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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ptember 20,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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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장편 역사소설> ‘구루의 물길’ – 연재 제9회

안동일 작

3. 동맹 제전

호리호리하게 몸에 붙은 긴치마와 너구리 잠뱅이, 송골매 깃털 머리 장식띠로 깜찍하게 단장한 도도가 맨 위에 올라서서 두 팔을 펼치고는 후렴부분 ‘두려움 없다네… 장백산 가자네’를 낭낭하게 외치자 사람들이 환호성을 올렸다. 도도가 노래를 부르면서도 아진 어깨위에 얹은 발을 자꾸 쿵쿵 구르는 통에 아진은 그녀가 미끌어 질까봐 조마조마 해야 했다. 공중 제비를 돌아 뛰어 내릴 때도 도도는 아진의 어깨가 아닌 가슴팍을 손으로 한번 꽉 누르는 것이엇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도도의 눈길과 마주 쳤는데 그녀는 일부러 그러고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듯 장난기 어린 눈웃음을 날리고는 제비처럼 뛰어 내렸다.
그때 도도는 겨우 8살 이었고 아진은 열일곱 이었다.

그날 부족축제는 해가 중천에 있을 오시에 시작해서 해가 떨어지고도 평소 같으면 도성 출입이 금지 되는 인경 고동이 울 시간 넘어 까지도 계속 됐다.
사람들은 여기저기서 제공되는 술과 음식을 먹으면서 웃고 떠들며 무대 위의 상황에 맞추어 함께 덩실 덩실 춤을 추기도 하면서 시름을 잊고 즐거움을 만끽했다. 무대 뒤쪽 왕과 대가들의 자리도 마찬 가지였다, 궁녀들이 연신 술과 음식을 날랐고 횃불이 켜질 때 쯤에는 호태왕의 얼굴도 붉으스레 변해 있었다.
이날 축제의 볼거리는 여진마을에 이어 다섯 군데의 일반 호민부락과 신흥 권문세가 부락 그리고 고구려 5부라 불리우는 기존의 귀족 세가들이 차례로 자신 부락 부족들의 위세를 뽐 내는 순서로 계속 됐는데 전반적으로 신흥부락들의 공연이 훨씬 짜임새와 성의가 깃들어 있어 관중들의 호응과 찬사를 받았고 5부족들의 그것은 화려하기는 했지만 상대적으로 기세가 꺾여 있었다.

신흥 명문 서압록 부락은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비사를 담은 무용극을 공연해 관중들을 웃게하고 또 눈물짓게 했고 탄탄한 호민 부락 양주 부락은 주몽의 신화를 형상화한 궁사들의 활극을 보여 찬사를 받았다. 기존 5부 가운데는 국상 가문인 소노부의 무술 시범이 고구려 최고의 역사(力士)라는 말객 도추가 등장해 수백근 돌 절구를 번쩍 들어 올리는 괴력 과시로 눈길을 끌었을 뿐 크게 인상적인 모습들을 보이지 못했다.
고구려 건국의 주역이었던 5부는 왕궁인 내궁을 중심으로 도성 전후 좌우로 저택을 배정 받고 있어 외부 좌부 전부 후부 로도 불리웠는데 내부가 계루부, 외부가 왕후를 배출하곤 했던 연나부(절노부라고도 함) 좌부가 환나부(순노부라고도 불리우는) 전부가 관나부(관노부) 후부가 비류부(소노부) 였다.

이들 5부족은 각지에 직속 영지를 갖고 있었고 도성인 국내성 뿐 아니라 평양성등 주요 성 에도 자신들의 연락소라 할 수 있는 소5부를 경영하면서 최고협의기관인 제가 회의 당연직 제가들로 국정을 좌지우지 해왔으나 전전대인 소수림왕대의 율령반포며 태학 설치 등 체제 정비 이후 그 영향력이며 위세가 현저히 떨어지기 시작했고 전전왕 고국양왕 대를 거치고 호태왕 등극 이후에는 그 위세가 더 급락해 왕의 협력자 조정자 반열이 아닌 충직한 신하의 자리에 만족해야 하는 형국으로 바뀌어 있었다.
오부의 권세는 약화 됐지만 계속 되는 정복 사업의 성공으로 그들의 부(富)는 계속 유지하거나 더 축적돼 있었기에 이들의 불만이 어느 정도 누그러 질 수 있었고 이들은 대개 권세와 사병력의 약화를 사치로 달래는 모습을 보였다.

