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nykorea
연재소설

<장편 연재 소설> ‘구루의 물길’ -제 33회

안동일 작

 . 천도(遷都) 그 험난한 길

  -민간에 전하기를 옛성은 흙을 쪄서 다져 쌓았는데 지금도 성 밑에 사는 사람들이 흙을 파려 할 때는 도끼를 쓰지 않으면 들어가지 않으며 나무를 심어도 뿌리가 내리지 못한다는 것을 보면 흙을 쪘다는 것이 허황한 소리가 아니다. (평양속지 권1 성지)-

내궁 안, 장수왕의 집무실 왕과 측근 그리고 제가들이 모여 있었다. 표정들이 모두 어두웠다.
“대왕마마 저토록 반발이 극심한데 굳이 일을 이 시점에 단행 하시려는 뜻이 어디 있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대왕의 뜻이 정녕 그러 하시다면 소신들이 다시 한번 나서 저들을 설득하겠고 정 설득이 안 되면 한바탕 싸움을 불사 하겠습니다.”
연나부 제가 황고견이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는 왕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왕은 아무말이 없었다.
“마마 전교를 내려 주십시오. 이제는 더 지체 할 수 없습니다. 저들의 방자한 태도를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는 지경입니다. 오늘만 해도 통지로에서 순노의 마차에 백성이 깔리는 사고가 두 차례나 발생했습니다.”
을씨 가문의 대모달 전황구기가 우렁찬 목소리로 왕을 채근했다. 그는 평양성 건립의 책임자 였던 도축도감 을파견량의 손위 조카이기도 했다.
왕이 앉은 자리 뒤에 서서 좌중을 노려보고 있는 아진의 표정도 긴장을 띠고 있었다.
국내성 12부 제가들 중 7명이 이 자리에 있었고 4부의 제가들은 왕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고 회의에 참석하지 않고 있었다. 그중에는 도성 주변에서 병사를 가장 많이 모을 수 있는 환나부가 있었고 그에 못지않은 힘의 순나 비류 또한 그쪽에 포함돼 있었다.
도성 안에 전운이 감돌았다. 궁궐에는 궁궐대로 대가들의 저택은 저택대로 병사들이 가득했고 병장기 부딛는 소리며 왁자지껄한 소리들로 요란 했다. 이러다 보니 사고도 빈번 했다. 모처럼 도성에 들어온 병사들이 부녀자를 희롱하거나 아이들이 마차나 말에 깔리는 사고가 계속 일어났다.
각부의 병사들이 속속 자신들 소속 저택으로 모여 들고 있었다. 백성들도 둘로 나뉘어 두려움속에 전전 긍긍 하고 있었다.
왕이 천도를 선언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천도는 예견 되어 있는 일이기도 했다. 천도를 하지 않을 요량이었으면 평양성에 그토록 큰 축성 공사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10여년에 걸친 공사였다.
논란은 3년 전 장수왕이 직접 평양에 내려가 석 달 이상 머물면서 축성 공사를 독려 감독 했고 기존의 설계를 대폭 확대 수정 했을 때부터 일기 시작 했었다.
대가들은 예나 지금이나 천도에 반대였다. 평양을 남쪽의 부 도읍으로 해 가끔 왕이 행궁을 만드는 것 까지는 용인 할 수 있지만 국내성을 비우고 모두 평양성으로 들어가는 완전 천도에는 극구 반대였던 것이다.
장수왕은 설왕설래가 계속 됐을 때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왕의 침묵을 모두 자신들 편한대로 해석 했다. 국내성에 뿌리를 둔 제가들은 왕 역시 행궁으로만 평양을 이용할 생각에 틀림없다고 했고 신흥 세력들은 평양 천도는 시간문제 일 뿐이라고 희색이 만면 했다.
축성이 거의 완료 되었던 보름 전 왕은 전격적으로 천도 계획을 발표 했다. 제가 회의를 거치지 않은 일종의 선언 이었다. 왕의 전교에 따르면 닷새 후인 삼월 칠일 왕이 5부를 이끌고 평양으로 출발 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특별한 사유가 없는 대가와 양민들은 왕을 따라 평양으로 가야 한다는 명령이 내려졌고 각 부가 아닌 궁내 직할 부서에 의한 심사가 실시되고 있었다. 주로 국내성에 남겠다는 청원에 대한 심사였다.
양민들의 절반 이상은 새집과 농토를 준다는 말에 평양으로 가는 것을 환영 했다. 하지만 권문세가들과 그에 빌붙어 조금이라도 특권을 누리고 있는 측들은 사정이 달랐다.
그들은 천도야말로 나라를 망치는 일이라며 드세게 반발 했고 이런 저런 불온한 움직임을 보였다. 왕을 끌어내려야 한다는 벽서 까지 나붙기도 했으며 급기야 각 부의 사병들이 도성 안으로 몰려들기 시작 했던 것이다.

