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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ptember 20,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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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장편 역사 소설> 구루(句麗)의 물길(勿吉) – 연재 제2회

(*구루는 고구려의 옛 이름,  물길은 여진의 옛 이름)
 안동일 작

그때 중성에서 남문으로 뻗은 대로에 무슨 행차가 이어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말과 수레가 있었고 여나믄 명의 창을 든 군사가 수레를 호위하고 있는 모습도 보였다. 왕의 시선도 그 행렬에 멎어 있었다. 무슨 행렬일까 싶어 아진은 왕의 얼굴을 한번 올려보고는 잠시 밑에 내려가 알아보겠다고 했지만 왕이 손을 들어 제지를 했다.
“왜 무슨 일인가 싶어 그러느냐? 내려갈 필요 없다. 아마 신라 마립간의 아들 복호가 서라벌로 돌아가는 모양이다.”
“그랬군요. 복호 왕제가 돌아가는 날이 오늘이군요.”
“그래, 어제 인사를 왔더구나. 고구려나 신라나 다 한 형제국인 것을 잊지 말라고 일러줬다.”
“네, 잘하셨습니다. 저들도 마마의 도량에 크게 감복할 것입니다.”
복호는 신라 내물이사금의 아들이자 현 왕인 눌지 마립간의 동생이었다. 신라에서는 왕을 이사금이라 불렀는데 몇 년 전 눌지가 등극하면서 마립간으로 그 호칭을 다시 바꿨다. 복호는 10여년의 볼모 생활을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이 일에는 신라의 충신 박제상이라는 인물의 활약이 돋보였다. 박제상은 지난달 서라벌에서 올라와 왕을 만나 유창한 변설로 왕의 마음을 움직이게 했다. 박제상은 고구려 백관들이 배석해 있는 자리에서 왕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눈물까지 쏟으며 이렇게 말했었다.

“신은 이웃 나라와 사귀는 도리는 성신(誠信)이라고 들었습니다. 볼모를 교환하는 것은 중국의 패왕만도 못한 말세의 일입니다. 지금 과군의 사랑하는 아우가 여기에 있은지 거의 10년이 됩니다. 할미새는 형제를 부르는 것처럼 서로 지저귑니다. 우리 과군도 형제의 정을 가슴에 품고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만약 대왕께서 은혜롭게 돌려보내신다면 마치 아홉 마리 소에서 터럭 하나가 떨어지는 것과 같이 아무 손실이 없을 것이지만 과군과 우리 백성들이 대왕을 덕스럽게 여기는 것은 헤아릴 수가 없을 것입니다. 왕께서는 이를 깊이 헤아려 주십시오.”
심금을 울리는 변설이었다. 그의 말재주도 재주이거니와 장수왕 역시 내심 볼모를 이용하는 것에 대한 미진함이 가슴 한구석에 있던 터였기에 크게 주저 하지 않고 볼모의 귀향을 허락했다.
그것이 장수왕의 위대한 점이었다. 그는 스스로의 생각에 비춰 잘못된 일이 있으면 부끄럽다고 감추거나 아니라고 발뺌하지 않고 곧장 시정에 들어가는 인물이었다.
왕과 아진의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내 이곳으로 도읍을 옮긴 까닭을 언젠가 말한 바 있었지?”
“네, 그렇습니다. 북쪽의 경계를 튼튼히 하면서 남으로 기반을 넓히시겠다는 큰 뜻이 있으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 남쪽 신라와 백잔의 백성들이야말로 우리 고구려의 백성들과 다를 바 없는 나의 백성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북쪽에서 우리와 함께 신산을 나누고 동락했던 너희 숙신도 마찬가지고.”
“알고 있습니다.”
“수군들 조련하는 곳에는 가 보았는가? 너의 가산(마을)에서도 3백이 자원했다는 말을 들었다.”
왕은 요즈음 수군의 조련에 부쩍 열을 올리고 있었다.

