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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장편 연재소설> ‘구루의 물길’ 연재 53회

안동일 작

 실직주 출정

왕이 말머리를 돌려 제장들을 한번 훑어 본 뒤 입을 열었다.
“제군들이여 보았는가? 조상신이 점지해준 우리의 영토에 떠오르는 찬란한 햇살을… 태양을 맞이한 자랑스런 나의 고구려의 장병들은 듣거라, 오늘 우리는 동족의 장한 뜻을 배반한 못된 무리들을 징치하기 위해 길을 떠나 이곳에 왔다. 나는 이번 출병이 신라에 대한 우리의 마지막 출병이 되었으면 한다. 백잔과 더불어 신라는 우리 동족이다. 동족 간의 전쟁은 이제 그만 해야 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
왕은 아진과 물길군을 쳐다본뒤 잠시 말을 먼췄다.
“물론 우리 군에는 물길족도 있다. 물길도 마찬가지다. 예로부터 물길과 굴안 그리고 맥족은 한 뿌리의 형제들이 아니었더냐? 어쨌든 세상에는 질서와 이치가 있는 법이다. 형제들은 사이좋게 지내야 하는 법이다. 우리가 장형의 도리로서 신라를 형제국으로 생각하고 그들의 어려운 처지를 딱하게 여겨 연원을 가지고 도와 왔었는데 그들이 참혹한 도발을 해왔던 것이다. 잘못은 근본부터 바로 잡아야 하는법, 내 충성스런 제장병들과 더불어 저들에게 따끔한 교훈을 주고자 한다. 역사를 만들고 백성들을 편안하게 한다는 긍지를 담고 출정에 나서도록 하자, 알았는가? 나의 자랑스런 장병들이여.”
“명심하겠습니다.”
고구려 장병들의 외침소리가 아침 동해바다의 쟁반 같은 태양을 받쳐 오르는 열풍처럼 퍼져나갔다.

각오와 준비가 세상일의 절반을 가늠하는 법. 당시의 출병은 이렇다 할 전투 없이 고구려군의 대승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
사건의 원흉이라 할 수 있는 하슬라성에 먼저 당도하게 되었다.
그런데 하슬라 성은 비어 있었다. 고구려 대군이 쳐들어 온다는 소식을 듣고 하슬라 군은 이미 실직주로 모두 달아났던 것이다.

성 안팤에는 거동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노인들을 위시한 어린아이와 부녀자들 밖에 없었다. 저녁 지을 시간이었는데도 어디서도 연기조차 오르지 않았다.
그래도 철모르는 아이들은 길가에 나와 고구려 군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남루하고 초췌한 가장 작은 체구의 아이의 모습을 보고 한 병사가 자신이 지니고 있던 전병을 건네 줬다. 아이들이 우루루 몰려 들어 서로 차지하려 다투는 모습이 이어졌다. 힘이 약한 어린이는 전병을 전혀 차지 못하고 큰 아이들에게 빼앗기자 울음을 터 뜨릴 기세였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병사들이 저마다 전병이며 곡식가루 마른 떡등 먹거리를 꺼내 아이들에게 나눠 줬다.
나중에는 노인들과 여인네 들도 몰려들어 병사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행렬이 소란스러워지자 왕이 그쪽을 쳐다보며 무슨 일이냐고 물어 왔다.
“병사들이 주린 백성들에게 먹거리를 나눠주고 있는 모양입니다.”
왕은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일 뿐 더이 상 말을 하지 않았다.
그날 밤 왕은 하슬라 성에서 하루를 묵었는데 수송중인 군량을 풀어 백성들을 구휼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하슬라 성에서는 밤이 늦은 시각이었는데도 여기저기 촌락의 정지에서 연기가 올랐다.

다음날 아침 고구려군은 동이 트기 전에 군장을 꾸려 실직주로 향했다.
동이 터 올 무렵 군단은 하슬라 경계를 벗어나 잔도에 접어들고 있었다. 빠른 속도로 진군하고 있었다.
아진은 왕의 한마신 쯤의 뒤쪽에서 말을 타고 선봉군 대열의 중간에서 그를 따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이 났는지 왕이 말의 걸음을 늦추게 하더니 고개를 돌려 아진을 보고 말했다.
“아진, 자네가 먼저 하슬라에 가야 겠네?”
“무슨 분부이신지?”“엊저녁 곰곰이 생각을 했는데 아무래도 생각을 바꿔야 겠네”
“소장은 아직…”“내 이번에 신라의 조적을 완전하게 징치 하여 다시는 딴 마음 먹지 못하도록 하려 했는데 어젯밤 백성들의 고초를 목격하고 나서 생각이 바뀌었구나 백성들이 저토록 고생을 하고 있는데 백성의 고생보다 다 큰일이 나라에 어디 있단 말이냐. 신라도 진작부터 내 나라라고 생각 하고 있거늘 이들 백성들의 아픔도 알아야 된다고 생각을 했느니라.”
“예 그 뜻 충분히 헤아리고도 남습니다. 마마, 하오면 소장이 어찌하면 좋은지 하명 하여 주십시오.”
아진이 왕을 쳐다보며 말했다.
“날랜 군사 3천만을 이끌고 득달같이 실직주로 먼저 가 고구려 군의 위엄을 과시하고 있거라. 그러면 반드시 신라 진영에서 어떤 움직임이 있을 것이다. 그러면 신라의 마립간이 직접 와서 사죄하기 전에는 군사를 돌릴 수 없다면서 계속 세를 과시 하도록 하여라.”
“예 알겠습니다.”
“그래, 병법에도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가장 윗길의 승리라고 하지 않았더냐 내 잠깐 그이치를 있었듯 싶구나.”
“아닙니다 마마. 때론 긴장할 만큼 조여져야 하는 법 아닙니까? 이번 출동은 그런 점에서 좋은 경험이 되었습니다.”
“그래 어서 가거라.”
군사의 행진이 멈춰졌고 아진은 자신의 직속 말갈군 3천 기병을 이끌고 나는 듯 실직주로 향했다.
실직주 까지는 몇 개의 어촌 부락과 산촌이 있었지만 아진군은 그쪽은 개의치 않고 질풍같이 말을 몰았다. 실제 그들 부락에서는 군사는 커녕 제대로 된 인기척 조차도 없었다.
하지만 실직주는 하실라와 그곳 들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를 것이 자명했다. 군사의 대비가 그곳으로 집중돼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도로는 바닷가를 끼고 진작부터 닦여져 있었다. 오른편으로 험산 준령이 이어져 있었기에 풍광은 좋았지만 그 풍광을 즐길 만큼 여유 있는 행차는 아니었다.
혹시 있을지 모르는 매복에도 신경을 써야 했다.
실직주에 거의 다다른 오색산 어귀에서 적군 신라군을 만나기는 했다. 2-3백 쯤 되는 척후병이었는데 그들은 산중턱 저만큼에서 고구려군의 기마병이 내는 흙먼지를 보자 이내 군사를 돌려 실직주 쪽으로 달아나는 것이었다.
실직주 성 으로 들어서는 작은 벌판 어귀에 당도 했을 때는 해가 뉘엇 뉘엇 넘어가는 저녁 무렵이었다. 성곽이 멀리 보이고 있었고 벌판 저 만큼에 꽤 큰 목책이 세워져 있어 그안팤에 참검과 투구가 보였다.
아진은 군사를 멈추게 했다.
“오늘은 여기 까지만 진격하고 일단 야영 준비를 한다. 석식을 풍족하게 짓도록.”
“예 알겠습니다.”
간단한 명령을 내렸고 말갈 기병대는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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