앞서도 언급 했지만 고구려는 주요 5부족이 연합해서 만든 국가였기에 그 5부족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특히 제가라 불리우는 5부족의 수장들의 권세가 컸고 부마다 자신들의 가병이라 할 수 있는 군사를 부리고 있었다.
황부라 불리운 계루부는 고씨 왕가의 부 였고 외부라 불리운 연나부는 왕비의 가문이었기에 왕의 뜻을 따랐지만 예로부터 국내성과 그 인근 졸본에 기반을 두고 있는 환나와 비류부의 반발이 거셌다.
이들은 반란이라 할 수 있는 독립의 움직임까지 보였다.
떠날 테면 떠나라 자신들은 국내성을 지키겠다. 남쪽으로는 한 발짝도 못가겠다고 버텼다.
장수왕의 평양천도에는 여러 고려와 안배가 있었지만 국내성에 기반을 두고 있는 이들 토착 귀족세력의 약화를 통해 왕권을 보다 강화하려는 목적에서 이루어진 측면이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따지고 보면 평양 천도는 이미 광개토대왕 때부터 준비가 진행되고 있었다.
고구려 왕실이 평양을 새 도읍지까지는 아니었지만 요충으로 중시하기 시작한 것은 낙랑군을 한반도에서 축출하고 평양 일대까지 수중에 넣게 된 313년(미천왕 14년) 무렵부터였다.
고구려는 중국에서 고구려로 망명해 활동하던 인물들을 통해 점차 평양 지역 세력을 포섭한 뒤 통제력을 강화해 나갔다. 평양은 그때 벌써부터 국제도시의 성격을 띠고 있었던 것이다.
평양 안학궁성(安鶴宮城)과 대성산성(大成山城) 성곽과 궁궐 및 여러 관아의 건물 등을 갖추는 공사도 이미 광개토대왕 때 시작되었으며, 9개의 사찰 공사도 그 일환으로 이루어졌던 것 이었다. 왕실 차원에서 불교를 처음 수입한 지 21년 만인 393년, 광개토대왕 3년의 일이었다.
광개토왕은 평양에 9개 사찰을 지은 이래 평양 지역 주민들을 고구려 동부 지역으로 이주시키고 계루부와 연나부를 중심으로 자신의 직속 백성들을 대신 투입하기도 했다. 몇 년뒤인 399년 광개토대왕은 평양을 순시하면서 성민 전체가 참여한 축제를 열기도 했는데 이는 이 지역이 확실한 고구려의 영토이고, 그 주민은 고구려의 백성임을 확인하는 의식이었다.
또 광개토대왕은 이듬해 구원군을 요청하고자 파견된 신라 사신을 평양에서 접견하고 5만 군대를 보내 신라에 침입한 왜군을 격파하기도 했다. 이는 이미 광개토대왕이 평양을 외교 중심지로 이용했음을 뜻한다.

Related posts

<장편소설> ‘조선여인 금원’ 연재 38회

안동일 기자

<실록(實錄)소설>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14)

안동일 기자

<장편소설> ‘조선여인 금원’ 연재 26회

안동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