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일 작
아진과 호태왕 비(碑)
태자는 아무 말 않고 수행해온 병사 한사람과 같이 석재들을 다시 쌓는 일에 가담 했다. 거련도 온몸을 적셔가면서 석재를 들어 올렸는데 그 힘이나 요령이 아진이나 구하보다 나으면 나았지 못하지 않았다.
“저쪽의 세 개만 이쪽으로 올리면 되겠습니다.”
이렇게 말하 면서 구하가 이쪽으로 몸을 옮기려다 천막 천을 잘못 밟으면서 미끌어졌다. 미끌어 지면서 중심을 잡는다고 손을 움직이다 쌓아 놓은 석재를 밀었는지 석재가 갸우뚱하면서 이쪽으로 쏟아 넘어지여 했다. 석재가 넘어지면 그대로 태자 위로 쏟아질 판 이었다. 그때 아진이 몸을 날려 넘어지려는 석재들에 어깨를 디밀었고 쿵하는 소리가 나면서 석재들이 쏟이지지는 않았다. 태자와 병사가 아진이 어깨를 디밀고 버티고 있는 동안 석재들을 가지런히 해 중심을 잡았고 구하까지 일어나 힘을 쓰면서 위험스런 상황이 끝났다.
“괜찮은가? ”
태가가 아진에게 물었다. 약간의 통증은 있었지만 견딜만 했다.
“괜찮습니다.”
“괜찮은 게 아닐 듯 싶은데, 어디 좀 보자 뼈가 상하지 않았어야 할 텐데.”
태자는 계속 아진에게 걱정스런 눈초리를 보내며 아진의 어깨를 보려 했지만 아진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비를 맞으며 석재 덮는 일을 마무리 했다.
사실 아진은 그 후 며칠 동안 어깨가 아파 고생을 해야 했다. 워낙 젊은 강골이라 뼈에 금이 가거나 하는 큰 탈은 아니었지만 타박상이 심했던 것이다.
“그깟 석재들이 무어라고 그렇게 몸을 아끼지 않는단 말이야? 미련하게, 석재야 또 구하면 될것을, 그렇지 않으냐 구하?”
“아진은 석재 때문에 몸을 날린 것이 아닙니다. 태자마마를 구하려고 그런거지요. 이 구하가 보기에는 그렇습니다.”
“뭐 내가 그깟 돌덩이들 못 피할까봐 그랬더라더냐?”
부어 올라 있는 아진의 어깨를 보고 태자와 구하가 주고받은 말이었다.
말은 그랬지만 그일 이후 태자가 아진을 대하는 태도는 더 각별해 졌다.
아진은 지금 제련부를 책임지는 오십장에 올라 있었다. 스물 한 살의 젊은 나이, 게다가 말갈 출신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흔치 않은 출세였다.
이처럼 빠른 승진을 보인 것 에는 아진이 글을 읽고 쓸 수 있었다는 것이 큰 자산이 되었다.
꼬박 반년이 걸렸던 태학에서의 일이 아진을 반편이기는 헸어도 제법 글을 아는 사람으로 만들었던 것이었다.
호연은 거련 태자 뿐 만이 아니었다. 유능한 학사들과의 교분을 갖게 했던것도 큰 호연이었다. 남온 박사며 창학사는 도성 북문 쪽에 올 일이 있으면 일부러라도 아진의 부곡에 들려 아진이 있으면 그에게 좋은 소리 한 마디라도 해주려 애썼고 아진이 없을 땐 애써 구한 선습류, 쉬운 책의 필사본 서책이라도 놓고 가곤했다.
“아진, 태자가 또 너를 지긋이 바라보시던데? 좋겠다.”
호태왕의 장례가 있던 그날 친구 라운이 옆에서 아진의 옆구리를 찌르며 비꼬듯이 한 마디 했던 것 지금도 아진의 뇌리에 비수처럼 남아 있었다.
