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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ptember 20,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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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장편 역사 소설> ‘구루의 물길’ – 연재 제3회

안동일 작

-평양성 망루의 대화

왕조차도 백잔(百殘)이라 부르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백제는 고구려에게 사무친 원한이 있는, 눈엣 가시와도 같은 존재였다.

“병진의 화라고 들어 보았는냐?”

“예, 고구려의 선왕께서 간악한 백잔의 활에 맞아 부상하신 그 사건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 백잔과는 동족이면서도 그런 원한이 있단다.”
371년 백제의 근초고왕이 3만의 병력으로 고구려에 침입 고국원왕이 전사하여 유사이래 최대의 참변을 겪었던 것이다. 고국원왕은 소수림왕의 아버지로 광개토대왕의 할아버지이며 장수왕에게는 증조 할아버지가 되는 왕이다. 왕의 역사 강의는 계속 이어졌다.
“하지만, 백제와 고구려는 따지고 보면 이처럼 원한을 가지고 살 처지가 아니었단다. 물론 같은 말을 쓰는 동족이라는 것도 있지만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이 우리 고구려의 시조 추모왕 주몽의 아들이기 때문이지. 주몽왕께서 처음 졸본 부여에 왔을 때 부여왕에겐 아들이 없고 딸만 셋 있었다는구나. 부여왕은 주몽왕을 보자 범상한 인물임을 알고 둘째 딸을 아내로 주었지. 이 부인의 몸에서 비류와 온조 두 아들이 태어났는데 주몽왕이 북부여에 계실 때 낳은 아들 유리왕을 태자로 삼자 비류와 온조는 신하들과 더불어 남으로 내려갔고 온조가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세운 나라가 바로 백제였단다.”
“그랬군요.”
“그리고 비류도 처음 다른 곳(미추홀, 인천)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웠으나 곧 온조의 나라와 합쳤는데 국명을 백제로 정한 이후에도 동명왕의 사당을 세우는 등 고구려의 후손임을 분명히 했고 고구려와 친선 협력 관계를 돈독히 했었지.”
왕은 잠시 숨을 가다듬었다.
“두 나라의 협력 관계가 깨지게 된 것에는 중국 한족들 때문이었단다.” 아진을 빤히 쳐다보는 왕의 눈빛에 어떤 비장함이 감돌았다.
“한4군이라고 들어 봤지?”
“네, 들어 봤습니다.”
“그래. 그때 중국의 후한은 이른바 한4군을 설치하고 있었는데 그중 대방군이라는 현 때문에 백제와 고구려 사이가 심히 틀어지게 되는 사건이 발생하기에 이른단다. 백제의 7대왕인 책계왕은 대방의 반 강압에 못 이겨 태수의 딸을 왕비로 맞아 들였지. 하지만 왕비의 용모가 아름다워 왕은 왕비에 빠져 살았는데 고구려가 대방을 몰아내려 군사를 동원했을 때 백제는 대방의 편을 들었던 것이다. 이게 말이 되느냐? 백잔의 조정에서는 형제의 나라인데 어찌 그럴 수 있느냐는 의론이 분분했지만 왕비의 치마폭에 휩싸인 왕의 뜻이 완강했기에 백제는 대규모 원군을 대방에 보냈고 우리 고구려군은 뜻을 이룰 수 없었단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그래. 그때 난데없이 뒤쪽에서 기습을 당한 우리 고구려군의 피해는 막심했다고 한다. 이 사건 이후 우리는 백잔을 예전처럼 대할 수 없었는데 책계왕의 증손자인 근초고왕 시절에는 태자수가 선봉이 되어 고구려를 대규모로 침입한 이 전투에서 고국원왕께서 용감히 맞서 싸우다 불의의 화살에 맞아 전사하시는 참담한 일이 벌어졌는데 이 사건을 일러 ‘병진의 화’라고 하는 것이란다.”
왕은 말을 하면서도 분을 삭이지 못하는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호태왕 마마께서 그 원한은 갚으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그 원한이야 하늘을 찌르고 있어 갚는다고 갚아질 수 있겠냐만 내 아버님께서 백잔을 어느 정도 징치한 것은 사실이지. 하지만 아직도 백잔은 자신들의 처지를 모르고 호시탐탐 우리와 신라를 노리고 있지 않느냐? 더욱이 왜까지 끌어들이고 있다는 점이 나로서는 심히 못마땅한 일이구나.”
공연히 왕이 성난 마음을 털어놓으려 백제와 신라의 얘기를 꺼내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제는 한마디 말만으로도 왕의 생각을 알 수 있게된 아진이 목소리에 굳건함을 실어 말했다.
“예, 잘 알겠습니다. 마마께서 백제 정벌을 염두에 두고 계시다는 것을 이제 알았으니 소장도 더욱 분발하도록 하겠습니다.”
아진의 대답이 크게 틀리지 않았던지 왕의 얼굴에 미미한 웃음이 떠올랐다.
“그것뿐이더냐?”
“잘 알겠습니다, 마마. 더욱 분발하여 병사들을 단련시키겠습니다.”
“그리고 또?”
“백성들도 깨우치겠습니다.”
그제서야 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야지 뭐니 뭐니해도 백성들의 생각이 중요하느니라. 아무리 어쩔 수 없는 전쟁이라 하여도 전쟁은 백성들에게 고통을 주는 일이기 때문이지. 백성들이 한마음으로 따른다면 전쟁도 쉽게 끝낼 수 있는 일이니라.”

