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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ptember 20,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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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장편 역사소설> ‘구루의 물길’ – 제29회

안동일 작

    8.  격구와  사신단

-선비족은 남으로는 변방까지 북으로는 정령을 막고 있었고 동쪽으로는 부여를 물리치고, 서쪽으로는 오손을 격파해 옛 흉노의 땅을 모두 점거했다. 그 권역이 동서 만팔천리 남북 칠천리가 된다. (후한서 권90, 오환선비열전)-

“장군, 왼쪽으로 달려가겠습니다.”
고구려 공격수 연태우가 멋진 횡하침(橫下浸) 기술로 왼쪽에 있던 아진에게 공을 쳐 대면서 소리치곤 왼쪽으로 말고삐를 당겼다. 위나라 패들이 고구려 말을 알아듣지 못하기에 마음 놓고 큰소리로 전술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아진은 자신이 탄 혈혈노의 발굽 밑으로 튕겨져 오는 공을 수양침의 기술로 장시에 담아 공을 갖고 오른쪽으로 질주 했다.
위나라의 수비군이 옆에서 장시를 휘두르며 달려 왔으나 혈혈노의 동작은 더 재빨랐다.
횡하침은 장시로 공을 담아 휘둘러서 말의 배 밑으로 쳐내는 기법이었고 수양침(垂揚浸)은 장시로 공을 담아 휘둘러서 땅에 쳐내는 기법이다.
아진이 비이(比耳) 수양수로 달려 나가 어깨 안쪽에서 쳐내는 기법인 용사비등(龍蛇飛登)으로 공을 다시 연태우 에게 건넸고 연태우는 수양타의 기술로 멋지게 문안에 공을 꽂아 넣었다. 문지기는 속수무책이었다.
두 사람의 번개 같은 기술에 경기장 내에 환호와 탄성이 올랐다.

격구장에서는 화채구라 불리 우는 중앙 금빛 찬란한 차일 안에 중신과 궁녀들과 함께 관전 하고 있는 북위의 효문제도 연신 싱글대면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아진은 지금 위나라의 도읍인 평성 궁중 연무장에서 격구 경기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고구려 사신단 일행과 위나라 금위군 대표 간의 경기였다.
위나라 효문제 또한 격구를 좋아하는 애호가였다.
격구는 말을 타고 장시(杖匙)라는 채를 이용하여 공(木毬)을 쳐서 상대방 문(골대)에 넣는 경기였다. 민간에서는 “공치기” 또는 “장치기”라고도 했고 한자어로는 타구(打毬), 격구희, 농장희(弄杖戱), 격봉(격棒)이라고도 했다.
중국 고대의 황제(皇帝) 시대 때 부터 시작 됐다고 알려져 있는데 한(漢) 나라 시대에는 축국(蹴鞠)이라 불리웠고 이 축국이 고구려에도 전해졌다고 하는데 기실 기마병이 있었던 나라에서는 어디를 막론하고 그 방식이나 규칙이 다르기는 했어도 말을 타고 공을 치는 놀이가 있게 마련 이었다.
각 나라에서는 격구는 무예의 연습에 유익하다고 주장하여 장려하였고 특별한 놀이 거리가 없었던 그즈음 각 나라 마다 귀족 사회의 신분과 체력 과시의 수단으로도 유행처럼 번져 있었다.

아진이 지금 하고 있는 금단 격구는 돌궐 서쪽 에서 비롯된 폴로라는 경기의 규칙과 기술이 가미된 일종의 개량 격구였는데 한 무제 시절 뚫린 비단길의 덕택 이었다.
격구경기가 열리면 왼쪽과 오른쪽에 금단(錦段)으로 장식한 장막을 치는데 이것을 화채구(畵彩絿)라 했다. 부녀자를 포함해 구경하는 사람이 많이 모였다. 그래서 금단 격구라고 했다.
양편은 각각 5명이 선수로 참가 하는데 2명 쯤의 후보 선수 가 있어 지치거나 부상이 있을 때 교대로 경기를 했다. 중국과 고구려 모두 경기하는 사람과 말의 의복과 장식이 화려하고 사치스러웠다. 그래서 말안장이며 격구 장비 값이 중인(中人) 10집((家)의 재산에 해당되기도 하였다.
격구가 시작되면 좌우의 두 대열로 나누어 서고 궁녀 한 사람이 공((絿)을 잡고 왕 앞에서 “온 뜰 안의 소고에 나는 공이 모이니 사간(絲竿)과 홍망(紅網)이 모두 머리를 들고 앞으로 나아가고 뒤로 물러서는 것이 모두 음악의 음절에 맞게 하라.”고 소리쳤다.
그리고 공을 경기장 복판에 던지면 양쪽 대열에서 모두 앞 다투어 말을 달려 나온다. 장시에 공을 먼저 맞힌 사람 쪽이 공을 갖고 공격을 시작 하게 된다.

