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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장편 역사소설> ‘구루의 물길’ – 제30회

안동일 작
격구와 사신단

아진은 왕의 명령으로 동진과 북위에 사신일행으로 다녀온 이래 이 문제에 대해 눈을 더 크게 뜰 수 있었다. 그에게 고구려는 결코 중원의 나라와 견주어 뒤떨어지는 나라가 아니었고 또 영명한 군주 장수왕의 그릇에 감복 하고 있었기에 고구려인으로서 고구려를 발전시키면서 자신의 그릇을 키우겠다는 생각에 망설임이 없게 되었던 것이다.
장수왕 시대에 초기에는 큰 전쟁이 없었다. 왕이 즉위 초기에 중시한 것은 외교 교섭 분야였다. 사실 영락대왕이 나라를 크게 넓혔다고는 하지만 거듭된 장정으로 나라의 재정은 비어 있다 시피 했다. 그래서 새 왕은 정복사업을 잠시 멈추고 내정을 튼튼히 해서 백성을 배불리 먹일 궁리를 하지 않으면 안됐다. 자연 외교 쪽에 머리를 쓸 수밖에 없었다.
국제 정세는 이런 장수왕 에게 큰 도움을 줬다.
중원 쪽을 돌아보면 그 무렵 북위는 아직 자리를 잡지 못했고 후연을 거꾸러 뜨린 북연은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장수왕은 먼저 아직은 중원에서 힘을 쓰고 있던 동진에 사신을 보냈다. 오호16국 가운데 유일한 한족의 나라였는데 중원 남쪽의 패자였다.

즉위 9년이었던 416년의 일이었다. 그때 동진의 안제(사마씨)는 국세가 쇠잔해 가운데 소외를 느끼고 있던 차에 동북지역의 강력한 나라 고구려에서 사신이 오자 흡족했고 장수왕에게 고구려왕 낙안군공이라는 작호를 내려 주기도 했다. 그 사신단 일행에 아진도 끼어 있었다. 아진은 이때 중원 땅을 처음 밟아본 이래 벌써 4차례나 중국에 사신단의 일행으로 오는 셈이었다.
북위에는 그들이 중원 북쪽의 패자로 떠오른 425년, 처음 사신을 보내 국교를 튼 이래 장수왕은 매년 북위의 도성인 평성에 사신을 보냈고 또 북위로 부터도 사신을 맞았다.
서로 작호를 내려 주기도 하고 공물을 교환하는 대등한 관계 였다.
이번 사신단 행차에서도 고구려는 위에 왕가의 계보를 적어 달라 요구했고 효문제로부터 긍정적인 대답을 들었고 궁중사가들이 작성하고 있으니 기다리라고 해서 객사에서 기다리던 중 친선 격구 시합 까지 하게 됐던 것이다.

“그대는 그 뛰어난 기술을 어디서 배웠는고?”
효문제가 경기를 마치고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아진에게 물었다. 유창한 한어였다.
경기는 위나라 기수들이 넉점을 먼저 내서 두점에 그친 고구려를 누르고 승리한 것으로 끝이 났다. 위나라 패는 전문 선수들이었던 점에 반해 구려 패에는 아진과 연태우 이외에는 격구에 소양과 경험이 있는 무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말 이라고는 간신히 산보나 하는 수준으로 탈 줄 아는 문관 서종관이 수문장을 맡았을 정도로 급조된 격구패 였다.
“특별히 배운 바는 없고 혼자 익혔습니다.”
아진도 한어로 대답했다. 한화 정책을 쓰는 북위에 파견된 사신 일행들은 한어를 구사해야 하는게 필수였다.
“그래? 대단 하군.”
“고구려에는 예로부터 좋은 말이 많이 생산 되고 있지?”
“그렇습니다. 다마산이라고 압강 변에 큰 말 목장이 있습니다.”
“자네의 말이 아주 뛰어난 명마던데 그말도 거기서 난 말인가”
“예, 그렇습니다. 이 말은 거련왕 폐하의 말입니다.”
“그래? 왕의 말을 타고 올 정도면 신임이 꽤 높은 명장이겠군 그래.”
“부끄럽습니다.”
“뛰어난 말에 뛰어난 기술 과인의 눈을 새로 뜨게 해주었내.”
“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거련 왕께서는 소장보다 더 뛰어난 기술을 가지고 계십니다.”“고구려 국왕이 격구를 즐겨 한다는 것은 과인도 들은바 있다. 언제 한번 그의 재주를 보고 싶은데 이루어 질수 있을까?”
“지금처럼 태평성대가 계속 되고 양국의 우호와 선의가 계속 된다면 못 이룰 리도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옆에 있던 정사 대로 연조흠이 한마디 거들엇다.
문제는 흡족한 웃음을 날리며 양국의 격구패 모두에게 술 한잔 씩을 따라 주었다.