잠시 사이를 두고 왕은 다시 입을 열었다.
“내 어려움을 무릅쓰고 이 곳 평양으로 천도한 이유를 두고 사욕에 눈이 어두워 백성을 업수히 여기고 심지어는 왕권에도 도전하는 귀족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서였다고 정치적으로만 해석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내겐 분명히 그것보다 더 큰 이유가 있단다, 아진아.”
“이 곳으로 옮겨서 도성 백성들의 살림이며 먹고사는 문제가 한결 편해졌습니다, 마마.” 아진이 저 만큼에 펼쳐져 있는 평야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래. 경제적인 면에서 식량문제도 얼마나 수월해졌느냐? 그리고 중국과의 물자조달이며 교역에서도 한결 수월해진 것이 사실이지 않느냐? 하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는데 사람들은 그걸 잘 이해 못하더구나.”
아진이 고개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소장도 아직…”
“그래. 내 아직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지. 아진 너라면 쉽게 이해 할 듯도 싶구나.” “말씀해 주십시오. 듣고 싶습니다.”
“너는 중국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몇 차례 다녀오기도 했으니 남다른 느낌이 있지 않겠느냐?”
“큰 나라라고 생각합니다.” “또. 그저 큰 나라일 뿐이라고 생각하느냐?”
“저는 중국의 사람들 특히 한족에 대해 생각해봤습니다.”
“그래. 듣고 싶구나.”
“저번에 위나라 갔을 때도 느꼈지만 그 사람들 정말 대단하구나 하는 것이 제 느낌이었습니다.”
“음…” 왕이 무언가 동의한다는 듯 했다. (계속)

(위 그림은 장수왕 평양성 상상도)

(*구루(句麗)는 고구려의 옛 이름, 물길(勿吉)   은 여진의 옛 이름) 

이 소설은 여진(만주족) 출신으로 고구려 장수왕 때, 태대모달 숙신도호 대장군으로 까지 올랐고 왕으로부터 대창하(大昌河)라는 고구려 성과 이름을 하사 받았던 인물의 일대기를 옴니버스 형식으로 그린 작품이다. 
그런데 중국이 꽤 오래전 부터 ‘동북공정(東北工程)’ 프로젝트라 하면서 고구려사의 자국사로의 편입이라는 무리수를 두고 있다. 
고구려 사에 대한 중국의 왜곡 및 자국사로의 편입 시도에 대해서는 단호히 대응해 그들의 아전인수, 견강부회를 지적해 시정을 촉구해야 한다. 하지만 행여 이 대응이 감상적이며 국수적인 측면에서 이루어지는 것처럼 비쳐진다면 이 또한 바람직하지 않다.요즘 같은 지구촌 시대에 꼭 우리의 행정력이 미쳐야만 우리 땅 인가. 꼭 우리말을 쓰는 사람들만이 동족인가. 중국이 아무리 자기네 역사라고 우긴들 천하가 엄연히 알고 있는 우리 민족의 고구려가 중화 속의 변방 고구려가 될 것인가. 이탈리아가 반도에 갇혀 있다고 로마의 역사가 사라지기라도 했단 말인가.
이제 시야를 더 넓게 떠야 한다.
이제 우리는 민족이라는 담론이 만들어 낸 프로그램속의 국수적 성향의 메트릭스에서 는 벗어나되 함께하는 큰 틀의 역사인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 천 700년전 장수왕이 바로 이런 역사관을 지니고 있었다. 이소설의 주인공 아닞 장군이 그 증인이다.  이런 우리의 발상의 전환과 지평의 변화는 마치 트로이의 목마처럼 상대편에 의해 상대편 진영 깊숙이 들어가 종국의 승리를 따내는 가장 힘 있는 요소가 될 것이 틀림없다. (작가의 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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