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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장편 역사소설> ‘구루의 물길’ – 연재 제16회

 

거련 태자와의 운명의 조우

아진이 새 석판을 들어 올리려 몸을 움직일 때 그 인물과 눈이 마주쳤다.
부리부리한 눈에 검붉은 얼굴의 전체적으로 넙죽한 무골형의 젊은 인물이었지만 어딘지 범접하지 못할 기품이 서려 있었다. 붉은 테를 두른 두건과 자색 비단옷 때문만은 아니었다. 행색으로 보아 명문대가의 자제임에 틀림없었지만 넙죽한 얼굴이 친근감을 주는 그런 인상이었다. 아진이 간단히 목례를 올리고 하던 행동을 계속 했다.
“주역의 가르침을 적고 있는 중인가?”
목소리 또한 걸걸했지만 위엄이 있었다.
“그렇습니다. 육십사 궤 중에 삼십이 궤의 변화 첫 부분입니다.”
아진이 저도 모르게 유식한 소리가 나왔다.
“이 일을 하려면 소양이 있어야는 하겠지?”
두건의 청년이 대견 하다는 표정으로 아진과 구하를 번갈이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이면서 혼자말 처럼 말했다.
“자네 몇 살인가?”
두건 청년이 아진의 눈을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부리부리한 눈에는 사람을 끌어 드리는 힘이 있었다.
“열 여덟입니다.”
아진은 곧이곧대로 대답해야 했다.
“자네는?”
구하에게 물었다.
“스물둘입니다.”
“경당에 나가는가?”
청년이 다시 아진을 쳐다보면서 물었다. 도성 안 스무살 이전 청년들은 경당에 등록을 해야 했다.
“저는 하호입니다.”
아진이 대답했다. 퉁명함이 묻어 있었다.
“그래? 하호라도 경당에 갈수 있지 않은가?”
“갈 수야 있지요, 하지만 말뿐입니다. 매일 같이 늦게 까지 일을 해야죠, 또 억지로 간들 심부름이나 해야지 가르침을 받기 어렵습니다.”
구하가 자조어린 투로 대꾸 했다.
청년은 무언가 생각하는 듯 했지만 더 말이 없었다. 잠시 그러고 있더니 한걸음 더 막사 안으로 들어와 마무리 단계에 있는 다른 석판들을 유심히 살펴보는 것이었다. 작업에 방해가 되고 옷에 돌가루 묻는다며 더 이상 들어오면 안 된다는 소리를 해야 했지만 웬지 그러고 싶지 않았고 또 그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이 돌들은 어디서 구했는가?”석판들을 살피던 청년이 물었다.
“아진이 태학의 학사님과 같이 장백산까지 가서 구해온 돌들입니다.”
구하가 턱짓으로 아진을 가리키며 답했다.
“장백산까지 갔었다고? 장백산엔 돌이 없을텐데… 있다 해도 화산의 부석들 아닌가? ”“용골과 안골 쪽으로 가면 돌산이 있습니다. 크진 않지만 쓸만한 돌이 꽤 있습니다.”
“그래? 용골 쪽에 그런 돌산이 있다고.”
이 대화는 후일 아진의 일생을 가늠한 큰 일과 연결되는 대화 였지만 그때 아진은 전혀 이를 의식하지 못했다.
“유학의 가르침만 비석으로 만들고 있나?”
잠시 돌을 살피던 청년이 다시 물었다.
“유학의 가르침 만이라뇨?”
구하가 대꾸 했다.
“우리 고구려 주몽신이나 유화부인의 가르침에 대해서는 전혀 계획이 없나?”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오경에 대해서만 명을 받았습니다.”
“그랬군, 추모경이며 삼대경 같은 우리 것도 좋은게 있는데… ”
청년이 혼잣말처럼 얘기했다.
아진은 공연히 심통이 났다.
“주몽님의 얘기를 할 거라면 요순 임금도 해야 겠네요?”
“요순임금? 그렇다면 너는 고구려인이 아니더란 말이냐?”
청년이 아진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이 녀석은 읍루 사람이예요. 이름도 원래는 니르아이진 이랍니다.”
구하가 냉큼 대답했다.
“그래? 하지만 고구려에 살면 고구려사람이지. 그렇지 않은가?”
청년의 눈은 많이 부드러워져있었지만 다그치는 태가 역력했다.
“그렇지만…”