양국관계는 그 어느 때보다 좋았다. 장수왕의 탁월한 외교 전략 덕분이기도 했다.
장수왕은 북위의 경쟁국인 동진과 후연의 역학관계를 절묘히 이용 하는 전략을 구사 했었다.
효문제는 북위의 6번째 왕이었다.
북위는 386년에 세워진 나라였는데 30여년 만에 황제가 6명이 바뀔 정도로 정세 변화가 심했다. 그래서 고구려 조정은 북위 왕가의 계보를 적어 보내라고 까지 했던 것이다.
어찌보면 상국에서 속국에 보내는 명령 같기도 했지만 고구려의 권위를 인정한 위에서는 흔쾌히 응했기에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고구려 사신단은 위에 오면 가장 호화로운 1등 객사를 배정 받았는데 이는 남중원의 패자인 한족의 나라 동진 후일의 송, 제 보다 윗길 이었다.
북위는 후위(後魏) 탁발위(拓跋魏)라고도 하는데 탁발씨가 세운 나라이기 때문이다. 선비족은 처음 중국 북동지방 대흔안령 (大興安嶺) 북부지역을 기반으로 했는데 3세기 중엽 성락(盛樂)을 본거지로 부족연합을 형성 한 이래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시대, 전진(前秦)의 와해를 틈타 영걸 탁발규(拓跋珪)가 여러 부족을 통일하여 대나라(代國)를 세우고, 후연(後燕)을 공격해 하북(허베이,河北)에 진출한 것을 계기로, 398년 평성(平城)에 천도하여, 대위황제(大魏皇帝)라고 일컬었다. .

태조인 도무제(道武帝) 탁발규는 한인 관료를 중용하고, 통일국가의 정비에 힘썼는데, 급격한 개혁은 국내에 동요를 가져와 그의 아들에게 피살되었다.
정권의 안정에 뜻을 두었던 2대 명원제(明元帝)를 거쳐, 3대 태무제(太武帝)는 한인 최호(崔浩)를 승상으로 중용해 주변 정복에 나서, 하(夏)·북연(北燕)·북량(北凉) 등 여러 국가를 평정, 화북 전역을 통일, 오호십육국시대에 종지부를 찍고 중원 북부의 패자가 되어 남쪽의 송, 진과 대치했다. 태무제는 신천사도(新天師道)를 역설한 도사 구겸지(寇謙之)를 신임고, 한인귀족을 초청하는 등 한문화(漢文化)를 존중하였으나 그 역시 비명에 최후를 마쳤다.
그 뒤 잠시 혼란이 계속되었으나, 여걸 문명태후(文明太后) 풍씨(馮氏)가 사태를 수습하고 실권을 장악하여, 6대인 효문제(孝文帝)의 섭정으로 균전제(均田制)·조용조제(祖庸調制)·삼장제(三長制)·봉록제(俸祿制) 등을 실시하고, 농촌의 재건과 재정의 확립을 도모하는 등 나라의 기틀을 튼튼히 했다.
태후가 죽고 친정을 펴면서 효 문제는 부쩍 한화 정책을 폈다. 조정 내에서 호족(胡族)의 언어·풍속을 금하고, 호성(胡姓)을 한성(漢姓)으로 고쳐 한인 귀족제를 호인에게 미치게 하는 등 완전한 중원의 주인이 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애써 표현했다.
어쨌든 그 무렵이 북위의 전성기였던 시기였다.

이렇듯 따지고 보면 중원은 결코 한족의 무대만이 아니었다.
북위가 북 중원의 패자로 오르기 전 4세기부터 5세기 초에 걸쳐 중국 북부에서 흥망 한 나라들 또는 그 시대를 5호16국 시대라 부르는데 5호란 흉노, 갈, 저 (티베트계),강(羌;티베트계)·선비(鮮卑;투르크계)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들이 중국 북부에 16개의 왕조를 세웠으므로 5호 16국이라 하는데 . 16국 가운데에는 한인(漢人)의 나라는 동진 한나라 뿐으로 강성한 국가는 모두 한족 아닌 이민족의 국가였다.
한마디로 말해 장수왕은 외교의 귀재였다. 이런 국제 정세를 이용 전쟁을 삼가면서 나라의 힘을 비축했고 어느 정도 힘이 비축 됐다 싶을 때 남북으로 번갈아 가며 국경 정비에 나섰던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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