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일 작
3. 동맹 제전
아진도 사람들을 따라 호수에 뛰어 들었다. 살을 에이는 듯한 차가움이 엄습 했지만 조금지나 가슴까지 물에 적셔 지면서 참을 만 했다.
호수 저만큼 까지 갔던 호태왕이 되돌아 자맥질을 하기 시작했고 가슴까지 차는 곳에 오자 서서 걷기 시작 했다. 사람들은 길을 열면서 물을 첨벙이며 호태왕 만세를 다시 연호 했다. 휘적 휘적 걷던 호태왕이 어떤 이의 손을 한번 잡아 주자 너도 나도 손을 내미는 통에 난리가 나야 했고 호위병들이 창을 든 채 온몸을 적시면서 왕을 에워싸 길을 열어야 했다.
호태왕이 시위들의 호위 속에 뭍에 올랐다. 시위 속에는 금빛 바지저고리를 물에 흠뻑 적시고 있는 풍체 좋은 청년이 하나 있었는데 그가 바로 2 년전 책봉된 태자 거연(후일의 장수왕)이었다. 왕비가 수건을 건넸지만 태왕은 이를 물리치고 젖은 몸으로 다시 먼저의 바위에 올랐다.
태왕의 우렁찬 목소리가 호수를 울렸다.
“듣거라 나의 충성스런 고구려 백성들아, 짐은 천신님 조상신님들의 도움으로 제위에 올랐고 고구려의 영광을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여 왔다. 이제 우리 고구려는 패자의 길에 들어 섰다. 나를 따르는 백성들에게 영광이 함께 있을 것이다. 사랑하는 백성들이여, 주저함 없이 두려움 없이 다같이 하나 되어 나를 따르라. 내 너희들의 충성과 용맹을 가슴에 새겨 반드시 그 공을 상 주겠노라.”
대왕만세의 연호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아진도 옴몸의 땀구멍이 모두 열려 대왕의 포효를 받아 들이는 듯한 전율과 환희를 느껴야 했다. 나는 고구려인이 아닌데 하는 심연의 주저함이 있었지만 감동은 그것을 제압하고 있었다.
바위에서 내려온 태왕이 다시 궁성 쪽으로 걷기 시작 했다. 귀족 평민 대가 소가 할 것 없이 모두 덩실덩실 춤추며 왕의 뒤를 따랐다.
여기저기서 흥얼 거리는 노렛소리도 들리기 시작 했다.
누가 시작 했는지 모르지만 ‘장백산 산딸기’가 다른 노래들을 제압하기 시작했고 궁성이 빤히 보이는 곳 쯤 와서 완전한 합창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당초 말갈의 어린이들이 흥얼거렸던 말갈풍의 노래였고 오늘 잔치에서도 말갈인들이 자랑스럽게 불렀던 그 노래를 고구려 인들이 스스럼 없이 함께 우렁차게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아진도 진작에 쉰 목이었지만 사람들 속에 섞여 목이 터져라 노래를 불렀다.
어느틈 엔지 도도가 옆에 있어 아진의 바지 가랑이를 잡고 있었다.
장백산 산딸기 먹으면 두려움 없다는 여진의 노래는 영락10년 10월 보름의 그 밤이 샐 때 까지 국내성 도성을 계속 흔들고 또 흔들고 있었다.
4. 니르아이신 환생 전말
1992년 4월, 평양 김일성 대학 인문학부 박시형 교수 연구실.
“교수님, 발해 시대에는 우리 한민족 보다 말갈인 거란인 같은 다른 민족들이 더 많았다면서요?”
재미동포 언론인 안동일 기자가 고구려사 발해사 연구의 대가인 노(老) 교수에게 물었다.
당시 안기자는 북한 최초의 원사(박사 위의 명예학위) 라는 박시형 교수에 대해서도 또 발해에 대해서도 별로 아는 게 없었다. 김일성 대학 취재를 갔다가 우연히 교정에서 박 교수를 만났고 안내원으로부터 북한 최고의 역사학자로 고구려사 전문이라는 얘기만을 듣고 연구실에서 차 한잔 달라고 졸라 마련한 자리였다.
“그랬지요”
박교수가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그럼 언어가 서로 달라 많이 불편했겠네요?”
