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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ptember 19,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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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장편 연재소설> ‘구루의 물길’ 연재 57회

안동일 작

 왕의 사돈이 되다.

부인, 왕후도 한명 밖에 두지 않고 절제의 생활을 해왔던 왕에게 1남 1녀 라도 있다는 것은 그나마 다행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 무렵, 이 일이 일어난 466년 467년 때에는 1남 1녀도 다 장성을 해서 40줄이 훨씬 넘어선 때였다.
아진이 장수왕과 사돈 관계를 맺게 된 데에는 전적으로 위나라 문명태후의 욕심이 그 근원이 됐다고도 할 수 있다.
466년, 장수왕 53년이 되던 해 신년 초, 북위에서 사신이 왔다.
북위가 436년 북연을 멸하고 439년에 화북지방을 거의 통일하여 고구려와 국경을 접하게 된 이래 풍홍의 일 등 걸끄러운 일이 몇몇 있기는 했지만 장수왕은 사신을 자주 보내 북위와의 우호관계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였고 북위도 고구려를 남달리 예우하면서 선린의 틀을 깨지 않았다.
이처럼 양국의 관계가 돈독하던 때라 매년 동지 무렵이면 양국에서 거의 동시에 사신을 출발 시켜 신년 하례를 하곤 했었기에 특별히 조정은 그 사신일행을 특별히 주목하지는 않았다.
장유라는 문관이 신년 사신단의 정사였다.
평양성에 도착 한 장유는 장수왕을 배알 하면서 지난번 중추절 고구려 사신단이 산삼, 흰사슴, 황금, 백은, 약재 등 귀한 물품을 가져 왔던 것에 대해 자신들의 위 왕이 매우 흡족하게 여겼다는 인사를 먼저 하면서 자신의 선물 보따리를 풀었다.
거기에는 최고급 비단이며 멀리 서역에서 넘어온 호박 장식이며 노리개 류 그리고 거울 등 진귀한 것들이 즐비했다.
“이 보화들은 특별히 태후 마마 께서 고구려 왕실의 여인들에게 보내는 선물입니다.”
호화스런 상자를 직접 열어 보이며 사신 장유는 저 혼자 만족스런 웃음을 흘렸다.
장유가 왕실의 여인들을 위한 선물이라며 특별히 여인들을 거론 한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날 연회가 끝나고 숙소로 들어가 하룻밤을 지내고 난 다음날, 장유는 사신을 접대하는 책임을 맡은 주부에게 이런 말을 넌지시 건넸다.
“태후 마마의 은밀한 지시인데 이제 양국의 관계도 크게 돈독해진 마당에 혼사를 맺었으면 하는 것이오.”
“혼사라니요?””고구려의 공주가 우리 위 황실로 출가를 하는 것을 이름이오. 태후께서는 고구려 왕실의 여인을 며느리로 맞고 싶으신 게요.”
이렇게 해서 그 얘기가 나왔다.
하지만 고구려 왕실에는 혼인 적령기의 공주가 없었다.
장유는 혼기에 찬 공주가 없다는 말을 믿지 못했다.“그럴 리가….”
“정말이오, 우리 폐하께서는 후궁을 두고 계시지 않소, 왕후 마마의 소생으로는 왕자 한분과 공주 한분이 계시지만 모두 장성 하시어 중년을 넘으셨단 말이오.”“후궁이 한명도 없다는 말이오. 그럴 리가.”
장유는 계속 그럴리가를 되뇌었다.
“어쨌든 귀 왕실의 뜻은 폐하께 전해 올리겠소.”
주부는 이렇게 말하고 사신 장유의 얘기를 왕에게 고했다.
하지만 장수왕도 또 조정 신료들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넘어가려 했다.
실제로 공주가 없는데 어떻게 하란 말이냐는 심정이었다. 하지만 일은 그리 간단히 매듭지어 지지 않았다.
그랬기 때문에 대창하의 대씨 가문이 왕의 사돈 가문이 되는 그런 일이 일어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실제 이 일이야 말로 장수왕과 아진의 행장 가운데 우리 쪽과 중국 쪽 사서에 그리고 구전되는 설화로도 남아 있는 거의 유일한 일화이기도 하다. 구전 설화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위나라 현왕은 고구려왕이 진심으로 자신과 위나라에 복종하고 있다고 늘 대신들에게 자랑하였다.
그러나 그 나라의 장로 장유는 고구려가 굴복하는 듯 하면서 계책을 꾸며 언제든 공격해올 가능성이 있으니 고구려 왕실 사람을 볼모로 잡아두는 것이 안전하다고 간하였다.
위 왕은 장유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계책을 물었다.
장유는 고구려 국왕의 딸을 왕비로 맞으면 고구려 국왕도 거절치 못할 것이라고 대답했다. 이에 위왕은 고구려 사신을 불러놓고 6궁의 왕후가 다 차지 않아 고구려 공주를 왕후로 맞고 싶으니 고구려 국왕에게 가서 전하라고 하였다.
장수왕은 고구려 공주를 인질로 삼으려는 위나라의 의중을 간파하고 분개하였다.
다행히 그는 딸이 한명 있었는데 이미 출가한 뒤였다. 이 사실을 위나라에 알리자 위왕은 장유와 상의하여 국왕의 딸이 시집갔으면 국왕 동생의 딸도 된다고 사신에게 전했다.
장수왕은 분개했지만 나라를 위해 동생의 딸 효문 공주를 시집보낼 수밖에 없었다.
장수왕의 서신을 받아 본 위나라에서는 효문 공주를 맞으러 상서 이부(尙書 李敷)를 고구려에 보냈다. 그러나 효문 공주는 지난날 연나라가 위나라의 침략을 모면하기 위해 공주를 시집보냈으나 결국 위나라에 의해 망했다며 결국 자결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위왕은 다시 장유와 상의하여 사신을 보내 왕족이라면 어느 여인이라도 상관없다는 뜻을 알렸다.

