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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장편 역사소설> ‘구루의 물길’ – 연재 제11회

안동일 작

4. 니르아이신 환생 전말

“그래 그거야, 우리민족이 중심이 돼서 북방 민족들을 다 안고 살았던 시대지.”
“그런 거 좀 발표 하시지 그러세요?”
“발표야 많이 했지.”
이때 안내원이 거들고 나섰다.
“우리 교수님이야 학회 나가서 쎄게 발표 하십니다. 교수님 외국 나가 발표 하면 텔레비전에서도 꼭 주목한단 말입니다”
“외국이라면 주로?”
“아무래도 중국이죠, 더러는 노서아도 가지만”
“발해는 소련 사람들도 관심 있어 한다는 얘기 어디선가 들은 것 같은데요.”
“그래요, 지금 연해주, 또 그 위쪽 까지도 발해 땅이었으니까.”
다음 일정 때문에 그쯤에서 일어서는 기자에게 박 교수가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다.
“북남이 힘을 합쳐서 우리 역사 찾기를 해야 합니다. 제나라 역사를 제대로 지키지 못하면서 어떻게 국제사회에서 행세 합니까? 조만간 큰일이 일어납니다. 중국 사람들이 왕청같이 발해가 자기네 역사라고 해서 아주 많이 싸우는데 더 한일 없으란 법 없지.”
그리고는 북쪽은 ‘수령님의 주체사관’으로 잘 뭉쳐져 있는데 남쪽이 문제라면서 가서 잘 전하라는 다분히 정치적으로 여겨지는 말을 덧 붙였는데 어쩐지 안내원을 의식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와서 보니까 그의 학문적 업적이며 깐깐한 성정은 남쪽 학계에서도 인정하고 있었는데 지금 돌이켜 생각하니 고구려 문제가 오늘날처럼 불거질 것이라는 조짐을 알고 있었던 듯 싶다.
그 후 언젠가 잡지에서 보니까 중국의 대표적인 고구려 문제 강경파 학자인 손진기 씨와 박시형 교수가 중국 쯔안(集案)에서 열린 ‘고구려 문화 국제 학술 대회’에서 고구려 문제와 관련해 논쟁을 벌이다 평소에도 심장이 약했던 손씨가 갑자기 쓰러져 병원으로 실려 갔다는 소식이 있었다. 그때가 93년 8월이었던 것으로 기억 된다.
박시형 교수는 2001년에 세상을 떠났다고 내외에 보도 됐다. 21년 생 이니까 정확히 80수를 누린 셈 이었다. 박시형 교수와의 만남은 그때는 몰랐지만 나와 고구려 역사, 나 여진족 그리고 동북아 역사와의 만남 서막이었던 셈이다.
온화한 듯 하면서도 중요한 부분에는 확신이 있었던 천생 학자였던 작은 체구의 박시형 교수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지금 그분은 오늘의 모습을 본다면 어떤 생각을 하실까.

 

1996년 11월 하와이

그 무렵 서울의 한 방송국에서 일을 하고 있었던 나는 가족이 살고 있었던 미국 뉴욕을 다녀오는 길에 하와이를 들렀다. 뉴욕의 동포 신문에서 함께 일했던 만화가 김창호 화백과 함께 였다. 서울 행 비행기 삯에 얼마간의 돈을 더 내면 경유가 가능했기에 모처럼 큰 맘 먹은 일종의 휴가 여행이었다. 2박3일의 일정이었는데 그때 김연주씨를 만났고 그를 통해 김학준씨의 유고를 접하게 되었던 것이다.
김연주씨는 내 4촌 여 동생의 동창생이었고 언젠가 뉴욕에 왔을 때 한나절 뉴욕을 안내하는 봉사를 해준 적이 있었는데 하와이 오면 꼭 연락을 하라고 해서 큰 부담없이 연락을 했더니 친구들과 함께 약속된 한국 식당으로 나왔다.
네사람 가운데 김연주씨를 포함해 세 사람이 그곳 일본계 하와이언과 결혼한 국제가정의 주부 들이었다.  하와이 초행이라 하니 다들 친절하게 대해 주면서 이것저것 안내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 때가 내가 쓴 남남 북녀의 사랑을 담은 소설 ‘해빙’이 서울의 모 방송국에 의해 드라마 화 된 직후 였는데 김 연주씨며 친구들이 모두 비데오로 빌려 봤다고 했다. 내가 바로 원작자라고 하자 더 반가와 했다.

특히 연주씨가 글 쓰는 일이며 책 출판하는 일에 관심이 있다면서 따로 만나 상의할 일이 있다고 했다. 나는 연주씨 자신이 문학소녀였기에 수기라도 출판하고 싶어 하는가 했었다. 언뜻 언뜻 듣기에도 나와 동갑인 그녀의 인생 역정은 드라마틱 했다.

다음날 우리는 연주씨 말고 또 다른 일행이었던 릴리씨네 집에 초대 받아 가 일본계 남편들도 만나고 근사한 저녁을 대접받았다. 하와이 최대의 커피 회사 사장 집 이었다. 그 자리에서 김 화백은 그의 수묵화 솜씨를 한껏 뽐내 좌중의 경탄을 받았고 연주씨와 나는 그 집 반 지하 무도장의 가라오케 반주에 맞춰 ‘하얀나비’를 함께 멋들어지게 불렀다. 그녀의 선곡이었고 당연히 처음 같이 불렀는데도 그렇게 화음이 썩 어우러졌던 모양이다. 지금도 그 노래를 들으면 연주 씨가 생각 난다.
그때 노래를 부르는 우리 둘을 일종의 부러움 반 질투 반으로 쳐다보던 그녀 남편의 표정도 일본인들을 볼 때면 가끔씩 떠올려 진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심각하게 국제결혼, 말하자면 다른 민족과 산다는 것이 어떤 건지 절실하게 생각해 봤던 것 같다. 사실 사촌누이 한사람도 미국인과 결혼해서 잘 살고 있지만 그들을 놓고는 그리 심각한 생각을 하지 않았었다. 연주씨는 아주 깊은 심연의 감정까지 전달되지 않는 그런 아쉬움이 간혹 있기는 하지만 큰 불편이나 불만 없다고 했고 릴리씨도 같은 얘기를 했지만 나의 지레 짐작은 그 말 들을 액면 그대로 받아드릴 수 없었다.
언어의 차이 그게 참 문제였다. ‘왜 사람들의 언어는 갈라져야 했을까?’
당시의 화두였다. 그때의 그 화두는 지금 이글을 쓰는 순간 고구려에 살았던 여진인 들이며 거란인 등 만주 일원 소수민족이 겪었을 차별이며 어려움을 생각해 보는 수순으로 이어지고 있지만 아직 명확한 답을 얻지는 못한 것이 사실이다. (계속)

*위 사진은 충주에 있는 장수왕의 고구려 중원비. 그곳 까지 고구려의 강역이었음을 나타내고 있고 그때 실직주(강릉)전투에 여진 군단이 주역으로 참여 했었다.   구루는 고구려의 옛 이름 물길은 말갈 여진의 옛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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