그때 아진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 무렵 들어 라운과는 묘한 거리가 생겨 있었다. 아진이 학문을 알고 고구려의 유명 인사들과의 교분을 쌓아가며 출세랄 것도 없는 출세를 하는 동안 여진족 마을에선 그를 보는 시선이 두 갈래로 나뉘어 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라운도 아진을 민족을 저버리고 구루에 붙은 배신자쯤으로 여기는 질시의 눈길을 보내는 사람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오히려 망구얼타이가 전적으로 아진을 비호하고 있었다. 아진 같은 인재야 말로 말갈 백년에 나올까 말까하는 인재인데 제대로 키워 여봐란 듯이 고구려인들 사이에서 우뚝 세워야 한다고 입에 침을 튀기곤 했지만 그럴수록 아진에 대한 차가운 눈길도 그 농도가 더해져 갔다.
호태왕비 건립이야 말로 아진이 시작부터 끝까지 일등공신의 한사람 이라고 할 수 있었다. 호태왕비 건립에 참여한 것은 전적으로 거련왕(장수왕)의 배려와 결정에 따른 일이었지만 그 시작 단계에서부터 아진은 중요한 역할을 하면서 적극 참여했었다.
거련태자는 왕에 등극하자마자 부왕의 업적을 기리는 일이야 말로 자신이 해야 할 가장 시급한 일이었다고 생각한 듯 싶었다.
하루는 석도강 작업장에 있는 아진에게 궁성 근위병과 석도강 급사가 함께 헐레벌떡 달려왔다.
“대왕마마께서 아진님을 찾으십니다. ”
“아니, 대왕께서 석도강에 오셨단 말이오?”
“공식적인 행사는 아니나 조용히 이곳에 오셨습니다.”
아진은 무슨 일일까 싶어 옷 매무시를 고치며 그들을 따라 석도강 동남쪽 언덕에 있는 도감실로 갔다.
왕은 대가 몇 사람이며 석도강 도감과 함께 탁자 중앙에 앉아 있었다.
넙죽 바닥에 엎드려 한발을 뒤로 빼는 고구려식 절을 하면서 올려다 본 거련왕은 그 몇 달 사이에 십년쯤 나이가 더 들어보였다. 아마도 자리가 사람을 그렇게 만드는 모양이었다.
“어서 오너라 아진.”
“오래간만에 뵙겠습니다. 마마.”
왕위에 오른 일을 축하해야 하겠지만 어떤 표현을 써야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이리와 앉지.”
왕은 손짓으로 비어 있는 끝 쪽의 자리를 가리켰다. 파격 중의 파격이었다. 석도강의 도감이 깜짝 놀라는 눈치였다. 대화는 이렇게 시작됐다.
“지금 우리가 선왕마마의 업적을 기릴 큰 기념물 조성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중이었네. 을파 국상이나 계루부 대가들은 기념 궁궐을 짓자하고 양도감은 큰 규모의 능을 조성하자고 하고, 의견들이 많은데 공통된것은 모두 석물 일이라는데 있다. 그래서 이곳을 찾았고 자네를 불렀는데 아진 네 생각은 어떠냐?”
“감히 제 생각을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이진은 진작부터 생각해 놓은게 있어 망설인 없이 즉각 반문했다.
“그래, 좋은 생각이라도 있느냐?”
“네, 마마. 선왕마마의 업적을 기리는 비를 세우심은 어떨런지요?”
“비라고? 비석 말인가? 그건 당연히 세우는 것 아닌가.”
“하지만 마마. 그것은 보통의 비가 아닙니다. 이 세상 어느 왕께서도 갖지 못했던 산과 같은 돌로 만든 비를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 커다란 비에 선왕의 업적과 행장은 물론 마마께서 좋아하시는 고구려의 역사까지 담은 명문을 새겨 넣는 것입니다.”
“음…그래?”
거련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진, 너를 부르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대가들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그러나 대가들은 아직도 갸우뚱하는 표정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