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일 작
아진과 호태왕 비(碑)
– 옛날 시조 추모왕이 나라를 세웠는데, 왕은 북부여에서 나왔다. 추모왕은 천제(하느님)의 아들이고 그 어머니는 화백(물의 신)의 딸인데 알을 깨고 세상에 태어났다. 태어나면서부터 성덕이 있었다. 왕는 수레를 메울 것을 명하여 돌아다니면서 남으로 내려가는 도중에 부여의 엄리대수를 거쳐가게 되었다.
왕이 나룻가에 임해 말하기를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요, 어머니가 화백의 딸인 추모왕이다. 나를 위해 자라들을 연결하고 거북이 무리를 짓게 하라.”고 하였다. 그 말이 떨어지자 곧 자라들이 연결되고 거북이들이 물위로 떠올랐다. 그리하여 추모왕은 물을 건너가서 비류곡 홀본 서쪽 산위에 성을 쌓고 수도를 세웠다.
그러나 추모왕은 인간세상의 왕위에 있는 것을 즐겨하지 않으므로 하늘에서 황룡을 내려 보내 왕을 맞이 하였다. 그래서 왕은 홀본 동쪽 언덕에서 황룡에 업혀 하늘로 올라갔다. 세자 유류왕에게 유언으로 명하여 나라를 도리로써 잘 다스리도록 하였다. 대주류왕은 나라의 기초를 이어 받았고 17세손인 국강상 광개토경평안호태왕에 미치게 되었다.
왕은 18세에 왕위에 올라 영락태왕이라 일렀는데, 그 은혜와 혜택이 하늘에까지 이르고, 그 위엄과 무공은 온 세상에 떨쳤다. 또 생업을 편안케 하였으므로 나라는 부유하고 백성은 넉넉하고 5곡이 풍요하게 무르익었다. 그런데 하늘이 돌보지 않아 39세에 돌아가면서 나라를 버리었다. 갑인년 9월 29일 을유일에 산릉에 옮겨 모시고 이에 비석을 세워 훈공과 업적을 새겨 놓음으로써 후세에 보이는 바이다.
광개토 대왕의 비문 서두 부분이다.
唯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出自北夫餘天帝之子母河伯女郞剖卵降世生而有聖德* * * * * 命駕巡幸 .南下路由夫餘奄利大水 (중략) 二九登祚號爲永樂太王恩澤洽于皇天威武振被四海掃除不 * 庶寧其業國富民殷五穀豊熟昊天不弔삼有九宴駕棄國以甲寅年九月甘九日乙酉遷就山陵於是立碑銘記勳績以示後世
아진이 골라 깎고 다듬고 세운 비가 바로 호태왕비 였다. 호태왕비 건립에 니르아이신이 큰 역할을 했다는 얘기다.
인생이란 게 묘한 것이어서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가운데 운명이란 이름 속에서 우연이 점철돼 그 궤적이 엉키고 뒤바뀌고 뻗어 가기도 하는데 따지고 보면 우연이라 여겨지고 불리우는 일들도 어떤 결과라는 귀결점을 향해 하나하나 모인 필연이 아니가 싶기도 한 것이 인생이다.
호태왕비 건립과 이진, 니르아이신의 인연만 해도 그랬다.
결과적으로 보면 아진이 계루부의 노비 신분에서 해방돼 석도강에서 일을 하게 됐던 것이며 비석에 쓰이는 응회암, 섬록암의 기술자가 된 것도 그렇고 태학의 오경비 건립에 차출돼 열심히 일하던 와중에 태자 신분이었던 장수왕, 고거련 왕자를 만난 것도 호태왕비 건립이며 그 후의 입신과 활약을 위한 우연을 가장한 운명의 필연 이었다.
서기 413년 영락 20년 동북아의 큰 별이 떨어졌다. 영락 대왕 광개토왕이 설흔 아홉의 한창 나이에 돌연 세상을 떠난 것이다.
