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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ptember 20,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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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장편 역사소설> ‘구루의 물길’ – 연재 제6회

안동일 작

2. 장백산 산딸기

가두의 앞에는 아진이 오전에 연마해 놓은 섬록암 원통형 기와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자신이 직접 아진의 작업대로 가서 실어온 모양이었다. 성내 대가들의 부경 증축에 쓰일 장식용 기와였다. 20개쯤 되었다. 하루 일당량을 훨씬 넘는 분량 이었다. 이 분량 때문에 가두도 더 화를 내지 않는 참이었다.
채석강에서 섬록암을 제대로 다룰 수 있는 사람은 몇 명 되지 않았다. 화강암과는 달리 원석의 입자가 거칠기도 하고 방향성이 없어 잘 쪼개지기 때문이었다.
국력이 커가자 대가들의 사치도 비례해서 커 가고 있었다. 연일 부경 증축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부경이란 일종의 창고 였다. 원래는 식료품을 선선하게 저장하기 위해 집 뒤쪽에 갈대와 너와로 높이 지은 2층 다락식의 창고였는데 국내성 대가들은 경쟁적으로 이 부경을 호화롭게 지어 곡물 식료품 뿐 아니라 비단이며 도자기 보석류 까지 보관하고 진열하는 집안의 자랑거리 볼거리로 만들고 있었다.
부경의 지붕도 당초엔 우엉 잎이나 옥수수 잎 잘해야 흙 기와로 만들었는데 성내 대가들은 돌기와를 얹었고 급기야 비싼 섬록암 기와로 처마와 용머리 부분을 장식하는 것이 유행으로 번졌다.
그럴수록 아진의 일은 늘어가야 했다. 아진은 연마조로 배속 된지 3개월이 지났을 때 돌을 연마하는 발틀을 스스로 고안해 만들었다. 한손으로 돌리고 한손으로 돌을 잡아야 하는 종래의 손틀보다 훨씬 힘이 덜 들었고 시간도 단축 됐다. 그런데도 나이든 기술자들은 ‘돌에는 손맛이 배어야 한다면서 손틀을 고집했다.
“아진 이건 잘했어, 환 대로가 무척 좋아 할거야. 그리고 용 대가네 것도 오늘 안에 끝내 줘야 할 텐데 시간 충분 하겠지?”
백장 가두가 이젠 은근한 어투로 아진을 달래는 형국이었다.
아진은 무표정한 얼굴로 탁자위의 석재 인수 때 필요한 징표인 녹색 돌을 집어 들고는 기둥에 기대어 있던 지게를 메고 막사를 나섰다.
해는 벌써 하천으로 기울고 있었다.
돌기와 스무개의 연마를 끝내려면 아무래도 해가 떨어진 연후에 저녁을 먹고도 횃불을 켜고 작업해야 했다.
지난 봄 석도강 제조로 부임한 주부 선직이 야간 작업을 자제 하고 차별을 없애라고 영을 내렸지만 잘 지켜지지 않았다. 특히 말갈족 인부들에 대해서는 그 차별이 쉽게 자제 되지 않았다. 야근을 할 때 주는 석식만 해도 그랬다. 구루인(고구려인) 들은 식탁에 찬들과 함께 차려 주었는데 말갈인 들에게는 밀과 수수를 섞어 만든 전병에 구루인 식탁에 올리다 만 나물이며 고기 몇점을 뿌려 놓고 두르르 말아 던지듯 건네주곤 했다. 너희들 음식을 만들어 주는 것만으로도 고맙게 여겨라는 식이었다.
실제 그것이 물길 전통식 이기는 했다. 수렵민족이었던 물길은 사냥터를 따라 바삐 이동해야 했기에 여러 음식을 주욱 늘어 놓고 먹는 정찬에는 익숙하지 않았고 부침개 같은 전병 위에 육류와 야채를 싸서 먹었다. 식생활 풍습과 관련 고구려인을 예맥(濊貊)족 으로 함께 분류 하기도 하는데 엄밀히 따지면 예족은 평원에 정착해 농경에 종사했고, 맥족은 산악 지방에서 주로 사냥을 했다고 다시 분류 되기도 하는데 평야 지방에 있었던 부여인이 예족 고구려인이 맥족이 되는 것이다.
고구려 인들도 당초 여진과 같이 간단한 식단을 위주로 했을 터이나 국력과 문화가 발달하고 또 예족을 복속 시켜 통합하면서 그들의 영향을 받아 수저를 사용하게 됐고 식탁에 육류와 나물류를 차려 놓고 수수나 기장 그리고 옥수수를 알곡으로 만들어 찐 밥을 지어 먹었다. 그 무렵 쌀은 고구려에서 아주 귀한 고급 곡식이었다.

