었지만 외교적으로는 난처한 일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가마를 메고 온 사신은 정란이 죽었다는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으며 고구려가 대국을 업수히 여기고 있다고 노발대발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당사자가 없는데 어찌 할 것인가. 사신이 빈가마를 메고 돌아갔고 급히 다른 사신이 달려오듯 평양에 와서는 다른 인척 공주라도 보내야 할 것이라고 볼멘 소리를 던졌다.
하지만 종실에는 적당한 처자가 없었다. 조카가 아닌 조카 손녀 뻘의 처자가 몇 있기는 했지만 그들은 너무 어렸고 또 그들의 아비들이 선뜻 나서지 않았다.
왕실과 조정의 고민이 커 갔다.

그러던 어느날 아진은 전날 전해진 왕의 부름에 따라 이른 새벽 을밀대 인근 왕실 수련장으로 나갔다. 그곳은 왕이 매일 아침 터오는 동을 마주 하면서 체력을 단련 하는 곳이었다.
왕은 출정 하거나 지방 순시를 하는 날을 제외 하고는 아침 체력 훈련을 하루도 거르지 않았는데 가끔씩 중요한 사안이 있을 때면 측근들을 그곳으로 불러 함께 훈련을 하면서 일을 상의 하곤 했다. 아진도 자주 불려가는 축의 하나였다.
서둘렀던 까닭에 왕의 일행보다 아진이 먼저 도착 했다.
여나문 평 밖에 되지 않는 수련터 에는 비오는 날을 대비해 작은 전각이 세워져 있었고 질긴 멍석이 깔려 있을 뿐 별다른 시설은 없었다. 다만 평양성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동향으로 꾸며져 있어 일출을 맞을 수 있게 돼있는 점이 특출난 곳이었다.
아진이 경비를 서던 숙직 병사의 인사를 받으며 전각 옆으로 올라가 멍석 위에서 제자리 뛰기를 잠깐 했을 때 왕이 남녀 시비 두사람 만 대동하고 수련터로 올라왔다. 여자 시비가 바로 미미였다. 아진도 기억하는 전사한 하급 장교의 딸이었다.
“벌써 나와 있었구나.”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하는 아진을 보면서 왕이 말했다. 선입견이었는지는 몰라도 여느때 처럼 힘이 넘쳐 있는 목소리는 아니었다. 어슴프레 동이 터오고 있었다.
“자 시작해 보자.”
경장의 왕은 멍석위에서 팔을 좌우로 흔들면서 몸 풀기를 했고 각양한 동작의 맨손 체조가 끝난 뒤 시비가 얼른 펼쳐 놓은 방석위에 앉아 명상호흡을 시작했다. 아진도 왕과 비슷한 동작으로 방석 위에 앉아 조식에 들어갔다.

왕과 자신의 호흡법은 조금 달랐다. 아진은 어린 시절 흑치 사범에게 배운 운기조식법으로 단전에서 시작해 회음을 거쳐 임독 양맥으로 순환하는 진기 운용을 했는데 왕은 그냥 단전에서 외부의 기를 받아들여 자연스레 온몸으로 퍼져 가게 하는 단 수련 계통의 호흡법을 하고 있었다. 결과로 보면 크게 다를 것 없는 일종의 습관 차이 였지만 왕의 체질에는 그 방법이 훨씬 유용하다고 아진도 결론 내려놓고 있었다.
“돌로 단단히 지은 모옥에서도 밖에서 고함치는 소리가 들리는 법 아니냐. 소리도 그럴진데 우주의 진기가 음식으로 이루어진 우리의 얇은 뱃살을 뚫지 못한단 말이냐. 진기는 그대로 들락날락 하게 마련이지.”
왕의 지론이었다.
왕은 새벽 여명, 동터 오는 무렵이 우주의 진기가 가장 왕성한 때라면서 이 시기에 훈련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동이 터오고 있었다. 아진은 찬란한 햇살이 자신의 단전으로 파고 들고 있음을 느꼈다. 왕의 말대로 일출을 마주하고 호흠을 하면 기가 왕성해 지는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집안에서는 이런 일출을 맞아할 수 없었다.
차 한잔 마실 시간 쯤의 호흡이 끝나고 왕은 다시 가벼운 맨손 체조를 했다. 난간위에 다리를 얹고 상체를 굽히는데 머리가 무릎에 닿았다. 누가 이 노인을 칠순을 넘겼다고 할 것인가. 맨손 체조가 끝나면 왕은 격구채를 오십번 쯤 흔들었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경쾌하게 들렸다.
“공을 친지도 꽤 오래되는구나? 자주 나가느냐?”
왕이 격구채를 시비에게 건네며 아진에게 말했다. 아진과도 안면이 많은 미미였다.
“저도 나간지 꽤 오래 됩니다. 요즘 다들 경황들이 없어서…”
사실 그랬다. 정란의 일, 위나라와의 혼사 문제도 그랬고 신라의 일이며 백제의 일도 수월치 않았고 흑수 말갈 쪽도 조용하지 않았다. 거기다 왕은 토지제도의 개혁을 단행하려 중신들을 다그치고 있었다.
“자 앉자.”
왕이 평상에 앉으면서 옆자리를 가리켰다. 아진이 옆에 앉았다. 이곳 수련터에서나 가능한 파격이었다.
“기억나느냐? 이곳으로 옮겨와서 너와 바로 이곳에 올라 얘기하던 때를…”
왕이 아침 햇살에 잠긴 평양성을 내려 보며 말했다.
“예 기억 합니다. 그래서 송구스럽습니다.”
벌써 40년이 다 돼가는 일이었다.
그때 평양으로 도읍을 옮긴 뒤 성곽이며 도로공사들이 막 끝났을 때 그때도 왕은 아진을 옆에 앉혀 두고 삼한의 역사를 일러 주면서 반도를 하나로 한 해상왕국의 꿈, 백성들을 더 살찌우는 나라를 만들자고 다짐했었는데 아진이 그 일을 잊을 리 없었다. (계속)

  • 위 사진 고구려 복식 발표 페션쇼 피날레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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