도성의 궁궐에 자면서도 신발 끈을 풀지 않고 잠자리에 들었다는 고구려의 정복왕 호태왕, 그가 괴질에 걸려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도성에 통곡이 메아리 쳤고 전국이 울음바다가 됐으며 중원에서도 애도의 소리가 높았다. 요동을 중심으로 한 동북아의 지역의 변방 국가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왕이 태어났을 때 10월임에도 배꽃이 꽃을 피웠고 왕이 선왕인 고국양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을 때는 도성에서 한 소가 말을 낳았는데 발이 여덟이요, 꼬리가 둘이었다는 전설이 있었는데 왕이 세상을 떠나던 섣달에는 대낮에 하늘이 깜깜해 지더니 뇌성벽력이 쳤었다.
하늘도 안타까와 한 불세출 영웅의 죽음이었다.
아진도 분위기 때문이 아니라 진정으로 슬픔을 느껴 눈물을 뿌렸다.
호태왕의 장례는 그가 복속시킨 땅의 넓이만큼 웅장하고 화려하게 치러졌고 그가 복속시킨 신민의 숫자만큼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그의 마지막 길을 애도 했다.
아진은 북문 바로 앞쪽에서 운구 행렬을 바라보고 있었다.
장례 행렬이 축제의 행렬처럼 화려한 것이 그나마 도성 백성들의 슬픈 마음을 위안 했다.
꽃과 종이 장식으로 치장된 태왕의 호화로운 상여는 화려한 연회 복장을 입은 남녀 시비 백 명에 의해 운구 되고 있었으며 검게 물들인 깃털을 투구에 꽂은 삼백 명 기마 호위군에 의해 호위 되었다. 운구 바로 뒤에 이제는 왕위에 오른 거련 태자가 백관의 맨 앞장에 서서 걷고 있었다. 호위병들은 말을 타고 있었지만 태자와 대가 관리들은 모두 검은 두건에 검은 도포를 입고 걷고 있었다. 백성들의 통곡 소리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경쟁이라도 하듯 저마다 목청을 돋구었기 때문이다.
그날 아진도 흐르는 눈물을 소매로 훔치려는데 우연히도 그 앞을 지나는 거련 태자와 눈이 마주쳤다.
즉위식을 갖지는 않았지만 이제는 왕위에 오른 거련 태자의 눈도 퉁퉁 부어 워낙에 넙적한 얼굴이 더 넙적해 보였지만 그 와중에도 아진에게 눈빛으로 아는 체를 했다.
아진과 태자는 태학작업장에서의 첫 만남 이후 몇 차례 더 만났었다. 태자는 약속대로 며칠 뒤에 작업장을 다시 찾아 미천왕의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태학 일이 끝나 아진이 석도강으로 돌아갔을 무렵 평양성 건립과 관련된 축조용 석재 문제로 석도강을 찾았을 때도 특별히 아진을 찾아 인부며 관리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었다. 이마을 저마을 떠돌던 소금장수에서 왕위에 오른 할아버지를 둔 청년답게 태자는 신분에 대해서도 트여 있었고 도량 또한 넓었다.
장수왕, 거련 태자와 아진을 묶어 주는 그런 사건이 태학에서 있었던 것도 아진에게는 행운이면 행운이었다.
어느 날 비가 많이 오던 날이었다. 하필이면 전각을 위해 닥종이를 석재에 부착 시키는 작업을 해야 하는 날이었다. 재료에 비가 들이 치면 일이 망치게 되어 있었다. 아진과 구하는 둘이 낑낑대며 천막 천을 가져다 석재위에 덮었지만 천이 태 부족이었다. 아진은 자신의 겉옷 까지 벗어 비석을 덮었지만 이쪽저쪽으로 삐져나와 있어 비석들을 다시 쌓아야만 되게 되었다.
천막은 그대로 두고 그 안에서 옆에 있는 비석 재를 가지런히 위로 올리려니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그때 거련 태자가 작업장에 왔던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