격구의 말 모는 기술은 마상 무예의 기마술 보다 한 차원 높은 고난도의 기술이 요했다.
마상 무예를 시연 할 때에는 말을 계속 질주 시키게 마련이지만 격구는 매 순간 순간마다 급회전과 급정지 혹은 갑자기 전속력 출발시키는 등 다양한 기마법이 필요했다.
또한 말이 격구 공을 쫒아가야 하므로 공을 무서워하지 말아야 하고 계속 휘두르는 장시(격구채)에 놀라지도 말아야 하며 때로는 격구 공에 맞아도 계속 질주해야하는 훈련이 되어 있어야 했다. 어찌 보면 기마전에 가장 필요한 기술과 담력 그리고 말과 사람의 혼연일체가 요구되는 장수들에게는 실용적인 운동 이었던 것이다.
격구에는 비이(比耳) 할흉(割胸) 방미(防尾) 배지(排至) 지피(持彼) 수양수(垂揚手)등의 기본적 기술이 있는데 비이는 쏜 살 같이 달려가는 동작, 할흉은 가슴높이로 공을 받고 쳐내는 동작, 방미는 달리다 뒤로 도는 동작, 배지 지피는 뒤로 치는 동작, 수양수는 앞으로 곧바로 쳐내는 동작을 일컫는 말 이었다.
비이와 수양수가 아진의 특장이었고 장수왕은 배지 지피에 능했다.

그래서 두 사람이 한편이 됐을 때는 서로의 기술이 보완을 이뤄 신기에 가까운 모습으로 득점을 올리곤 했었는데 당시 고구려 사람들은 두 사람이 공을 가지고 노는 모습을 보고 벌이 꽃에 달려드는 듯 하다고 했는데 ‘구려 봉화 탐접’이란 말의 유래가 여기에 기원하고 있었다.
이밖에도 수양타(垂揚打)는 장시로 휘둘러서 앞으로 강하게 쳐내는 기법. 천검위(天劒位)는 할흉으로 달려나가, 등 뒤로 쳐내는 기법. 등타(登打) 용사비등(龍蛇飛登)은 수양수로 달려나가 밑에서 위로 떠넘기는 기법을 일컬었고 .부광식(浮光式)은 비이로 달려나가, 호미걸이로 건 다음에, 뒤쪽으로 땅에 쳐내는 기법이다. 호접무(虎蝶舞)는 수양수로 떠서 하늘로 직접 던져 세워 나가는 기법이다. 호미걸이는 비이로 달려 나가 호미질 하듯이 등 뒤로 끌어 던지는 기법을 일렀다.

아진에게 있어 더 이상 구루냐 물길이냐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주변의 동무들의 생각은 달랐다. 어떻게 부족의 원수이기도 한 고구려에 붙어서 영화를 누리려 하느냐는 배신자로 보는 시각이 드셌던 것이다. 어찌보면 대안없는 시샘이자 질투 일 수도 있었다. 격구를 놓고도 물길 가산의 예전 아진 동무들은 귀족들이나 하는 놀음에 아진이 푹 빠져 어려웠던 시절을 잊고 있다며 곱지않은 시선을 보내곤 했다.
후일 이 때문에 큰 곤경을 겪기도 하는데 이즈음 아진은 확실하게 고구려인이 되기로 작정을 했다.
기실 그 시절 민족감정 혹은 민족차별 이란 것은 크게 따질게 못됐다. 실은 민족이란 말도 사용되지 않았다.
만주어에도 민족을 뜻하는 단어는 없었다. 씨족을 ‘무쿤’이라 했고 부족을 ‘할라’라고 했으며 8촌이내의 직계 친척을 ‘팔가’ 대부족을 ‘골로’ 대부족의 부락을 ‘아이만’ 그리고 아이만이 몇 개 모인 것을 ‘구룬’이라 했다. 아직 숙신인들은 체계 갖춘 국가를 형성하지 못했으며 구룬만 몇 개 동북부 지방에 남아 있는 형편 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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