왕후 가문인 연나부의 무술자랑을 끝으로 각부의 모든 공연이 끝났고 이제 왕 직속인 계루부 그리고 태왕 자신의 참여만이 남아 있었다.
계루부 역시 무술 시범을 보일 모양이었다. 궁사 10여명이 호사를 부린 경무장 차림 으로 활을 들고 등장했다.
그중에는 아진도 잘 아는 화곡도 있었다. 그 역시 군 내의 직급은 천 부장인 말객이었다.
아진에게 궁술이며 격투의 기본을 가르쳐 준 은인이었다. 당초 아진, 니르아이신은 여진 토성에서 국내성으로 끌려 왔을 때 아비와 함께 계루부로 배정 되어 노비 생활을 해야 했었다. 그때 어린 아진은 무기고의 청소며 잔심부름을 했었는데 거기서 화곡을 만났고 영민한 아진을 잘 보았는지 화곡은 자상하게 대해 주었고 무술의 기본 까지 가르쳐 주었던 것이다.

화곡의 활 솜씨는 유명했다.
횃불이 켜 있다고는 하지만 달이 구름에 숨어버린 어두운 밤에 떠오르는 장끼 여섯 마리를 차례로 맞추어 화곡이 군중들의 찬사를 한 몸에 받을 때는 아진도 목이 아플 정도로 환호를 보냈다.
이제 호태왕이 제전의 마지막을 장식할 차례였다. 악사들의 연주가 다시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계루부 소속 근위병들이 궁문까지의 길을 열었고 사람들은 모두 일어서 있었다. 태왕은 두루마기와 옥관을 벗더니 경장 차림으로 계단을 내려 왔다. 호태왕을 연호 했다.

계단을 내려온 태왕이 궁문으로 걸어갔고 그 뒤로 백관들이 따랐고 그 뒤를 군중들이 따랐다. 고구려 도성 국내성의 왕과 신하 백성들은 횃불을 앞세우고 함께 통구 연못으로 가는 중이었다. 장엄한 광경이었다. 아진과 친구들도 군중들 가운데쯤에 섞여 태왕을 따랐다.
통구지(通衢池)는 궁성에서 한마장쯤 떨어져 있었다. 용산에서 흘러들어오는 물이 모이는 분지의 시내를 인공으로 넓혀 조성한 연못 이었다.

통구지에는 궁성 잔치에 참석하지 못했던 성민들이 벌써 나와 진을 치고 나름대로의 잔치를 열고 있었다.
태왕 일행의 횃불이 저만큼에 보일 때부터 군중들은 호태왕 만세 고구려 만세를 외치고 있었다.
태왕일행이 연못가에 다가 서자 사람들이 조용해 졌다. 연못의 물은 횃불을 받아 검푸르게 반짝이고 있었다. 국상 가랍비님이 태왕에게 뭐라고 하는 듯 했으나 태왕은 그의 어깨를 한번 툭 치고는 군중들을 한번 다시 훑어 본 뒤 두손을 번쩍 들었다. 호태왕 만세가 다시 터져 나왔다.
가랍비는 굳이 온몸을 다 담그지 않아도 여느 선대 왕처럼 손발이나 적시면 어떻겠냐는 충언을 올렸을 터였다. 때는 한 겨울은 아니라 하더라도 새벽이면 서리가 내리고 살얼음이 어는 북국의 음력 10월이었다. 담(膽)대한 덕(德) (담덕 호태왕의 이름) 호태왕이 그 말을 들을 사람이 아니다.

호태왕은 군중들 연호 속에 몇 걸음 옮겨 낮으막한 바위 위에 오르더니 그대로 몸을 날려 연못으로 뛰어 들었다. 그리고는 경장을 입은 채로 자맥질을 시작했다.
군중들의 연호는 더 높아 졌고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첨벙대며 태왕을 따라 물로 뛰어들었다. 근위병들이 말릴 틈도 없었다.
구름에 가려져 있던 10월 보름달이 그 순간 구름을 벗고 휘영청 환하게 호수를 비쳤다.
호수는 문자 그대로 인산 인해가 되어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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