“그랬다고 할 수 있지, 하지만 많은 물길이나 굴안 사람들이 고구려 말을 했었기 때문에 아주 큰 불편은 없었다고 봐야지. 또 그땐 같이 쓰는 말들이 많았어요.”
“그랬군요. 참 고구려 시대에도 거란이나 여진족이 많이 살았습니까?”
“굴안, 거란은 그리 많이 살지 않았는데 물길, 말갈족들은 꽤 많이 살았지. 평양에도 굴안 마을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어요.”
“그렇습니까?”
“저기 있는 게 그 기록 중의 하나지”
박 교수가 연구실 모퉁이를 가리켰다.
모퉁이 탁자 위에는 기와장 같이 생긴 붉은 황토 판이며 부서진 도자기, 그리고 원형으로 된 청록색 돌판 들이 놓여져 있었다.
내가 일어나 그쪽으로 갔다. 박 교수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흙으로 구운 듯한 붉은 판 위에 예서체의 한자가 빼꼭히 적혀있었지만 도무지 알아볼 수 없었다. 기자의 한자 실력도 실력 이었지만 워낙 마모와 훼손이 심한 듯 했다.
무심코 손으로 집어 올렸더니 박 교수가 황급히 빼앗아 도로 자리에 놓는 통에 다소 무안해 져야 했다. 저만큼에 있었던 안내원이 더 놀란 표정을 지으면서 기자를 향해 고개를 흔들었다.
“죄송합니다. 귀한 유물인가보지요?”
박 교수가 이내 온화한 표정으로 돌아와 설명을 시작했다.
“이게 지석이라고 하는 건데 죽은 사람들의 관직이나 업적을 적어놓은 것으로 무덤에 함께 묻는 거지요. 이 지석이 고구려 때 살았던 여진 사람의 것으로 추정되는데 여기 봐요 숙신 향수라고 적혀 있죠?”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대단은 하군요. 이런 귀한 거면 박물관에 갔다 놔야 되는 것 아닙니까?”
“그래야지요 인차 갈 겁니다.”
박 교수는 얼버무리듯 말하곤 지석에 대한 설명을 계속 했다. 남쪽이 고향이고 경성제대 출신이라는 박시형 교수의 억양은 서울말 그대로였지만 가끔씩 북한식 어투가 튀어 나오기는 했다.
“숙신이 물길이라는 얘기인데 이 사람이 지금으로 말하면 숙신 마을 향장도 했고 장수로 싸움에 나가 공훈을 세웠다, 이런 얘기가 적혀 있어요.”
“그러니까 여진족 장군으로 까지 임명이 됐습니까? 언제 인데요?”
“이 예가 언제인지는 더 연구해 봐야겠는데 앞부분이 깨져 나가서 어려움이 있지요. 하지만 물길 사람들이 전쟁에 참여 했다는 얘기는 사서에도 자주 나와요.”
“그렇습니까?”
“을묘년 한성전투라고 들어 봤는가요?”
“잘 모르겠는데요. 한성은 들어 봤죠. 서울 아니에요?”
“그 부근이지, 5세기 말에 고구려 장수왕 군대가 내려가 백제의 왕까지 죽이고 큰 성들을 다 빼앗은 전쟁인데 그때 여진 군대가 다수 참여 했다는 얘기는 삼국사기에도 나오죠, 또 그 뒤에 영양왕 때는 왕이 말갈 군사 1만을 이끌고 요서를 선공 했다는 기록이 중국의 거의 모든 책에 기록 돼 있지요.”,
“그랬군요…그런데 왜 그런게 그렇게 안 알려져 있죠? 장수왕은 우리도 학교에서 열심히 배우는데”
“우리가 다 좀 욕심이 많아서 그래, 원래 우리 민족이 쎄잖아. 특히 고구려인들은… 오히려 중국 사람들이 그런 거 책에 많이 썼지.”
“그렇겠죠. 여진족이야 중국 자기네 민족 아닙니까?”
“꼭 그렇다고 볼 수 없지, 중국이야 내심으론 한족만 자기네 민족으로 치니까… 나머진 다 오랑캐라고 하지, 동이라는 말 들어봤소?”
“예, 동쪽 오랑캐 라고 우리 민족을 가리키는 말 아닙니가?”
“아니야, 우리 뿐 만 아니라 예 맥 물길 말갈 거란 선비족까지 동이라고 하지.”
“그러니까 고구려나 발해는 국제적인 국가였군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