아진의 예상대로 일은 한밤중이 되어 서야 끝이 났다. 식당 막사에서의 저녁도 아진이 예상했던 그대로였다. 다만 양념처럼 뿌려지던 철판에 구운 멧돼지 고기가 제법 고기처럼 씹혀 졌다는게 달랐다면 달랐다.

“오늘은 아진 너 때문에 포식 했는걸 뭐, 내일도 야간 작업 있니? 또 기다려 줄께”
덩치 답지 않게 어린 티를 못 벗고 있는 오보타이가 싱글거리며 아진에게 말했다. 오보타이, 보태는 아진, 라운 보다 두 살 위였다. 그런데도 그는 몇 년째 운반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아진과 라운 그리고 보태 세 소년은 풀벌레 소리 자욱한 양차에서 도성 북문으로 가는 잔도를 걷고 있었다.
성문 출입은 인경 고동이 울리는 시각 까지 가능했지만 물길인의 경우에는 세사람 이상이 함께 있어야 성문을 열어 줬다. 평소에도 특별한 사정이 있지 않은 한 혼자 다니는 독보는 금지 되고 있었다. 예전엔 아주 엄했다는데 요즘엔 많이 완화 돼 있다고는 해도 야간에는 그 규칙이 적용 됐다. 여진인들의 탈주를 막기 위한 연원 있는 규칙이라나.
아진이 야간작업을 하는 바람에 라운과 보태가 기다려 줘야 했다. 양차 석도강 인부들은 대부분 석강촌에 살았지만 물길 인부들은 도성에서 매일 같이 출퇴근 했다. 물길사람 들은 도성 안 북 벽에 올망졸망 매달려 있다 시피 한 부곡에서 집단으로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부곡은 꼭 여진 부락 말고도 천민 부락을 일컫는 말이었는데 여진 사람들은 자신들의 부락을 물길가산이라고 불렀고 고구려 사람들도 이제는 그 말을 알아들었다. 천대 받는 부곡 하호(下戶)l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가산을 이루고 자기 집을 지니며 자기 식구와 산다는 것은 어찌 보면 다행인 일이었다.
많은 말갈인들이 아직 노비로서 살고 있었다. 대개 전쟁에서 잡혀온 말갈인들 이었는데 그들은 궁성이나 대가들의 저택에 예속 돼 마굿간이나 창고 등의 허드렛일을 하고 있었다.
풀벌레 소리가 조금 잦아드는 듯 싶더니 성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이 더 가깝게 다가 왔다.
“그나 저나 수박 춤 연습에 빠져서 어쩌지. 망구얼타이 노사가 화 단단히 나있을 것 같은데. 우리 세 사람 빠지면 영 허당이잖아. ”
라운이 성벽 망루의 횃불이 빤히 보이는 지점에 오자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우리가 뭐 놀다 오냐? 일이 있어서 그랬는데 뭐, 그리고 형님이 다 노인 구워 삶을 단단한 먹이감 준비했지. 볼래?”
보태는 허리 춤을 열어 기름종이에 싼 전병 두개를 보여준다.
“언제 그건 그렇게 챙겼어?”
“이몸이 다 구만리를 보는 어르신 아니냐. 망구얼타이님이 석도강 음식 그립다고 노래를 부르시지 않니? 나한테도 매일 같이 오늘은 뭘 먹었냐고 묻곤 하는데 이걸 척 앵겨 드리면 노인네 입이 함박 만큼 벌어 질꺼야.”
망구얼타이는 가산향장 (촌장)이었다. 젊었을 때는 석도강에서 일을 했었는데 요즘엔 신발 만드는 일을 하고 있었다.
며칠 있으면 동맹 제전이 시작 된다. 도성 뿐 아니라 나라의 최고 명절 이었다. 올해 같이 모든 일이 잘 풀렸고 풍년 까지 든 해의 제전은 어느 때 보다 화려하고 성대하게 치러질 것이 틀림없었다.
제전 때면 모든 부락이 장기 자랑을 했다. 호태왕이 즉위 한 이후에는 여진 부곡 까지도 그 참여가 허락 됐다. 그래서 향장은 물길사람 기상을 보여 주자며 부락민들을 채근하고 있었다. 아진 등 소년들은 여진 고유 씨름에 고구려 가락을 합친 수박춤을 공연하기로 했고 매일 저녁 연습을 해 왔었던 것이다.

‘장백산 산골에 피는 붉은 산딸기
한번만 맛보면 호랑이 늑대도
무섭지 않다네 무섭지 않다네‘
보태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 했다. 수박춤을 추면서 함께 부를 노래였다.
라운이 따라 했다.
‘붉은꽃 머리에 꽂은 처녀야
우리와 함께 산딸기 따러
장백산 오르자 장백산 오르자‘
아진은 웬지 흥이 오르지 않아 건성으로 고개만 끄덕이며 걸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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