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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장편 역사소설> ‘구루의 물길’ – 연재 제19회

안동일 작

 아진과 호태왕 비(碑)

아무리 크다 한들 비석하나로는 대왕의 업적을 기리는데 부족하다는 생각들 인 듯싶었다.
아무튼 이렇게 해서 호태왕 비에 관한 문제는 첫 거론이 아진의 입에서 나왔고 몇 차례에 걸친 대가, 고추가들의 제가 회의며 태학의 박사, 학사들의 의견 수렴 과정을 거쳐 우여곡절 끝에 건립이 결정되었다.
아무리 국력이 성장했다 하더라도 새로운 궁궐을 짓거나 대형 릉을 조성하는 일은 백성들의 부담이 가중될 것이라는 장수왕의 백성을 배려하는 마음이 큰 몫을 했음은 물론이다.
이제 문제는 그에 걸 맞는 돌이 과연 있느냐가 문제였다. 어디서 구하느냐가 문제였다. 당연히 왕은 아진을 다시 찾았다. 아진은 생각해 두었던 돌이 있었다. 창학사와 몇 년전 오경비를 세울 돌을 찾으러 백두산에 갔을 때 안골 뒤 쪽에 커다란 강룡석을 발견 했었는데 바로 그 돌이었다. 그 백두산 강룡석에 대해서 상세히 왕에게 고했다. 돌에 얽힌 전설까지 고하자 왕은 당장 함께 돌을 보러 가자고 했다.

강룡석, 호태왕비의 원석에 얽힌 전설은 고구려의 추모왕이며 그 후손들이 천신의 자제라는 설화에도 부합하는 전설이었다.
고구려 뿐 아니라 요동과 반도의 여러 민족의 성산이자 영산인 백두산 천지에는 이일대의 풍수우설을 관장하는 암수 두 마리의 용이 살고 있었는데 이 용들이 자신의 본분을 망각하고 기분 내키는 대로 비바람을 불러일으키는가 하면 때론 몇 년씩이나 가뭄이 들게 하는 등 횡포를 부리자 천신이 노해서 이 용들을 감시하고 조정하는 역할 하라고 보낸 천신의 사자가 바로 강룡석 이었다.
당초 강룡석은 암수 한쌍이었는데 이 강룡석 부부는 용들을 잘 다스려 이일대가 평온하게 되면서 고구려라는 강성한 나라가 등장했고 인근 국내성이 도읍으로 융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세월이 백년 이상 흐르면서 강룡석들은 무료함을 느꼈는데 하루는 아내 강룡석이 국내성 구경을 가자고 조르는 통에 젊은 부부로 변신해 구경에 나섰다. 번화한 국내성의 모습이며 활달한 사람들의 사는 모습에 반해 시간 가는 줄 몰랐고 이왕 나온 김에 하룻밤 객사에서 묵어 가자고 하는 데 까지 발전했다. 그런데 마침 저자에 나왔던 당시의 고구려 왕이 젊은 부인 암강룡석의 모습에 반해 첩으로 삼을 생각으로 군졸들을 시켜 잡아 오라 했다. 이리하여 야밤 객사에서 고구려 군졸과 숫 강룡석의 싸움이 벌어 졌는데 열세에 몰린 고구려 왕이 이들이 범상치 않음을 깨달았고 천손인 왕가 전래의 비술인 돼지피를 뿌림으로써 가까스로 강룡석을 제압 할 수 있었다.

돼지피를 뒤 집어 쓰게 되면서 본래의 모습 바위로 변한 강룡석은 자신들이 없게되면 백두산 용들이 다시 횡포를 부리게 될 것이 걱정돼 죽을 힘을 다해 천지가로 날아가려 했으나 힘이 부쳐 천지에 이르지 못하고 안골 뒷산에 떨어지게 됐다. 한편 밧줄에 꽁꽁 묶여 정신을 잃었다 깨어난 암 강룡석은 남편을 따라 천지로 날아가는 중에 압록강 상공에서 천지를 빠져 나온 용들과 만나 한바탕 싸움이 일어나게 되었다. 남편을 따라 가야 한다는 급한 마음에 큰 힘을 썼더니 암룡이 피를 토하고 죽으면서 압록강으로 떨어 졌는데 압록강 강 가운데 있는 머리 잘린 용모양의 용섬이 바로 그것이다. 숫룡은 다시 천지로 숨었고 남편이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된 암 강룡석은 슬퍼 하면서 마침 태어나려는 여자아이의 몸으로 들어가는 투태(投胎)를 행했는데 이 여자 아이가 후일 고구려 왕비가 되었다는 전설이다.