호태왕 시절에도 고구려의 수군은 이미 그 활약이 대단했으나 장수왕은 더욱 체계적이며 준비된 수군을 만들라고 신하들을 채근했다. 평양이 대동강을 통해 황해로 넘나들 수 있는 수운 해운의 요지였던 탓이었다. 평양성 천도는 고구려에게 해군의 필요성을 다시 한 번 인지하게 해주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곧이어 다가올 평양성의 국제화에 발맞추어 미리 대비해 두려는 장수왕의 깊은 뜻이었다.
“아진, 너는 내가 왜 그토록 반도의 삼한지방에 대해 애착을 갖고 있는지 짐작하고 있는냐?” 왕이 망루 한쪽 평상에 앉으면서 이야기했다.
“소장이 어찌 대왕의 큰 뜻을 쉽게 짐작할 수 있겠습니까?” 아래쪽에 있던 시비 한 사람이 얼른 올라와 평상에 깔개를 까는 통에 아진은 잠시 일어서야 했다. 그가 선 채로 대답을 달자 왕이 손짓을 했다. “이리 와서 앉거라.” 왕이 자신의 옆자리를 가리켰다.
오랜 이야기를 할 모양이었다. 왕은 가끔씩 자신의 이야기가 길어질 때면 아진을 옆에 앉혀놓고 동무와 얘기하듯 어깨 높이를 맞추곤 했다. 얘기가 이어지는 가운데 아진은 그보다 훨씬 학식이 뛰어난 왕에게 많은 것을 듣고 배웠다. 장수왕 역시 영특한 대화 상대인 아진에게 가르쳐주는 일을 즐겼다.
“오늘은 내 너에게 우리 고구려와 삼한의 역사에 대해 들려 주마, 공부한 바 있는가?”
“아직 구체적으로 배운 바는 없습니다.” 아진이 왕에게서 약간 떨어져 깔개가 깔리지 않은 맨 평상에 앉으며 대답했다. 아무리 어깨 높이를 맞춘다 한들 신하가 왕의 친구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 잘 듣거라. 신라는 예전부터 우리 고구려의 도움을 받아 전진에 조공을 했다. 여러모로 신라는 고구려의 신세를 질 수밖에 없는 처지였지. 중국 내륙으로 들어가려면 고구려 땅을 밟아야만 했기 때문이지.” 그랬다. 후기에는 신라가 남양만에서 뱃길을 텄지만 이때만 해도 황해는 백제의 영역이었던 것이다.
“우리 고구려 왕실은 늘 신라를 보호해야 할 형제국으로 생각해 왔었지. 고구려가 내물 이사금 이후 신라를 공격한 적이 없지 않느냐. 신라의 내물 이사금도 우리 고구려의 강성함을 익히 알고 있었기에 사신을 보내 조공했으며 호태왕 시절인 392년에 왕족 실성을 국내성에 볼모로 보냈는데 실성은 후일 신라로 돌아가 왕에 추대 될 정도로 명망이 있는 인물이었지 않느냐.”
“그랬군요.”
“그 무렵 신라는 계속 왜구의 침입에 시달리고 있었다. 내물 이사금 38년에 왜구가 쳐들어와 금성을 포위하고 닷새나 풀지 않아 엄청난 고통을 겪었고 이듬해에도 백제의 부추김을 받아 왜구가 신라를 대대적으로 공격했었지. 그때 신라는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도움을 요청했는데 400년 영락 10년 선왕인 호태왕께서는 보병과 기병 5만으로 구성된 고구려 유사이래 최대의 또 최장의 원정군을 보내 왜구를 격파하지 않았더냐.”
“호태왕 마마의 비에 적혀 있어 그 일은 알고 있습니다.”
“이때 우리 고구려군이 뱃길을 이용했었지. 남해를 거쳐 낙동강 하구로 들어가 왜구를 몰아냈는데 왜구는 고구려가 온다면 동해 울진 지방에 상륙할 것이라고 예상을 하고 그쪽에 대비를 했다가 의표를 찔렸던 것이지. 가까운 동해를 택하지 않고 백제 영역인 황해와 남해를 돌아 간 이때의 승리는 많은 것을 얘기하는데 고구려 수군이 그 만큼 강했다는 얘기 아니겠느냐? 그 전통을 이어 받아야 하기에 내 그리 수군양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우리 수군의 활약은 왜구와 백제의 기를 여지없이 꺾었고 신라는 너무나 고마운 나머지 내물 이사금이 직접 고구려에 와서 은공을 감사하면서 예를 올리지 않았더냐?”
“하지만 백잔은 사정이 다르지.” 이야기의 대상이 바뀌자 그 흐름도 바뀌었다. (계속)

이 소설은 여진(만주족) 출신으로 고구려 장수왕 때, 태대모달 숙신도호 대장군으로 까지 올랐고 왕으로부터 대창하(大昌河)라는 고구려 성과 이름을 하사 받았던 인물의 일대기를 옴니버스 형식으로 그린 작품이다. 그런데 중국이 꽤 오래전 부터 ‘동북공정(東北工程)’ 프로젝트라 하면서 고구려사의 자국사로의 편입이라는 무리수를 두고 있다. 고구려 사에 대한 중국의 왜곡 및 자국사로의 편입 시도에 대해서는 단호히 대응해 그들의 아전인수, 견강부회를 지적해 시정을 촉구해야 한다. 하지만 행여 이 대응이 감상적이며 국수적인 측면에서 이루어지는 것처럼 비쳐진다면 이 또한 바람직하지 않다.요즘 같은 지구촌 시대에 꼭 우리의 행정력이 미쳐야만 우리 땅 인가. 꼭 우리말을 쓰는 사람들만이 동족인가. 중국이 아무리 자기네 역사라고 우긴들 천하가 엄연히 알고 있는 우리 민족의 고구려가 중화 속의 변방 고구려가 될 것인가. 이탈리아가 반도에 갇혀 있다고 로마의 역사가 사라지기라도 했단 말인가. 이제 시야를 더 넓게 떠야 한다. 이제 우리는 민족이라는 담론이 만들어 낸 프로그램속의 국수적 성향의 메트릭스에서 는 벗어나되 함께하는 큰 틀의 역사인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 천 700년전 장수왕이 바로 이런 역사관을 지니고 있었다. 이소설의 주인공 아닞 장군이 그 증인이다. 이런 우리의 발상의 전환과 지평의 변화는 마치 트로이의 목마처럼 상대편에 의해 상대편 진영 깊숙이 들어가 종국의 승리를 따내는 가장 힘 있는 요소가 될 것이 틀림없다. (작가의 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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