아진이 무어라 말할 때 밖이 소란스러워지더니 태학도감이며 나온 박사등 대 여섯명이 천막 안으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청년을 발견한 그들의 얼굴엔 반가운 기색이 역력했다.
“여기계셨군요 . 한참을 찾았습니다. 그렇게 말씀도 없이 사라지시면…”
“좋은 시간을 보내고있는데요, 뭘”
“이렇게 미천하고 누추한 곳에서 어떻게…”
상당한 인물이라는 것은 짐작은 했지만 태학도감이며 박사들까지 나서서 극진히 대하는 것을 보면 예사인물은 아니었다. 근엄한 태를 내고는 있어도 나이는 구하나 아진 보다 두 서너살 위인 20대 초반 일텐데 할아버지뻘의 박사, 학사들이 쩔쩔매고 있었다.
“이제 가시지요, 태자마마. 학도들이 강당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태자마마라니? 아니 이 청년이 거련(巨璉) 태자였단 말인가?
깜짝 놀랄 일이었지만 왠지 아진과 구하는 이상하게도 자신들의 무례함에 대해서 거련 태자가 크게 개의치 않을 것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갖고 있었다.
그래도 구하가 작업대에서 일어나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아진도 엉거주춤 따라하는 수 밖에 없었다.
“태자마마이신 줄도 모르고 너무나 큰 무례를 범했습니다. ”
구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니, 너희들이 무슨 무례를 범했단 말이냐?”
태학도감이 나섰으나 예상대로 거련 태자는 태학도감을 제지하면서 무릎을 꿇은 두 사람에게 다가가 어깨를 짚으며 말했다.
“너희들 잘못한건 아무것도 없다. 나나 너희나 모두 영락대왕님의 충성스런 신하일 뿐이다. 일어나거라. 니르아이신이라 했던가? 고구려의 청년. 다음에 만나면 이 고을 저 고을을 떠돌던 소금장수였지만 왕위에 까지 오르신 나의 큰 할아버지 미천대왕의 이야기를 들려 주도록하지. 이 땅에 있는 모든 사람은 고구려의 형제들이란 말 잊지 말도록.”
태자는 다독이듯 아진의 어깨를 두드리고는 작업 천막을 나섰다.

 

“태자마마 정말 대단하신 분인데?”
구하가 감격한 듯 아진에게 말했다. 그의 눈에는 물기까지 어려 있었다,
아진은 그의 마지막 말이 왠지 가슴에 남아 메아리 치고 있었다.
“고구려에 살면 다 고구려 사람이고 형제들이지…’
아진은 그날 집에 돌아가 망구얼타이 노사에게 거련 태자에 대해 자세히 물었다.
“나도 들은 이야기 이기는 하지만 아주 출중한 인물이라는게 세상 사람들의 평이지. 모습부터 장대하다면서? 아 먼발치서야 나도 보았지.”
호태왕의 맏아들로 태어난 그는 태어날 때부터 남 달랐다. 태어나자 마자 산파가 그를 떨어 뜨릴뻔 했다는 데 어떤이는 너무 무거워서 그랬다고 하고 어떤이는 그게 아니라 갓 태어난 아기가 우는게 아니라 산파를 보고 희죽 웃었기 때문에 너무도 놀라 그랬다는 것이다.
거련이 태어난 때는 아직 찬바람이 부는 정월 이었는데 사슴이 궁 뜨락에 까지 내려왔었고 때아닌 진달래가 한달쯤 먼저 피었다고 했다.
그는 모습이 괴걸(魁傑)하고 지기(志氣)가 호매(豪邁)한 대장부로 성장 하면서 고구려 곳곳에 전설과 족적을 남기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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