“대단한 돌이다. 이 돌은 고구려 후손들의 최고 보물이 될 것이 틀림없다. 아진 그리고 너야말로 나에게 큰 보물이구나. 내가 무슨 상을 내려야 하겠니?”
거련왕은 강룡석을 보고 너무도 흡족해 했다.
하지만 그 큰 돌을 산 아래까지 운반해 내는 것도 여간 큰일이 아니었다. 안골 까지는 사람하나 겨우 다닐 정도의 산길밖에 없었다. 아직 어디에 비를 세울 것인가 정해지지 않았지만 도성안이나 인근 산수 좋은 곳에 세워져야 했기에 운반은 필수였다.
안골의 화전 주민들은 자신들의 수호석 선돌이 파헤쳐 진다는 것에 처음에는 아쉬워 했으나 위대한 호태왕의 비석이 되어 나라 전체의 보물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기뻐했고 돌 운반에 큰 도움을 주었다.
자연스레 아진은 강룡석 운반의 책임 까지 맡았고 오태며 석도강 운반조가 나서 길을 넓히고 수레를 동원하는 등 그야말로 젖 먹던 힘을 다해 산 아래로 끌어내는 동안 조정과 태학에서는 호태왕비 건립을 위한 구체적 논의가 연일 진행 됐다. 마침내 건립 장소로 도성 동북쪽 용산 아래 국강상 지역으로 정해졌고 태학의 박사와 궁내 기록관을 중심으로 비문 작성단이 꾸려 졌다.
국강상의 비석터는 높은 곳은 아니었지만 용산을 배경으로 해서 압강이 앞쪽으로 흐르는 명당이었다. 높은 곳에 모셔 우러르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많은 백성들이며 관리들이 오며 가며 쉽게 접할 수 있는 곳으로 하여 태왕의 흠덕을 수시로 느끼게 하지는 견해가 채택됐다.
문제는 비문이었다.
고구려의 내 노라 하는 문장가며 사관, 그리고 5부의 대가 학자들이 모여 연일 회의를 했지만 저마다 생각하고 주장하는 바가 달라 의견을 모으고 일을 진척 시키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아진은 퉁구라고도 불리우는 국강에 마련된 작업장에서 강룡석을 다듬느라 여념이 없었다.
워낙에 효심도 깊고 또 역사에 많은 관심을 지닌 왕은 퉁구의 작업장을 자주 찾았다.
왕은 아진에게 일의 진척 상황을 꼭 일러 주곤 했다.
석달에 걸친 논의와 토론 그리고 10여 차레가 넘는 독회 끝에 비문의 초안이 완성 됐다.
비문의 글씨는 태학의 남온 박사가 쓰기로 했다.
웅대하면서도 화려한 그의 필체가 영락 대왕의 업적을 기리는 비문의 필치로서 가장 어울렸기 때문이다. 남박사의 글을 구하가 칼로 새겼고 그 새긴 비석을 아진이 다듬었다.
꼬박 1년이 걸렸다.
이리하여 높이 25척(6.39m,) 무게 60만관 (37톤), 각 면의 너비가 5척(1.5m) 이상의 큰 규모로 4면에 44행, 1802자의 명문이 새겨지게 됐다.
모든 사람이 비의 자연스러우면서도 웅장한 규모, 비문에 거침없이 새겨져 있는 특유의 글씨체, 고구려 특유의 예술 감각이 그대로 베여 있다면서 찬사를 보냈다.
이 영락대왕비야말로 고구려의 국력과 영토를 규명할 수 있는 소중한 자료였던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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