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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ptember 19,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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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장편 이민현장 소설> ‘영웅의 약속’ 연재 79회

안동일 작

보로이 저택의 패션쇼

아라베스크 드레스를 입고 나타난 베티가 조명쪽으로 걸어가 총각의 이마를 손으로 찌르는 시늉을 하자 웃음이 더 터졌다. 관객의 기대가 무엇인지 아는 두 프로들은 역시 비키니 수영복차림을 마지막 레파토리로 준비 하고 있었다. 두 여인이 모두 비키니 차림으로 무대에 나타났을때 그들의 전신은 온통 땀에 젖어 있었다. 땀방울을 흘리면서 숨차 하는 모습을 보면서 빌리가 의자에서 일어나 박수를 쳤고 보로이도 일어나 독특한 자세로 열렬하게 박수를 쳤다. 그가 인민 대의원 시절 크렘린에서 쳤던 그런 박수 였을게다.
박수에 보답이라도 하듯 두 모델은 쭉 뻗은 두다리며 발달한 가슴과 히프를 강조하는 여러 포즈로 수영복의 자태를 한껏 뽐냈고 빌리와 보로이의 옷에 땀을 잔뜩 묻히는 포옹을 한 차례씩 해 주고는 커튼 뒤로 사라졌다.
“빌리 자네를 알게 된 것은 내인생 최대의 기쁨이라네.”
그녀들을 기다리면서 보로이가 이마의 땀을 닦으며 빌리에게 한 말이었다. 잠시 후 그사이 샤워라도 했는지 두 여인은 상큼한 모습으로 거실로 나타났다. 보로이는 그녀들에게 최대의 찬사를 아끼지 않았고 자신이 어떤 보답을 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우리 미스터 쳉 사업이나 열심히 도와주세요.”
페트리샤가 그렇게 말했기에 빌리는 씩 웃을 수 밖에 없었다.

