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46 F
New York
September 20, 2024
hinykorea
연재소설

<장편 연재소설> ‘구루의 물길’ 연재 52회

안동일 작

 14. 실직주 출정

– < 삼국사기>권18 고구려본기 장수왕 56년 2월조에 신라의 질직주성을 점령했던 <말갈>군대 1만명은 그 이전시기에 말갈족의 일부가 고구려의 통치하에 있으면서 군대로 초모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같은 책 신라본기 나물니사금 40년조, 백제본기 진사왕 3년조에 보이는 <말갈>군대 역시 고구려에 속한 무력으로서 그 이전시기부터 고구려의 통치하에 있던 말갈족 출신이였다고 인정된다. (손영종 고구려사1권)-

일은 묘하게 꼬였다. 굳이 대군을 동원해 신라를 칠 필요가 있는 시점이 아니었는데도 그럴 수 밖에 없게 된 것이다.
말객 창표는 성질이 급하고 거친 면이 있기는 해도 충성심이며 용력은 뛰어난 장수 였다.
그런 나라의 들보와 같은 장수를 잃었다는 것은 이만 저만 한 손실이 아니었다.
그것도 자신들을 도우려 나가 있는 주둔지의 신라 지방 관리의 소행이었다니 그대로 묵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건인즉 이랬다.
신라 영역으로 되어있는 실직주(지금의 삼척) 인근에는 내물 마립간 때부터 고구려 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신라의 요청에 의한 일이었다. 그 시절 왜군을 몰아내려 고구려 대군이 출병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신라의 왕과 조정은 고구려군 일부가 계속 계림에 남아 자신들의 사직을 지켜 달라고 청원 했기에 일부 병력이 남아 있게 됐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면서 계림에서는 철수 했지만 신라 북부이며 고구려와의 경계인 영동지방에는 아직 고구려군이 신라 영역 안에 주둔하고 있었던 것이다.
창표가 바로 실직주 지방 주둔군의 장수였다. 직위는 말객 이었지만 중장군 급이 지휘하는 병력 규모를 통솔하고 있었다.
창표는 타고난 무인이어서 한시도 병장기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병졸들의 훈련은 실전을 방불케 했기에 고구려 군 병졸들은 실직주 파견을 죽는 것 만큼 싫어할 정도였다. 그는 시간만 나면 사냥을 즐겼다. 병졸들과 함께 산속을 누비면서 산짐승 들을 공포에 떨게 했고, 사냥이 끝나면 사냥터에서 한바탕 질펀한 잔치를 벌이곤 했었다.

조정, 병부에서도 그의 사냥이 다소 지나친 점이 있다는 통문이 올라와 논의 된 적이 있었지만 고향을 떠나 타지에 주둔 하고 있는 병력의 사기와 훈련을 위해서는 크게 문제 될 것이 없다 해서 묵인하고 있었던 터였다.
그랬는데 그날은 조금 도에 지나쳤던 모양이다. 몰이꾼들이 몰아댄 멧돼지며 들노루가 산아래까지 쫒겨 가는 통에 실직주 성 아래 마을까지 떠들썩 하게 했던 모양 이었다.
실직주 성주 아직은 신라 왕실의 일원이었다. 아찬 벼슬에 까지 올랐다는데 무슨 연유에서인지 중앙에서 소외되어 실직주로 와 있었다. 그가 실직주에 온 직후부터 고구려 군들과 티격태격 하는 일이 많았다.
예전같으면 쉽게 넘어갈 일도 아직이 트집을 잡고 나섰다. 아직은 고구려 군이 성안이나 인근 마을에 들어서는 것을 유난히 신경 쓰곤 했었다. 식량이야 보급부대가 정기적으로 보급을 했지만 딱이 정하지는 않았지만 부식은 실직주 성에서 제공 하는게 관례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아직은 이를 놓고도 위세를 떨었던 모양이다.
부식 공급을 놓고도 상황이 여의치 않다는 보고가 창표로부터 올라와 있어 병부에서는 그문제 역시 신경을 쓰고 있던 차 였다.

사고가 난 뒤 헐레벌떡 평양으로 달려온 연락병의 상세한 전언에 따르면 창표는 아직의 군사들에게 당한 것이 아니라 인근 하슬라(강릉)의 군사들에게 당했다는 것이었다.
하슬라는 실직주 바로 위에 있는 성으로 실직주 성주의 지휘를 받는 중간규모의 성이었다.
하슬라의 중랑장 구리모가는 아직 못지않은 반고구려 인사였던 모양이었다.
그날 점호를 받으러 왔다가 고구려군이 사냥을 끝내고 천엽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아직과 상의해 기습을 감행 했던 모양이었다.
나름대로는 치밀한 준비를 했던 모양인지 우루루 몰려들어 불화살을 날리면서 고구려 군을 닥치는 대로 베었다는 것이다. 워낙 창졸간에 일어난 일이라 창표군은 손 쓸 새도 없이 꼼작없이 당했다는 얘기였다.
사냥에는 30여명이 나갔고 몰려든 신라군은 3백명 이상이었다고 했다.
병부는 들끓었다.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병부의 건의에 따라 어전에서 중신회의가 소집되었고 출병이 결정 되었다.
왕 또한 평소의 그답지 않게 무척이나 진노했다. 노기 충천한 눈을 부리부리 뜨면서 흥분한 얼굴로 자신이 직접 군사를 이끌겠다고 선언했다.
작은 성의 일인데 굳이 왕께서 친히 출병할 까닭이 있느냐는 건의도 있었지만 왕의 의지가 워낙 단호해 중신들도 더 이상 만류할 수 없었다.

이리하여 신라 정벌대가 꾸려 졌다. 서기450년 장수왕 37년의 일이었다.
왕을 총사로 하며 전후 1만씩 2만의 군대가 출병 키로 했는데 아진의 여진군이 선봉을 맡기로 했다.
왕은 한시가 급하다면서 출병식도 생략 한 채 행군을 강행 시켰다.
스스로가 선봉에 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병사들을 재촉 했다.
아진은 왕의 옆에서 묵묵히 말을 몰았다.

이틀째 자시 무렵 두 식경씩 만 수면에 들고 밤을 거의 거르고 행군을 한 끝에 애안(주문진) 해안에 이르렀을 때 사흘째의 해가 솟았다.
왕이 말 고삐를 당기고 바다를 향해 해맞이 할 차비를 차렸기에 제장들이 모두 뒤에 시립해 함께 눈을 바다로 향했다.
붉은 비늘을 털고 있는 용처럼 검푸른 바다가 새벽안개에 끔틀 대더니
이내 싯누런 해가 머리를 치켜 들었다.
모든 삿됨과 어리석음을 털어 내는 처연한 몸부림과도 같았다.
하지만 방긋이 올라온 태양은 마치 어머니의 뱃속을 빠져나온 태아처럼 말끔히 단장을 끝내고 고고의 초성을 질러 내는듯 했다.
바다가 엶게 한줄로 금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장관이었다.  (계속)

 

Related posts

<연재 장편소설> ‘영웅의 약속’

안지영 기자

<장편 이민 현장 소설> ‘영웅의 약속’   연재 13회 

안동일 기자

<장편소설> ‘조선여인 금원’ 연재 96회

안동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