노발대발하는 장수왕에게 한 재상이 궁중의 아름다운 궁녀를 하나 뽑아 양딸로 삼은 뒤 위왕에게 보내자고 간하였다. 이에 장수왕은 생김새가 예쁘고 악기를 다룰 줄 알며 서예가 출중하고 그림도 잘 그리며 잡기에 능한 궁녀 한 사람을 양딸로 삼고 경문공주라 칭하였다.
그 즈음 위왕은 병석에 있었는데 장수왕이 양딸을 시집보내려 한다는 얘기를 듣고 불쾌해 하다가 경문공주의 초상을 보고 제안을 받아들였다.
장수왕은 경문공주를 데려갈 위나라 사신을 기다렸으나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도 오지 않았다. 반년이 지난 후 위나라 사신이 와서 위왕이 승하하였으니 조문을 하라고 알렸다.
그 후 장수왕은 경문공주를 친딸처럼 아꼈으며 공주의 예를 갖춰 한 젊은 문관에게 시집을 보냈다. 경문공주는 그 젊은 문관과 가정을 꾸미고 백년해로하였다고 한다.
여기서 젊은 문관이 바로 아진의 둘째 아들인 대경서 였던 것이다.
실제 대경서는 문관이 아닌데 민간의 사람들은 문관이 더 지체가 높고 공주의 부마로 어울린다고 생각 했던 모양이다.
앞에 언급한 『삼국사기』장수왕 54년조(466년)와 구전 되어온 이야기와는 약간의 차이가 있는데 삼국사기는 언제나 중국 중심으로 고구려를 깎아 내리고 있다는 것을 다시 확인 하게 하는데 그 연도나 과정은 설화 보다는 신방성이 있다고 여겨진다.

다시 우리 이야기로 돌아가면 전후 사정이며 대창하 장군이 왕의 사돈이 되는 과정을 살펴보기로 하자.
장유의 통보가 처음 있었을 때만 해도 고구려 조정은 혼기에 찬 공주가 없는데 어쩔 것이냐 싶어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런데 몇 달 뒤 다시 사신이 왔다.
이번에는 장관급인 상서가 사신으로 왔다.
공주가 없으면 왕실의 종친 중에서 마땅한 처자를 골라 보내라는 주문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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