그날밤 페트리샤는 자신의 호텔로 가지 않겠다고 했다. 보로이의 저택에서 자고 가라는 그의 만류를 완곡하게 뿌리치고 리무진에 오를 때 페트리샤도 빌리를 따라 올랐다. 베티는 보로이의 권유에 따라 저택 게스트룸에서 러시아의 여왕처럼 하룻밤 자는 것도 좋을것 같다며 페트리샤와 빌리에게 윙크를 던지곤 그곳에 남았다.
리무진에 올라 오늘 너무 재미있었고 또 고맙다는 말을 다시 한번 했을때 페트리샤는 별소리 다 한다는 듯 빌리의 손을 꼭 잡으며 어깨에 머리를 기대 왔다.
“페티의 숙소가 벨그라드 호텔이라고 했지?”
빌리의 이말을 듣는 그녀의 표정이 순식간에 변했다. 원망의 눈초리로 빌리를 빤히 바라보는 눈길에는 원망의 감정까지 담겨 있었다.
“이 즐거운 밤에, 북극의 하얀 눈 이외에는 우리를 간섭 할 수 있는게 전혀 없는 여행지에서 페트리샤가 빌리를 두고 혼자 자야 한단 말이에요?”
“그래 눈이 너무 하얗지.”
빌리는 그녀의 손을 꼭 쥐어 주었다.
“이반, 우리 그냥 함께 메지두나로 가기로 했어.”
빌리가 앞자리에 앉은 이반에게 이렇게 말하자 페티의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다음날 빌리는 보로이와 함께 하바로프스크로 날아갔다. 밤 비행기 였는데도 오전 부터 하루종일 바빠야 했다. 보로이가 호텔로 찾아와 서둘러 대는 바람에 일찍 호텔에서 나섰고 러시아군 군수기지 실권자라는 장성 한사람과 점심을 함께 했으며 오후에는 로얄석에서 볼쇼이 발레단의 무용공연을 관람 했다.
이왕이면 유명한 백조의 호수를 봤으면 했는데 마침 볼쇼이 극장에서는 ‘지젤’을 공연 하고 있었다. 보로이는 지젤이 더 문학적이라고 했다.
신분이 다른 두 남녀의 사랑을 그린 비극이었는데 여주인공 지젤의 영혼이 그를 못잊어 하는 남자 주인공 알브레히트를 죽어서도 감싸는 그런 정성이 무용 전편에 흐르고 있었다. 새벽 종소리와 함께 안개 속으로 사라지는 영혼의 춤들은 빌리의 망막에 오랫동안 남는 인상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극장을 나왔을때 어두워 지면서 음울해진 날씨처럼 빌리의 가슴도 쾌청 하지 못했다.
지고 지순한 사랑, 대부분의 예술 작품에서 그것은 결혼해서 가정을 이룬 다는 것과는 별개의 것으로 간주 되고 있었고 또 그렇게 묘사되고 있었다. 자신이 가정을 꾸리지 못했고 또 결혼을 약속한 여자가 없기에 그런 사랑을 못한다는 것은 핑계에 불과 했다. 자신은 저 무용극의 주인공들 처럼 그런 사랑을 할 수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젯밤 만 하더라도 또 한명의 여인을 그런 지고 지순한 감정 없이 쾌락 만으로 안지 않았던가. 더우기 페트리샤 그녀에게 빌리는 자신이 뉴욕에 돌아가서의 일 때문에 나름대로 어떤 장치까지 해뒀던 그런 것이 무슨 앙금처럼 가슴의 찌꺼기로 남아 웬지 씁쓸 했다.
빌리는 어제 페트리샤의 어깨를 잡고 자신의 방문을 열면서 한마디 했었다.
“페티의 입이 자물쇠라는 것은 믿고 있는데, 이일 비키 한테는 절대 비밀이다. 알고 있지?”
“그럼요, 그걸 말이라고 하세요, 절대 비밀이죠.”
대답은 시원하게 했지만 그녀의 표정에 살짝 그림자가 드리웠다 가시는 것을 빌리는 느낄 수 있었다.
물론 비키에게 떠벌일 필요 까지는 없지만 그녀가 안다고 해서 큰일이 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빌리로서는 페티에게 오늘일이 여행지에서의 추억 뿐이라는 것을 확실히 해두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페티 역시 그렇게 나오는 빌리의 마음을 눈치 못챌만큼 우둔한 여자는 아니었다.
빌리는 자신의 그런 마음에 대한 일종의 보상이기나 한듯 페티에게 정성을 다했고 페티 또한 적극적으로 나와 두사람 모두 만족했고 아침에 일어 났을때 상쾌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무용극을 보고 나니까 그런 것들이 부질없이 느껴지고 자신이 어째 찝찝하게 여겨 졌던 것이다.
보로이는 무슨 까닭에서인지 어제 일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았다. 하루종일 붙어 다니면서도 또 비행기 속에서도 다른 애기는 죄다 하면서 쾌활하고 자상하게 대했지만 베티얘기만 쏙 뺐다. 베티와 무슨일이 있었음이 틀림 없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분명히 한마디 쯤은 했을텐데 베티가 언제 돌아 갔는지 또 무슨일이 있었는지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젠마노나 왕노사만 하더라도 그렇지 않았을 텐데 보로이는 그런 것들을 쑥스럽게 여기고 부끄러워 하는 그런 섬세한 감정의 소유자 였던 것이다.
빌리는 점심때 김종우를 통해 페트리샤와 베티가 잘 돌아 갔는지 확인 하도록 했던 것이 잘한 일이라고 생각 했다. 김에 의하면 그녀들은 숙소로 잘 돌아갔고 빌리가 무용공연을 보고 있을 때쯤 우크 라이나 로 날아가게 될 것이라고 했다.
‘눈이 너무 하얗기 때문이었지 뭐.’
비행기 밖으로 펼쳐지는 눈산을 보면서 빌리는 혼자 중얼거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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